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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을 공급하는 교인이 됩시다 (벧후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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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강성찬 목사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며 사랑가운데서 행하는 교회로서 사랑을 나타내는 교인 사랑을 공급하는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참예한 자들이 되었음을 밝히면서 성도가 이러한 신의 성품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함을 강조 합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을 전제로 하여 신앙의 진보를 위한 여러 가지 덕목들을 더할 것을 말했습니다. 모든 덕목은 사랑을 목적하였던 것입니다.

  '존 웨슬리'가 1738년 5월 24일 성경을 읽고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한 구절로 알려집니다. 우리도 함께 은혜를 받고 사랑을 공급합시다.


  더욱 힘써 믿음에 서서 

성도의 성결 생활, 즉 영적 성숙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성도의 영성 생활은 일반적인 단순한 윤리 생활과는 다른 것입니다. 일반인들은 사회 윤리 규범을 기초로 생활하지만 신앙인은 믿음을 기초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기초가 되지 않는 성도의 선행, 의 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믿음은 여러 형태로 나타납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던 메롤탈이란 사람이 쓴 "강한 바람과 같이"라는 책은 미국에서 수백만부가 팔릴 정도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와 감동을 주었던 책이라 합니다. 그 내용 가운데 하나에 놀라운 기도 응답의 역사가 소개된다합니다.

메롤탈이란 사람이 자기 삼촌하고 시골 마을에 긴급히 가야할 상황이 생겼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 느헤네야라는 강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배도 없고 다리도 없었습니다. 안타까운 상황이었는데 그 때 그의 삼촌이 기도하고 일어서더니 맨몸으로 강을 건너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뛰어가서 말렸는데 그 삼촌 말이 '주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야 만일 내가 여기서 죽거든 복음을 전하다 죽었다고 전해 주게...' 성큼 성큼 강물 속에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강 한 복판에서도 강물은 무릎 위를 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가 응답된 것으로 믿음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랑을 공급하여야 합니다.




  믿음에 덕을

믿음이 기초가 된 다음에는 덕이 필요합니다. 덕은 특수한 속성으로서 지혜, 선, 능력, 의를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용감한 사람보다 덕 있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 도시 생활에서 완악해질 대로 완악해진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마음을 녹여 줄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후덕한 사람입니다. 덕망이 있는 사람은 요란스럽게 일하지 않아도 쉽게 소란을 평정시키며 어려운 일도 손쉽게 해결합니다. 이는 덕을 지닌 사람만이 지니는 특징입니다. 덕도 여러 형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실베스터 호른이 런던 공원에서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관한 설교를 하는데 반쯤 취해 있는 한 노동자가 방해를 하였습니다. 그 모임이 끝났을 때 그 노동자는 호른과 논쟁하려고 했습니다. "켄터베리 대주교에 대하여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의 본문은 캔터베리 대주교에 대하여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말하고 있지 않고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 교황에 대하여서는 어떠한가요?" "나의 설교 본문은 너는 로마 교황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술에 취해서 멍해진 머리로도 그 설교자가 뜻하고 있는 의미를 알아듣고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라면,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라면 나는 그것에 대하여는, 모자를 벗을 것이오." 이것은 바로 그 술 취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뛰어난 도덕성에 관하여 언급한 증언입니다. 믿음에 덕을 가지되 그리스도의 덕을 품고 실천하며 사랑을 공급하여야 합니다.




  덕에 지식을 더하며

성결 생활에 있어서 성숙은 믿음과 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지식을 더해야 합니다. 사람이 덕만 있다 보면 바보스럽게 됩니다. 그래서 자칫 덕이 교활한 악인의 이용물이 될 수 있고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통찰력의 지식이 더해질 때 덕 있는 사람은 더욱 풍부한 신앙의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지식도 어떻게 어떠한 지식을 갖느냐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옛날에 가난한 선비가 있었습니다. 그는 온갖 고생을 하면서 공부했고, 그렇게 배우고 익힌 지식을 열심히 종이에 기록해놓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둑이 들어와서 그의 그 귀중한 종이를 비롯한 가재도구를 모두 가져가 버렸습니다. 선비는 도둑의 뒤를 쫓아가서 다른 것은 다 가져가도 좋으니 그 종이 뭉치만은 꼭 돌려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도둑은 이까짓 종이 조각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비는, 그 안에 귀한 지식이 들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도둑은 크게 웃으며, "핫하하하, 이 멍청한 선비야! 도둑맞을 수 있는 지식은 올바른 지식이 아니라네."라고 말하며 종이뭉치를 내팽개쳐 버렸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참된 지식은 나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을 때 그 것이 귀한 것이지 나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지 않다면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나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라고 말씀합니다.(잠10:14) 즉 간직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지식의 귀중성은 알지만 간직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지식의 소중성을 알고 자녀들에게 지식을 가르쳐 주고 우리들도 배우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고기를 잡어 주는 것보다 고기 잡는 지식을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지식을 간직하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에 덕 덕에 지식을 가지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더하며 사랑을 공급합시다.




