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핍박받는 자의 복 (마 5:10-12)

  • 잡초 잡초
  • 669
  • 0

첨부 1


- 설교 : 김형준 목사

미국 남북전쟁 당시 한 북군 병사가 지었다고 알려진 다음과 기도시가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하나님께 능력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겸손히 복종케 하기 위해 나에게 약함을 주셨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큰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께 건강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병약함을 주셨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행복하기 위해 부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명하게 하시려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많은 존경을 받으려고 높은 지위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과 더욱 가깝게 하시려고 더 낮게 만드셨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온갖 좋은 것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내가 구한 것을 주시지는 않았지만
  모든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도록 참 생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내가 원한 것은 하나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진실로 필요한 것은 다 얻었습니다.
  부족한 나에게 나의 숨은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자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성도들은 보통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이 있고, 기대하는 바를 소원으로 아룁니다. 아뢰던 제목이 응답될 때는 흔히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하다보면 기대와는 다른 결과가 나타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이제 팔복의 마지막에 이르러 복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말씀하실 때에 주님께서 정말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욕 먹고 비난당하고 경제, 사회, 정치적으로 박해와 고통 받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과 핍박은 아무리 연결지어 보려 해도 쉽지 않습니다. 남들로부터 칭찬받고 존귀히 여김 받아야 복 있는 사람일 텐데, 비난과 욕으로 생활 속에서 실질적인 피해를 입는 생활이 어떻게 복 있는 자의 삶이란 말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핍박 받는 자에게 있는 복’ 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먼저는 이 전제를 알아야 할 것이고, 다음으로 아무리 좁은 길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핍박받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 깨우쳐 주신다면 우리는 핍박받는 자리로 들어가야 할 줄로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진리임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핍박받는 자’ 앞에는 ‘의를 위하여’라는 전제가 함께 나옵니다. 핍박이라고 할 때 흔히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조롱과 비난, 어려움을 생각하기 쉽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핍박은 예수님을 위해 받는 것을 말합니다. 한 아이가 공부 안 하고 매일 놀다가 시험 성적이 시원찮아서 부모에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교회 와서 선생님께 “선생님, 저희 부모님이 저를 핍박해요.” 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 남편이 카드를 정신없이 써서 아내가 바가지를 좀 긁었더니 남편이 밖에 나가 동료들한테 “내 아내가 나를 핍박한다.”고 한다면 이것도 앞뒤가 맞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핍박과 처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핍박이란 좋은 일을 한 것에 대해서 나쁜 사람에게 받는 것이요, 처벌은 나쁜 일을 한 것에 대해서 좋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이다.’이런 차이에 따라 우리의 실수나 무지, 잘못된 태도, 자기중심적인 생각이나 행동으로 인해 받는 어려움을 처벌이라 하지 핍박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의’에 대한 설명은 11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나를 인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즉 우리가 예수님과 가까워지기 위해 또는 예수님 뜻을 찾아가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고자 할 때 다른 사람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당하고 경제적으로 손해 보고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우리에게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는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의미는 예수님이 의로우심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때문에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것이면 복됩니다. 또 디모데후서 3장 12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핍박 받고 있지 않다면, 어찌 보면 복 있는 사람의 삶은 아니라고 역설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 안에서 주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데 왜 핍박이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지금부터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째 세상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 그대로 세상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늘의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지금 세상이 자기 삶의 전부입니다. 세상이 잘 되고 풍성하고 발전해야 됩니다. 현 세상을 아름다운 낙원으로 만드는 것이 이들의 목표입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 사람들에게 상을 줍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 협력하고 돕는 사람들을 높이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역사관 가운데 진화론적인 역사관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인류가 수많은 질병으로 고생했지만 의학이 발달하면서 질병은 하나 둘씩 극복되고 인간의 평균수명은 점차로 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에서 120년 전에는 인간의 평균 수명이 35세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배 이상 늘지 않았습니까? 