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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봉헌의 회복(1) (말 3:8~12, 막 12:4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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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하준 목사

오늘은 예배에 관한 시리즈 설교 중 봉헌생활에 대해 말씀을 나누어 보려 합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봉헌에 대해 교훈을 주는 구절이 상당히 많습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오늘 주보에 나와 있는 신명기 26장 말씀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이 본문을 정하면서 신명기 26장을 통해 헌금의 자세에 대해 몇 가지 교훈을 말씀드리고 나서 말라기 3장을 통해 십일조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준비하다보니 신명기 26장과 말라기 3장을 한 설교에서 다루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해보니 꼭 두 번 설교할 분량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고민고민 하다가 오늘은 말라기 3장에 나오는 십일조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고 다음 주에 감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면서 신명기 26장을 살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지난번 “참된 기도의 회복”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면서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점 양해하시고 오늘은 말라기 3장 본문을 중심으로 십일조헌금에 대해서만 살펴보고 다음주일에 신명기 26장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의 종류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드리는 헌금만 해도 십일조헌금, 월정헌금, 주정헌금, 감사헌금, 선교헌금 등등 수많은 종류의 헌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헌금이 무엇일까요? 물론 이 모든 헌금이 다 소중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역시 십일조헌금이 가장 대표적이고 귀한 헌금입니다. 왜 그러냐? 한마디로 십일조는 힘든 것이기 때문에 귀합니다. 십일조 하기가 어디 쉽습니까? 십일조라면 내 소득의 10%인데 이게 얼마나 큰 돈입니까? 백만원을 벌면 십만원을 내야하고, 천만원을 벌면 백만원을 내야 합니다. 손이 떨리는 일입니다. 내가 어떻게 번 돈인데, 이 돈이면 사고 싶은 것도 사고 우리 애들 좋은 것도 사줄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어 얼마나 아깝고 떨립니까? 십일조, 이거 정말 쉬운 일 아닙니다. 그런데 십일조가 바로 이렇게 어려운 것이기에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깊은 산속에 샘물이 하나 있습니다. 워낙 깊은 산속에 있어 찾아가기가 쉽지 않지만 워낙 물맛이 달고 시원해 많은 사람들이 찾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물맛이 좋다고 한 번 가보라고 권해도 절대 안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물맛이 좋아도 그렇지 힘들게 거기까지 어떻게 가란 말이야? 난 그냥 동네 가까운 데서 물 떠다 먹으련다.” 그렇습니다. 이 좋은 물맛을 보려면 산속 깊은 곳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이만저만 어려운 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일단 한번 찾아가서 그 물맛을 보고나면 “야, 내가 이 먼 곳 찾아오기를 정말 잘했다.”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귀찮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결국 찾아가지 않습니다. 은혜도 이와 같습니다. 저기 은혜의 세계가 있다. 저기 놀라운 축복의 세계가 있다. 힘들지만 한번 찾아가 봐라하고 아무리 권하고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절대 안 갑니다. 십일조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십일조는 놀라운 은혜의 세계, 축복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아무리 힘들도 어려워도 찾아갑니다. 하지만 아무리 설명하고 권해도 결국 힘들고 어려워서 못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게 고비입니다. 이 십일조가 신앙의 관문입니다. 이 고비만 넘으면, “이” 관문만 넘어가면 정말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맛볼 수 있는데 말이지요. 결국 이 관문을 못 넘겨 오래 신앙생활을 해도 놀라운 은혜와 축복의 세계를 맛보지 못하는 분들이 많으니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십일조에 대해 올바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십일조에 대한 대표적인 성경구절인 말라기 3장을 보아야 합니다. 말라기 3장은 “십일조의 원리”에 대해 아주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첫째, 본문의 8절 말씀은 십일조와 모든 헌금이 본디 하나님의 것임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참 성경이 과격하지요? 그런데 이 말씀은 “너 헌금 안 하고 십일조 안 하면 도둑놈이야.” 하고 협박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헌금과 십일조가 본디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물질관이 들어 있습니다. 제가 지난번 제직헌신예배 설교 때도 설명했지만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청지기입니다. 청지기가 누구입니까? 종으로서 주인의 재산을 대신 맡아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말은 우리가 가진 재산, 물질, 지위, 건강, 시간, 심지어 생명까지도 본디 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인데 내게 맡기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을 맡은 우리는 하나님이 달라고 요구하시면 언제든지 당연히 드려야지 착각하여 내 것인줄 알고 안 드리면 주인의 것을 도적질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십일조의 정신과 주일의 정신은 똑같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일주일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가운데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정하고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 안식일에 하나님처럼 사람들도 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안식일의 정신이 주일에 그대로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주일 가운데 주일 하루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일을 쉬고, 모든 생업에 관계된 것, 내 개인적인 볼일들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을 위해 바치는 것입니다. 일곱 날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을 위해 하루만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고 주일은 반드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이것이 주일성수의 정신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내 것인데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하나님의 것인데 돌려드리는 것뿐입니다. 