  지식에 절제를,

지식에 절제를 더하라는 것은 통제를 말합니다. 사람이 지식이 많으면 교만해지기 쉽고 자만심 때문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남보다 좀 더 많이 배움, 명문 학교를 다님, 전문적 지식을 습득함은 스스로 패망의 선봉이 되게 하는 함정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절제가 필요합니다. 절제란 모든 지각을 적당히 제재하는 것이요, 동물적 요소를 이성적 요소로 묶어 두는 것입니다. 절제 없는 지식은 유익보다 유해한 때가 많습니다.

  플라톤은 이성은 흰 말로,욕망과 본능은 검은 말로 표현하였다합니다. 이성의 흰 말이 수레를 끌어야 인생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욕망과 본능의 검은 말이 수레를 끌면 늘 위태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스토아 학파 제논의 제자 중에는 허영이 심하고 겉치레에만 치중하는 제자가 있었다합니다. 그가 늘 절제하지 못한 삶을 살기에 제논은 그를 불러 야단을 쳤다합니다. 그런데 그 제자는 “그만한 돈이 있어서 쓰는데 그게 무슨 잘못이 되겠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합니다. 그 때 제논은 “소금이 많이 있다고 요리사가 요리할 때에 소금을 잔뜩 집어넣어도 맛이 좋단 말이냐?”고 훈계하였다합니다.

절제란 없거나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라 많지만 아끼고 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절제는 믿음의 성숙한 단계입니다. 절제할 줄 아는 자는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더하며 사랑을 공급합시다.


  절제에 인내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3) 합니다. 인내는 그저 단순한 참을성이 아니라,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전진하는 역동적인 견고성을 뜻합니다. 이러한 인내는 감정이나 지성에 머물지 않고 의지까지도 조절하게 하여 모든 일에 실수함이나 과함이 없도록 만듭니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분노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한 부인이 목사님께 다가갔습니다. 그 부인은 자기가 성질이 너무 급해서 고민이라며 목사님에게 자기 문제를 고백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작은 일에 가끔 폭발을 하지만, 그리고 나서는 뒤가 없습니다. 금방 풀어버립니다. 마음에 두고 꿍하고 있지는 않지요. 일분도 안 걸려 그 사람하고 그 자리에서 다 툭툭 털어버리고 끝납니다.” 목사님께서 그 부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정중히 말했습니다. “엽총도 그렇습니다. 한 방이면 끝나지요. 오래 안 걸립니다. 그러나 한 방만 쏘아도 그 결과는 엄청납니다. 다 박살나지요”

분노는 터지고 나면 주워 담을 수가 없습니다. 분노의 폭발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합니다. 분노를 느낄 때 하나님을 불러봅시다.  “하나님, 정말 못 참겠습니다. 속히 나를 도와주소서.” 그 순간 성령은 우리를 도와 참고 넘어가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더하며 사랑을 공급합시다.




  인내에 경건을 더하며

강인한 인내에 경건의 미덕이 공급되어야 비로소 성도는 성결 생활의 본모습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절제의 인내가 강인함, 견고함, 자제력을 의미한다면 경건은 깨끗함, 순결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깨끗함과 순결함이 갖춰지지 않은 인내와 절제는 세속적 처세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16세에 주님을 영접하여 93세까지 80년 가까이 기도한 사람으로, 자기가 낳은 일곱 자녀들뿐만 아니라 손자, 증손자들과 수천 명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주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영감을 불러일으킨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그녀가 남을 비판하거나 불친절한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오직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삶을 의탁하고 흔들리지 않았다 합니다. 그녀가 이처럼 놀라운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경건 훈련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매일같이 시간을 정하여 그 시간을 기도와 말씀과 예배의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삶의 최우선을 경건의 시간에 두었기 때문에 그는 어떠한 중대사가 일어나도 경건의 시간만은 지키려고 하였습니다. 나이가 점점 많아져서 거동하기도 불편해졌을 때 자녀들이 모시겠다고 했으나 아직 기도할 수 있고 말씀을 공부 할 수 있는 동안은 혼자서 살고 싶다고 하면서 이제 93세가 된 연로한 노인이지만 기도하는 일과 말씀 공부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기도의 명단을 작성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서 사랑을 베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합니다. 이 기도의 열매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신앙의 사람으로 바뀌어지고 있다합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더하며 사랑을 공급합시다.