그렇듯이 사람들은 세상은 날이 갈수록, 과학이 발달할수록 점점 좋아져 지상에 낙원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진화론적인 역사관입니다. 진화론적인 역사관은 세계 제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지나면서 그리 견고한 세계관이 아님이 증명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 내면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죄성을 인간 스스로는 극복할 수 없기에 역사가 진행될수록 좋아진다고 확신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진화론적 세계관과는 달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해 근본적으로 희망이 없다고 믿습니다. 세상에는 희망과 구원은 없기에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회피와는 다릅니다. 세상은 천로역정에 나오는 표현으로 하면 ‘장망성’, 즉 ‘장차 망할 성’입니다. 죄 때문에 곧 멸망할 세상, 이 땅의 원리와 법칙에 따라가면 망할 수밖에 없기에 하늘의 법칙과 하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 바로 우리들,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장차 망할 세상이라면 우리는 왜 이 땅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세상이 아닌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살면서 이웃 사람들을 사랑하고, 유익을 끼치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으로 초청할 사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기 위해, 즉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기준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뜻에 맞춰 살아갈 때만이 세상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그럴 때 또한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인정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은 인간을 위하고 생명을 살려 사람이 위지할 만한 견고한 반석과 같아 의지할수록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주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과 물질의 세계만 보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보면 뜬구름 잡는 사람처럼 보일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은 세상, 더 아름다운 낙원으로 만드는 일에 비협조적인 사람들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스레 핍박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심방 갔을 때의 일입니다. 평소 아주 열심인 여자집사님이셨는데 마침 계신 남편분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남편 분 말씀이 아내에게 불만이 없는데 단 한 가지, 교회 문제만큼은 양보하지 않아 불만이라는 것입니다. 또 평소에 아내는 남편에게 당신을 참 사랑하는데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분이 한 분 있다고 해서 누구냐고 물어보면 하나님이라고 자주 말해왔다는 것입니다. 대체 하나님이 누군데 더 사랑하느냐 했더니 자기를 구원하신 분이며 당신을 사랑하는 분이라고 하는데, 남편 생각에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남편만 사랑하면 됐지 남편 외에 또 누가 필요하냐는 이야기입니다. 남편 생각에 교회에 다른 남자를 숨겨 놓은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나 성도 중 한명일 것이다 생각해서 저를 만나보고 싶었답니다. 그래서 제가 “형제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 집사님이 정말 사랑하는 그 분이 세상에서 네가 사랑할 사람은 남편밖에 없다고 말씀하시고, 집사님은 하나님 말씀을 꼭 지키는 분이기 때문에 앞으로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고 말씀드렸더니 그제야 안심이 된다고 합니다. 덧붙여 제가 “그런데 그분이 한 말씀 더 하시기를, 네 아내를 네 목숨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라고 했더니 “아, 그럼 그래야지요.” 하시면서, 그 후로 남편과 아내가 함께 신앙 생활하는 것을 제가 볼 수 있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예수 믿을 때에 많이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남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은 아내, 나는 남편으로 둘이서 사이좋게 재미있게 한 가정 꾸려보자는데, 주일날 아침 되면 언제 나갔는지 아내는 이미 없습니다. 하루 종일 모임 하느라 저녁이 되면 지친채로 들어오는 아내를 보고 오히려 남편이 밥을 해내야 하는 형편이 되니 남자들도 속상하지 않겠습니까?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정에도 충실해야 하지만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우리는 궁극적으로 세상 기준과 다르게 살기 때문에 핍박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핍박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핍박을 허락하셨을까요? 핍박은 진짜 성도와 가짜 성도를 분별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평소 건강하고 자녀도 잘 크고 사업도 술술 풀릴 때 하는 신앙생활도 은혜이지만, 진짜 신앙은 교회 다니는 것 때문에 남들에게 욕도 먹고 재정적인 부담도 져 보고 인간관계가 깨져보기도 할 그 때 드러납니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이 나타나 진짜와 가짜가 구분되는 것입니다. 인격과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위장할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것은 고난과 환란이 오고 핍박이 올 때 알아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20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씨 부리는 비유가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돌밭에 뿌려진 씨앗을 두고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는 마음도 평안해지고 ‘저렇게 살면 참 좋겠구나!’싶습니다. 말씀 듣고 교인들과 만나 교제하면 기쁩니다. ‘아, 여기가 내가 쉴 곳이구나!’ 생각했는데, 교회 나오면서부터 집안일이 잘 안됩니다. 사업도 어려워지고 예수 믿으면서부터 더 큰 어려움이 옵니다. 이러한 때 우리 본래 믿음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의지하던 교회에서 상처도 받으면서 내 속에 있는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또한 핍박은 성도들을 성숙하게 만듭니다. 히브리서 12장 10절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시편 119편 67절과 71절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말씀하신바와 같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 뜻을 더 깊게 이해하고 새로운 차원의 인생을 배우게 됩니다. 
 