이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주일에 예배를 드리느냐, 내 할일을 하느냐 선택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주일성수는 선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이기에 반드시 돌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수입 모두가 하나님의 것인데 내게 맡기신 것입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해 그 가운데 최소인 10분의 1을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것인데 큰맘 먹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님의 것이었던 물질을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잘 한 일이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또한 십일조를 하면서 나머지 아홉은 내 것이므로 내 맘대로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열 개 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다만 그 가운데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성전을 운영하고 사업을 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고 나머지 아홉도 내 것이 아니니 내 손으로, 내 판단대로 쓰되 함부로 쓰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귀하게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10절에는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십일조는 온전해야 합니다. 내 수입 모두를 고려하여 온전히 십일조로 바쳐야 합니다. 십일조를 작정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드리기로 작정했다면 내 맘대로 조절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내 모든 수입의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드리면서도 내 맘대로 줄이게 되면 차라리 아니 드림만 못할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를 하면 반드시 놀라운 복을 받게 된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10절 중간에 보면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셨습니다. 진짜 복을 주시는지 안 주시는지 한번 시험하여 보라 이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복을 부으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당장 물질적인 축복을 내려주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상당히 드문 경우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십일조를 하는 족족 다 물질로 채워주신다면 많은 사람이 재산증식을 목적으로 십일조를 하게 될 것입니다. 십일조를 왜 해야 하는지, 신앙적인 정신을 다 잊어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혹 십일조를 하는 즉시 물질적으로 채워주시는 경우도 있지만 이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부어 주실 때가 더 많습니다.

먼저, 11절에 보면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방법 중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나옵니다. 11절 첫머리에 십일조를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황충을 금하신다고 했습니다. 황충이란 메뚜기입니다. 당시에는 메뚜기가 새까맣게 날아와 농작물을 싹 쓸어가 버리는 일들이 자주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1년 동안 농사를 열심히 지어도 다 허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허탈한 일입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돈을 열심히 벌고 재산을 쌓아도 이 메뚜기가 날아 들어오면 한 순간에 다 날아가 버리고 맙니다.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것입니다. 이 메뚜기는 무엇일까요? 우리를 속이거나 손해를 끼치는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내게 물질적으로 손해 끼치고 도망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친척이나 친한 친구 등 정말 믿었던 사람인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이런 사람들에게 속아 내 모든 물질을 날려 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열심히 사업을 일으켰는데 IMF 같은 경제한파가 몰아쳐 일으켜 놓은 사업이 한 순간에 무너지기도 합니다. 많은 돈을 투자해 닭과 오리를 키웠더니 조류독감으로 망하고, 전 재산을 투자해 미국산 소고기를 수입했더니 광우병 파동으로 망합니다. 우리 주변에 이렇게 메뚜기 같은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메뚜기를 막아주신다고 했습니다. 돈을 벌게 해주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메뚜기가 틈타는 일을 막아주시니 이것이야 말로 복을 부어주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11절 중간에 보면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몇 년 동안 열심히 땀 흘려 포도나무를 재배해 이제 결실을 막 맺으려고 하는 순간 폭풍이 불어와 과실이 다 떨어져 버립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일을 막아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직접 물질적인 복을 부어주시기도 하지만 이보다는 새나가는 것을 막아주시고, 쓸데없이 낭비되거나 날아가는 일을 막아주시니 실제로 엄청난 물질적 보상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주변에는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하십니다. “목사님, 십일조를 하니까요 참 이상한 일이 생깁니다. 십일조 하기 전과 비교해서 수입이 더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물질에 풍족하고 여유가 생깁니다. 왜 그러죠?” 그 이유는 여러분도 아시지요? 왜 그렇습니까? 전에는 아무리 벌어도 밑 빠진 독 같이 자꾸 새나가고 낭비되고 허공으로 날아가던 돈이 이제 규모를 찾게 되고, 새나가지 않고, 허탈하게 사라지는 일 없이 그야말로 뿌린 만큼 걷게 되니 이런 일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십일조를 함으로 얻는 복은 꼭 내 대(代)에만 받는다는 법이 없습니다. 어떤 나이 많은 노인이 어린 나무 묘목을 심는 것을 보고 지나가던 젊은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습니다. “노인장, 그 나무 다 자라서 베어 쓰려면 몇 십 년은 걸릴 텐데 노인장이 사시면 얼마나 사신다고 이제야 나무를 심습니까?” 참 이상한 사람이죠? 괜히 남의 일에 참견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그 노인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이봐 젊은이, 참 생각이 부족한 사람이구먼. 나무가 자라서 꼭 내가 베어 써야만 대순가? 내 아들, 아니면 내 손자가 나중에 이 나무 자라서 베어 쓰면 될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십일조는 간혹 이런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 자녀나 자녀손을 위해 보험 드신 분들 많을 겁니다. 그런데 이 보험 나 타먹으려고 드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내 자녀와 자녀손을 위한 보험이지요.

