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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기본(4) - 바른 예배를 드립시다 (요 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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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윤성진 목사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어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기는 모든 것들을 다스리게 하자 그렇게 계획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했겠습니까? 하나님과 교제하려고 하려면 하나님과 같아야만 교제가 되어집니다. 그래서 교제하기 위하여 사귀기 위하여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서 사람을 만들 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구와 사귑니까? 사람들과 교제합니다. 사람만이 모양과 형상이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개와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개하고 사귀는 사람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와 고양이에게는 사람의 형상과 모양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과 교제하여 하나님 앞에 경배와 영광 돌리고 예배 잘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늘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실 때에도 모세를 통하여서 바로에게 백성을 보낼 이유를 설명합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내 백성이 광야에서 절기를 지키려 하노라’ 예배드리기 위하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신 이유가 예배드리기 위해서 예배드리는 공동체가 되게 하기 위하여서입니다.

창세기는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말씀합니다. 출애굽기는 왜 출애굽 시키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예배드리는 방법을 설명해 놓았습니다. 역사서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은 복을 받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서 예배드리지 않는 사람은 벌을 받는 본보기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가서에는 예배 내용들이 들어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 할 것인가 하는 예배의 내용들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선지서는 예배 잘 다르지 못하는 백성들을 바로 예배드려라 그렇지 아니면 징계 받는다 예배 잘 드리지 못해서 바벨론에 망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회복하여 주님을 맞이하는 이야기들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 전체가 예배 교과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으로 창조하시고 예배하는 공동체로 불러내신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고 우리를 신령한 이스라엘로 불러내어서 죄 가운데서 불러내신 이유도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사람되게 하시려고 불러내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느냐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 하나님과 사귐을 가지기 위해서 교제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예배드리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말고 하나님 앞에 예배 잘 드려 영광돌리는 성도들 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기본이 예배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예배하는 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임금이 되었습니다. 기브온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정성을 다해서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일천 번제는 제물이 천개이다 그런 말도 되어지고 횟수가 천번이라는 말도 되어집니다. 일천 번제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예배 드렸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일천번제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찾아오셔서 ‘내가 네가 무엇을 줄꼬?’ 그때 솔로몬이 “예,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이 수많은 백성들의 선악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아주 우리말로 말하면 박수를 치면서 무릎을 치면서 “그래 너는 부도 귀도 수도 구하지 않고 원수의 생명도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지혜뿐만 아니라 구하지 않은 모든 것도 네게 주겠다.” 라고 온갖 것을 다 주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예배 잘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전무후무한 지혜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바르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오늘도 ‘누가 예배 잘 드리는가’ 하고 찾고 계십니다. 구말리장천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이 시간에 임재해 계시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마음과 형편을 살피시면서 ‘누가 바르게 예배드리는가’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바르게 예배드려서 하나님께 찾겨지는 성도들 될 수 있기 바랍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능하신 능력 많으신 축복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에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보세요. 하나님을 만나니 소망이 없던 여자가 소망이 넘칩니다. 삶의 갈증을 느끼던 여자가 만족합니다. 기쁨이 없던 여자가 기뻐서 물동이를 버려두고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와 보라고 동네에 들어가서 그렇게 외쳤습니다. 전에는 숨어 지내던 여자가 이젠 당당하게 나타나서 이야기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었던 여자가 이제는 남에게 생명을 주는 생명의 길을 제시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예배를 통하여서 하나님을 만나면 이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런 역사를 예배 속에서 경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이 처음에는 예수님을 지나가던 한 유대 남자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보통 남자가 아니라 이분이야말로 선지자구나 선지자는 아는 것이 많으니까 질문을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리라고 해서 지금까지 그 산에서 예배드립니다. 당신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 드려야 한다고 해서 거기서 예배드리지요? 그러면 어느 곳에서 예배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됩니까? 그때 예수님께서는 예배의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예배가 무엇입니까?