제가 관상 보는 사람은 아닙니다만 철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조금은 보는데 주일, 좋은 날 교회 나와 이렇게 앉아있을 분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교회 나와 예배드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심으로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 섬기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임을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원래 모습대로라면 이 자리에 나와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저부터도 말입니다.

어려움과 고난, 핍박을 통해서 우리 신앙이 얼마나 성숙하는지요. 기도 못하던 사람이 기도하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던 사람이 사랑하게 되고, 가족을 사랑하지 못하던 사람이 사랑하게 되고, 주님께 물질 드릴 때 아까워 떨던 사람이 감사함으로 드리게 되고, 자기 성질을 못 죽이던 사람이 하나님 뜻에 순종하게 되는 이 모든 일은 우리가 때때로 겪는 어려움과 핍박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꾸어지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메리라는 여인이 처녀시절 믿음 없이 교회를 다니는 중에 교회에서 만난 한 청년과 결혼했습니다. 둘 다 전문직에 있었기 때문에 꽤 괜찮은 결혼생활이었습니다. 돈도 벌고 아들도 태어나고 생활이 안정되다보니 구태여 교회 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교회가기를 쉬었습니다. 얼마 있다 메리 부부에게 권태기가 찾아왔습니다. 보통 권태기가 찾아오면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보내던 관심을 자녀에게 쏟아 붓습니다. 메리도 아들에게 모든 정성을 쏟았습니다.
 
어느 성탄절을 앞두고 아들이 엄마에게 선물을 했습니다. 아직 성탄절이 되지 않았으니 선물을 풀어보고 싶지 않다고 하는 엄마에게 아들이 진지하게 말합니다. “엄마, 제가 엄마 사랑하는 것 아시지요? 그런데 사실은 엄마보다 더 사랑하는 분이 계신데 하나님이에요. 저는 엄마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래요.” 엄마는 아들이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사실에 이의를 달지 않았지만 아이가 어떻게 교회에 나가게 되었을까 궁금하면서 한편으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아이들과 얼음판에서 놀던 아들이 얼음이 깨져 그만 물속에 빠지고 맙니다. 한 시간 후에 아이를 건졌지만 이미 익사한 후입니다. 메리는 아들을 가슴에 부둥켜안고 부르짖습니다. “I hate you, God!(당신을 증오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우리 가정에 이런 아픔을 주실 수 있습니까!”

그 때 여인은 누군가 자신을 감싸 안는 느낌을 받으며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 아이가 나에게 주려 했던 선물이 무엇이었을까?’ 성탄절에 뜯어보려 했던 선물입니다. 그 속에는 비싸지는 않지만 조그마한 십자가 목걸이가 있었습니다.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남긴 충격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엄마, 십자가를 잊고 살아왔잖아요. 엄마, 아빠, 이 십자가를 다시 찾으세요.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찾으세요. 엄마 아빠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은 진짜 삶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엄마 아빠에게 주신 은혜를 왜 잊어버리고 있는 거예요!” 두 부부는 이 십자가를 통해 아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강렬한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바로 무릎을 꿇고 회개했습니다.
 
메리와 남편은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아들의 이름을 따서 “티제이 선교회(T.J. (Through Jesus,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Ministry)"라 하고, 어린 자녀를 앞서 보낸 부부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상담하는 사역이었습니다. 더 많은 고통과 아픔 가운데 있는 사람을 위로하고 도우면서 부부는 새로운 인생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핍박과 고난은 우리 눈을 열어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보도록 합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핍박이 없었더라면 주님 전에 나오지 못했을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아니 나왔다 하더라도 기도가, 말씀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 사람이 너무나 많을 것입니다.

만약 출애굽 당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쉽게 허락했다면, 그리고 광야도 15일 만에 지나 가나안으로 바로 들어갔다면 출애굽기와 민수기, 신명기는 없을 것입니다. 위기와 어려움, 고통과 고난, 절망과 좌절의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사건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라파, 여호와 닛시, 여호와 샬롬,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섭리가 고난과 핍박을 통해 구체적으로 체험됩니다.