어떤 목사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꽤 깁니다. 제 나름대로 이 간증 내용을 줄이고 줄여도 깁니다. 저는 본디 설교 중 예화를 길게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예외입니다. 조금 길게 이 간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이 간증이 십일조에 대해 너무도 중요한 교훈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 간증을 하신 목사님은 아주 옛날 분이신데 처음 신학교를 졸업하고 저 시골마을에 전도사로 부임을 했답니다. 부임을 해서 심방을 하는데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가게 되었더래요. 시집을 와서 아들 하나 낳자마자 남편이 폐병으로 돌아가시고 아들 하나 데리고 과부가 사는데 집은 다 허물어져가고 정말 먹을 것 하나 없어서 남들이 불하다고 부쳐준 쌀로 떡을 해서 팔아 그날그날 근근이 먹고 살던 집안이더랍니다. 그런데 그 집에 심방을 가서 설교를 하는데 하나님이 이상하게도 전도사님 마음속에 이런 말씀을 주시더랍니다. “성도님, 십일조 하세요.” 아니, 지금 이 집안에 십일조 할 재물이 어디 있습니까? 십일조는커녕 그날그날 끼니 해결하기도 어려운 집인데 말입니다. 전도사님도 하도 어이가 없어 그냥 “성도님, 혹시 십일조라고 아세요?”하고 돌려 이야기했더니 그 성도님 “십일조 알지요, 그런데 지금 십일조는커녕 먹고살 일이 막막한데 무슨 십일조 타령이세요?” 하며 통곡을 하며 울더랍니다. 하도 민망해 황급히 인사를 하고 교회로 돌아왔는데 그 다음 주부터 헌금시간에 웬 신문지에 싼 것이 올라와 펴보니 동전 한 닢 달랑 들어있더랍니다. 누가 한 십일조겠어요? 그 과부가 한 십일조입니다. 동전 한 닢 십일조라고 드리려니 봉투에 넣기도 민망해 그냥 신문지에 싸서 낸 것이지요. 그러면 이렇게라도 십일조 하면 좀 생활이 나아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무 변화가 없어요. 여전히 찢어지게 가난합니다. 아무 변화도 없어요. 그러다가 전도사님은 서울에 있는 교회 청빙을 받아 올라오게 되고 그 집과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데 사택 앞에 웬 관용차가 하나 서있어요. 들어가 보니 그 과부(이제는 할머니가 되었지요)가 와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생겼을까요? 전도사님 떠나신 후에도 그 과부의 십일조는 하나도 늘어나지 않았답니다. 여전히 가난하고요. 그런데 이상하게 아들 하나 있는 게 똑똑해서 국민학교만 보내고 말려고 했더니 “어머니 저 중학교 보내주세요. 들여보내만 주세요. 제가 알아서 할께요.” 하더니 진짜 들여만 보내니 알아서 공부하고 고등학교도 그렇게 공부하고 드디어 대학까지 그렇게 공부하고 나서 공무원이 되어 상당히 높은 고위 공무원 자리까지 올라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마치 마가복음 12장이나 누가복음 21장에 나온 가난한 과부가 한 헌금 두 렙돈을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 이야기가 무엇을 말해줍니까? 하나님이 십일조 하는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방법이 여러 가지인데 그 중에 하나가 내 대(代)에는 아니더라도 내 자녀 대에, 또는 내 자녀손 대에까지라도 반드시 갚아주시고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십일조는 자녀들과 자녀손을 위한 최고의 보험이라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자녀들을 위해 심는 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십일조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헌금에 대한 설교를 그리 자주 하지 않는 편입니다. 사실 교회에서 목사가 헌금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십일조 설교 하기는 더 어렵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헌금설교를 들으면 불편해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왜 교회만 오면 맨날 헌금하라는 얘기만 하느냐? 왜 교회에서 십일조니 감사헌금이니 건축헌금이니 헌금을 강요하느냐?” 하는 이유 때문이겠습니다. 하지만 목사는 힘들더라도 성도들에게 헌금에 대해 바로 가르쳐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십일조에 은혜의 길, 축복의 길이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에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오늘의 말씀을 통해 십일조의 진정한 정신을 이해하시고 온전한 십일조를 드림으로 진정한 은혜의 세계, 축복의 세계를 맛보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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