23절을 보겠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찌니라’ 아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할찌니라’ 이것은 예배 때마다 기원시간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 말씀을 통하여서 예배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서 하나님에게 참 예배자로써 발견되어지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라는 말은 구약에서 3가지 용어로 쓰입니다. “다라쉬”는 ‘찾는다’ ‘구한다’는 말로 “아바드”는 ‘일한다’ ‘섬긴다’는 말로 또 “사가드”는 ‘납작 엎드린다’. ‘경배한다’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 예배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서 납작 엎드려서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예배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5가지 용어로 쓰입니다. “레이투르기아”는 봉사라는 말로 쓰입니다. “세모바이”라는 말은 ‘존경하여서 머리 숙이다’. ‘경배하다’라는 말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라트레이아”는 ‘섬긴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트레스케이아”는 ‘경건하다’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프레스쿠네오”라는 말은 ‘땅에 엎드려서 입 맞추다’라는 말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신약적 예배의 개념은 ‘하나님을 존경하여 땅에 엎드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예배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영어에서 예배는 “service”, ‘섬기다’ “worship” ‘가치 있는 것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엎드려 절하며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드려서 섬기는 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한번 따라 하겠습니다. “예배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엎드려 절하며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드려서 섬기는 것이다.” 예배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엎드리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면 비록 우리가 의자에 앉아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자세는 납작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절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에게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 가장 귀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려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예배란 것입니다. 그럼으로 예배는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주시는 복이 은혜인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세배를 잘 하면 세뱃돈을 줍니다. 우리가 예배 잘 드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복을 주십니다. 체험을 주십니다. 능력을 주십니다. 평강을 주십니다. 기쁨을 주십니다. 온갖 필요한 것을 다 주십니다.
세배 돈 받기 위해서 세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배 잘 하면 어른들이 세뱃돈을 주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예배 잘 드리면 하늘의 신령함과 땅의 기름진 것으로 우리에게 축복으로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절하고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드리고 섬겨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위로부터 내리는 신령한 은혜와 축복과 땅의 기름진 것을 받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예배의 대상

예배가 그렇다고 하면 예배의 대상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대상을 바로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실 때 예배드리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섬겨서 바른 예배를 드리지만 안 믿는 사람들도 예배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드리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것에게도 예배 안한다’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에게 하든지 예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21절에 보면 ‘아버지께 예배할 때에’ 23절에 보면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절에는 ‘하나님은 영이시는 예배하는 자가’ 이렇게 예배 대상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시다’라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의식만 있으면 우리는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온 천지만물을 지으신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지혜와 능력이 무궁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티끌도 되지 못하는 이런 존재가 감히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 나와서 예배드린다 그분을 섬긴다. 우리가 그분을 만나고 있다 생각하고 예배를 드려보세요.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우리의 예배시간이 지루하거나 예배 시간에 늦지 않을 것입니다.
부산대학에 가보면 의사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 몇 시간 전에 표를 받습니다. 은행에서 번호표를 빼듯이 번호를 받았다가 시간이 되면 접수를 합니다.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도 몇일 전부터 약속하고 신원조회하고 다 준비하여서 대통령이 나오기 전에 미리 준비하여서 만나게 됩니다. 늦게 나와서 만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도 주일 아침이 되어지면 116으로 전화를 합니다. 그러면 초까지 말해줍니다. 몇분 몇초입니다. 그것에 따라서 초침을 맞춥니다. 그리고 2분 30초 전에 강대상으로 나옵니다. 2분전에 찬양하라 하고 시작합니다. 정시가 되어지면 찬양대의 찬양으로 예배가 시작되어 집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예배드린다면 상습적으로 늦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복장도 아무렇게나 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대통령 앞에 나가는 복장과 두발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저는 대통령에게 나간다고 할지라도 지금 복장보다 더 잘 입고 나가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하나님과 비길 것입니다.

복장 이야기가 나와서 말씀드립니다. 어제 결혼식에 특송을 하는데 코트를 하고 목도리를 하고 나와서 특송을 하였는데 참 보기가 딱했습니다. 이것은 남의 예식을 우습게 보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좀 바르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복장도 깨끗하게 정말 하나님을 만나러 나가는 자세를 가지고 나가야겠습니다.
우리의 예법을 보면 한복은 두루마기를 입는 것이 예법입니다. 양복은 실내에 들어오면 외투를 벗는 것이 예법입니다. 그런데 교회 그렇게 하고도 대중석 앞에 나와서 인사하거나 수금을 하러 나올 경우 코트를 입고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의식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분은 여름에 예배를 드리다보면 밖에서 겉옷을 잘 입고 오다가 교회 들어와서 웃옷을 벗고 셔츠바람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저 분이 정말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고 할 수 있을까? 정말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면 밖에서 벗고 있다가도 교회 안에 들오면 입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볼 때 정말 예배를 드리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여기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데 다리 꼴 수 있습니까? 법원에 가서 판사앞에서 다리 꼬고 앉아 있으면 큰일납니다. 하나님이 판사와 비교가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다는 이런 마음만 있으면 우리의 옷 입는 예절도 달라질 것이고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달라지는가 모릅니다.