핍박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하며 살아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체험하게 되는 계기가 바로 핍박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가슴 아파하시면서도 핍박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셋째 핍박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축복하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 생각에야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면 기왕에 로또복권을 통해서 하셨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축복은 핍박을 통해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복 받을 수 있는 자세가 어떤 자세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쏟아부어주실 수 있는 자세가 두 가지 있는데, 바로 순종과 겸손입니다.

어떤 사람이 순종을 잘 합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들도 하자는 대로 내버려 둔 자녀는 절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세 살 이전에 반드시 한번은 자녀의 고집을 꺾어야 합니다. 꺾지 않으면 아이는 끝까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세살 보다 더 커서는 안 됩니다. 안 되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엄하게 가르쳐야만 아이가 부모 말에 순종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의지를 굴복시키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에 대해 파산 선고를 한 사람만이 순종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구나.’ 하는 사람만이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대로 잘 살아왔어. 나는 괜찮은 존재야.’ 하는 사람은 절대 순종할 수 없습니다. 끝까지 자기 자존심과 주장만을 내세웁니다. 쉽게 말해서 많이 혼나본 사람들, 이리 가면 이리 간다고 혼나고, 저리 가면 저리 간다고 혼나본 사람들이 ‘아, 이 길이 내 길이 아니구나!’하면서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사람들 외에 또 겸비하여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십니다.  고장 난 브레이크와 핸들로는 아무리 좋은 차라도 탈 수 없습니다. 사고 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으로 잘못 사용하여 바람피웁니다. 돈을 엄청나게 벌었는데 그 돈으로 향락에 취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까지도 같이 망하게 합니다. 준비가 아직 안 된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부어주시기 위한 가장 좋은 조건의 인생이 바로 겸손한 사람과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대적한다 하셨습니다. 교만은 넘어짐의 앞잡이요, 패망의 선봉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교만입니다. 사람은 아홉 가지를 못해도 한 가지를 잘하면 그 때문에 교만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고개 들고 다닙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나님께 겸비하여 나올 때에 주께서 그 인생을 사용하십니다.

성경에 쓰임 받은 사람들을 한 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낮추시고 겸손하게 만드셔서 축복주신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 했을 때, 철저하게 순종했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보시고 축복하셔서 사용하셨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이 이곳저곳 쫓겨 다니고, 감옥에 들어가고, 잡혀서 종으로 팔려가도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함을 보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높여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죽기까지 복종하였더니, 구유에 나기까지 겸손하게 낮추었더니 주께서 모든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아래 두시고 복종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십시오.
 
이랜드 사원 수련회에 가서 이랜드 사장이신 박성수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었습니까?’ 여쭈었더니 노사문제로 굉장한 고통과 어려움이 있었을 때 할 수 없이 미국으로 1~2년 정도 도피했었다고 합니다. 갔다와보니 팀별로 너무나 잘 운영을 하고 있더랍니다. 본인이 직접 경영할 때보다 훨씬 더 잘 하더라는 겁니다. 본인이 모든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라는 것을 거기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노사문제라는 고난과 어려움이 없었다면 이랜드는 이만큼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자신 이상 클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통로는 겸손과 순종이고, 핍박은 축복받는 통로를 여는 역할을 합니다. 주님 때문에 혹시 가정 안에서 핍박 받고 있습니까?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사회적으로 고통과 아픔을 겪고 있습니까? 기뻐하십시오. 주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을 넘치게 받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목사님, 지금까지 기다렸는데도 하나님께서 잘하고 있다 칭찬 한 마디 안 하시는데 어떻게 합니까?’ 하시는 분 있습니까? 음악회 한참 하고 있는데 중간에 일어나서 박수치는 사람 봤습니까? 연극 하고 있는데 박수치는 사람 보셨습니까? 끝나야 박수치지 않습니까? 끝나야 꽃다발 주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이 끝나는 날 주께서 축복하실 것이며, 그 날에 다 갚아주실 것입니다.
 
기쁘게 우리를 맞이해 주실 주님을 바라보면서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것,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는 것을 어리석다 생각 마시고 주 앞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걸어가는, 정말 행복한 인생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