  경건에 형제 우애를,

  사랑이 없는 경건은 외식이요 위선입니다. 성도가 덕을 쌓고 지식을 얻으며, 절제와 인내와 경건을 연습하는 것은 곧 형제 우애와 이웃 사랑을 위한 것입니다.

  고려 공민왕 때 어떤 형제가 길을 가는데 앞서 가던 아우가 크고 작은 황금 두 덩이가 든 주머니를 주워 그 중 작은 금덩이를 형에게 주었습니다. 양화진나루에서 한강을 건너가던 이들 중 아우가 갑자기 그 금덩이를 강물에 버리는 것입니다. 형이 괴이하게 여기고 물었습니다. "내가 평소에 형님을 사랑함이 매우 돈독했는데, 지금 금덩이를 갖고 보니 사특한 마음이 생겨 그 우애에 금이 가는 듯 합니다. 이간질하는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라 강에 버린 겁니다." 이 말을 들은 형도 "네 말이 옳다"하고 역시 금을 강물에 던졌다합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우애를 더하며 사랑을 공급합시다.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해야 합니다.

형제 우애(필로스)는 인간관계의 사랑을 뜻하고 거기에 더하는 사랑(아가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적인 사랑입니다. 즉 인간을 대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대하는 인간의 사랑이 함께 어우러질 때 거룩한 종교적 사랑으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장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도 사랑은 역시 영적 성장이 이루어진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형제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까지 끊임없이 성장해 가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인간적인 사랑에 모든 것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신적인 사랑이 규합될 때 인간은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가가와 토요히꼬(하천풍언 賀川豊彦) 이야기를 들어보면 젊은 시절에 빈민굴에서 전도하는 것을 보니 아무리 봐도 친구의 눈에는 이 사람이 허송 세월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도박꾼, 싸움해서 살인한 사람, 전과자, 창녀에게 전도하여 모아 놓고 예배를 드리는데 모두들 찬송을 부를 줄 모르므로 자기 혼자 찬송을 목이 터져라 부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도박꾼이자 깡패인데 술 먹고 토해놓고, 창녀들은 앉아서 히죽히죽 웃고 있습니다. 또 뒤에서는 남자들이 와서 예배드리는 중에 창녀를 끌어내면 창녀는 일어나 나갑니다. 그런가 하면 돈을 내라고 사람들이 가가와의 따귀를 때립니다. 그러면 돈을 주었습니다. 이 친구는 화가 났습니다. "저 사람들에게 돈을 주면 가서 도박을 할 텐데 너는 위선이다. 네가 알고 주느냐"고 가가와에게 따졌습니다. 그때 가가와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같이 한다. "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어린이를 키울 때 넘어지면 일으켜 주듯이, 의사가 병자에게 주사를 놓고 또 놓듯이 넘어지면 일으켜 줘야 한다. 다 알고 마지막까지 믿어 주고 참아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냐?"고 그는 말했습니다. 사랑은 이렇게 마지막까지 참는 것이고 속아 주는 것입니다.(인터넷정보클럽-참으며 속아주는 사랑)




성도들의 사랑의 실천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영혼에 대한 사랑과, 이 땅에서의 육신적인 삶의 문제를 돌보아 주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방안은 전도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물질과 몸으로 봉사하여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구령사업과 물질과 나의 모든 것으로 이웃의 필요를 채워 주는 구제사업으로 사랑을 공급하는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에서 사랑에 이르는 미덕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란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아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되어 있었으나 죄로 인하여 교제가 단절되고 타락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있던 하나님의 모습도 가려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믿고 구원의 약속을 받은 성도들은 다시 이 신적 교제에 참예하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천국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약속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성결을 위한 영적 성숙의 단계로 전진해 가야 합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벧후1:3) 한층 깊이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윤리 생활의 실천이 요구됩니다. 이것이 성도의 영성 생활입니다. 순서 정연한 덕목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며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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