이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린다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린다면 예물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드릴 수 없습니다. 어제도 결혼식을 마치고 내려가니까 어떤 분이 차비가 없다고 도와달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비가 없으니 빌려주시면 갚겠다고 하는데 수도 없이 차비도 주어보았지만 아직도 한번도 갚는 사람 없어요. 그래도 한 사람이라도 어려운 사람 있을까봐 속으면서라도 도와주는데 그분은 아예 도와달라고 해서 얼마면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2만원이면 되겠다고 해서 제가 옷을 바꿔 입고 와서 지갑이 없어서 돈을 빌려서 그분에게 드렸습니다. 지금도 천원짜리 도와주면 집어 던지는 사람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릴 때에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이런 마음을 갖고 오세요. 내 형편으로 천원도 큰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린다고 생각하면 최선을 다해서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는 마음으로 드린다면 우리의 예배가 많이 달라 질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의식 없이 드립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만남의 감격과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려서 하나님을 만나는 성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에게 주시는 능력을 예배를 통해서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예배를 신령으로 드려라

예배를 어떻게 드리라고 하였습니까?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신령은 성령이 아닙니다. 성령을 이야기 할 때는 정관사를 붙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정관사가 없습니다. 신령과 할 때의 신령은 성령이 아니고 우리의 영입니다. 예배드리는 자의 영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라는 것입니다. 몸만 가지고 예배드리는 것은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질로 헌금만 드리면 예배드리는 것이다라는 착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설교만 듣고 가면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으로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려야 그것이 바른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우리의 영으로만 만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 몸의 어떤 느낌이라든지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것은 우리의 영이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으로 예배 드려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영은 비물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기 때문에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으로 마음으로 하나님을 느낄 수가 있고 체험하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영이신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계신다는 하는 이 사실을 믿고 예배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두 세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 신실하신 주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왜 모였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수백명이 모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장소에 주님이 확실히 계심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말리장천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서 예배를 받으시고 이 자리에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예배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서 우리의 예배를 받고 계신다면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은 바람, 공기, 성령, 숨 등으로 해석되어 집니다. 과학적으로 진공의 상태를 만들긴 하지만 자연은 진공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어디든지 공기가 다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어디든지 다 계시는데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기가 안 보입니다. 그러나 공기가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습니다. 공기 자체는 안보이지만 공기가 움직이는 것을 우리가 연기나 김이나 이런 것들을 바라보면 “아~ 공기가 저렇게 흘러가고 있구나” 시원한 공기가 지나가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고, 따뜻한 공기가 지나가면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이렇게 우리가 공기를 느낄 수 있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배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여기 계신다는 것을 믿고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을 예배를 통해서 만나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만지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는 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구나’ 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찬송할 때에 찬송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배하는 곳은 하나님과 만남의 장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와서 하나님을 못 만나고 가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청와대 대통령을 만나러 가서 못 만나고 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 되고 난 다음 미국의 대통령을 만나러갔다가 못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피눈물을 흘리고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러 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못 만나도 안타까운 것도 별로 없고 그저 몸만 왔다가 가면 예배라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이제 그런 착각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애를 써야합니다. 기도 속에서 찬양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내 앞에 계신다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 드려보세요. 그러면 그 기도가 산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나에게 말씀하신다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세요. 그러면 내 삶이 달라집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독창자로써 하나님 앞에 찬송을 드린다는 자세로 찬송을 하면 찬송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찬송 중에 거하신다고 했습니다. 청와대 대통령이 계시면 청와대 안으로 들어가야 대통령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찬송 속에 거하시기 때문에 찬송 속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찬송하면서 찬송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찬송을 택하면서 굉장히 신경을 씁니다. 우리 찬송가 중에는 찬송 아닌 찬송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찬송은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입니다. 오늘 그런 시각으로 찬송을 보세요. “나가세 나가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이런 것은 찬송이 아닙니다. 찬송은 내 결심이 아닙니다. 찬송은 하나님 자체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떻게 하면 찬송을 통해서 하나님을 앞에 나아가게 만들까? 라고 생각하면 찬송을 택할 때 굉장히 조심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의식 없이 찬송을 불러버립니다.

우리가 설교 다음에 ‘왕이신 나의 하나님’ 찬송을 부르게 될 것인데 찬송을 부를 때에 찬송의 가사를 안보고 외워서 눈을 감고 찬송의 가사를 따라 상상하면서 찬송을 부르면 찬송이 얼마나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유행가를 부를 때에는 책보고 부르는 사람이 없는데 찬송은 왜 찬송가를 보아야 부를 수 있습니까? 찬송을 많이 부르고 관심을 가지고 부르면 우리가 다 찬송가 외워서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나오는 복음송은 가사도 간단하고 한절이 많고 반복되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찬송을 드린다는 마음의 자세로 찬송을 하게 되어지면 손들고 “찬양하라 내 영혼아” 라고 찬양 할 때 눈물이 쏟아집니다.
“지존하신 주님 앞에” 그 지존하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찬송한다고 하면 가슴이 울렁거려져야 합니다. 왕이신 하나님이 태산보다 높으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다고 한다면 눈물이 쏟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의식 없이 부릅니다. 뒤에 가서 아멘 해야 정신이 드는 이런 찬송을 하면 천 번을 불러도 그 찬송은 찬송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 찬송을 하되 언제까지 찬송을 할 것이냐 예배 시간이 한시간이기 때문에 찬송을 오래 부를 수 없지만 예배 시간이 두어 시간 된다면 찬송을 30분 이상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은혜가 될 때까지 눈물이 날 때까지 한 절을 계속해서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부르면 찬송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부르고 뜨거워질려고 하면 끝나니 찬송 속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에서 머뭇거리다가 끝나고 맙니다.

이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하는 사실을 느끼고 능력 많으신 하나님을 체험하여서 오늘 우리의 삶이 바뀌어지고 우리의 가슴이 달라지고 건강, 인생이 달라지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예배를 드리려고 하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3절을 개혁성경으로 보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라고 했는데 현대인의 성경에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고’ 쉬운 말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으로 예배드리고’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에 우리의 영으로 예배드리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배 드려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바른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힘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 나의 예배를 도와주시옵소서” 나의 예배에 기름 부어 주시고, 나의 찬송에 기름 부어 주시고, 내가 듣는 말씀에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면 성령께서 오셔서 도와주셔서 내 영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체험하는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영이 하나님께 예배 드려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를 드려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나타났던 놀라운 삶의 변화가 솔로몬에게 일어났던 삶의 놀라운 축복이 엘리야에게 일어났던 놀라운 응답이 오늘 우리의 예배 속에 넘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예배’ 진정으로 드려라

다음은 ‘진정으로 예배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진정이라는 말은 진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진리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대로 계시된 방법대로 예배 드려야 된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나옵니다. 가인과 아벨은 부모인 아담과 하와를 통하여서 에덴 동산의 축복된 모습을 이야기 들었을 것입니다. 범죄 하여서 타락하여서 잃어버렸던 에덴동산,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던 사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을 것이고  들었기 때문에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제물을 들고 나가지 않습니까?

가인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방법이 아닌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어린양을 잡아서 드렸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이 믿음이 어떤 믿음인 줄 아십니까? 우리는 범죄 하여서 이 모습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지만 내 대신 제물을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그 죽은 제물을 보시고 내가 죽은 것처럼 인정하시고 나를 받아 주실 것이다라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제물의 죽음은 나의 죽음입니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렸던 것이 아벨의 믿음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배를 받아주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예배가 정말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진리를 따라서 예배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진리는 성경이 계시한대로 말씀대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범죄 하여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주셨다. 그리고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다”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라는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예배 드려야 이 예배가 진정의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아니하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들고 가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드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배드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앞세워서 그 피를 뒤집어쓰고 예배드리는 것이 진정의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아! 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죽어주셨구나! 나의 제물 되어 주셨구나!” 그 예수님을 의지하고 오늘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다는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예배드려야 진정의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를 드려서 드려지는 예배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의 구심점이 예배입니다. 기준과 구심점이 흔들리면 다 흔들립니다. 우리의 삶의 구심점과 기준은 예배입니다. 예배 생활이 흔들리면 다 흔들립니다. 예배에 실패하면 다 실패합니다. 가인이 예배에 실패하니까 살인자가 되어지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은 예배가 실패하여 나라를 잃어 버렸습니다. 예배만은 실패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서 인생의 성공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예배는 대상을 바로 알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드려서 섬기는 것입니다.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 그런 하나님께 어울리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내가 드린다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예배는 영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영을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만 가지고 드리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내 방법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 계시된 방법,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야 참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예배를 드려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 드려지고 하나님을 만나고 이런 예배를 드려서 하나님께 찾겨지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른 예배자에게 주시는 축복, 솔로몬에게 주셨던 축복, 엘리야에게 주신 축복, 이런 놀라운 믿음의 선진들이 예배 잘 드려서 받았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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