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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제사 (창 4:1~7,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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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하준 목사

서론 : 가인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도 이미 잘 알고 있다시피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인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이 두 아들이 각각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나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지요. 그래서 분노한 가인은 동생 아벨을 쳐 죽이고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다 잘 아시는 이야기지요?

우리는 이 이야기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가인은 악한 사람, 아벨은 선한 사람이라는 생각만 하고 그냥 넘어가게 됩니다. 가인은 죄인이고 아벨은 피해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상당히 많은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그 교훈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선 가인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 4:1에 보면 가인도 분명 하나님의 은혜로 나은 자식입니다. ‘가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도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볼 때 분명 하나님을 알고 믿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셨기에 그는 하나님께 분노하고 동생에게 분노하여 결국 동생을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는데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 하나님을 알면서도 분노와 미움 때문에 큰일을 저지르는 사람, 이 가인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해서 결국 하나님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믿는다고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결국 미움과 증오, 질투로 인해 스스로 파멸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단순히 교회 다니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하나님 앞에 온전한 제사를 드리는 것, 하나님이 열납하실 만한 바른 제사를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사란 오늘날 말로 바꾸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요 ‘감사하는 삶’을 뜻합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예배 생활’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또한 하나님께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사실 본문은 성경의 대표적인 난해구절 중 하나입니다. 난해구절이라 함은 성경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구절들을 뜻합니다. 설명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불신자 중에 제법 성경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이 구절들을 가지고 시비를 걸곤 합니다. 성경에 이런 얘기가 있다는데 그건 도대체 무슨 뜻이요? 하고 물으면 우리는 늘 곤경에 처하곤 합니다. 어떤 구절들이 있을까요? 이를테면 하나님은 도대체 왜 선악과 같은 것을 만들어서 사람이 죄를 짓게 했는가? 안 만들었으면 죄도 안 지었을 텐데 라든가, 가인이 하나님에게 쫓겨난 다음에 다른 곳에 가서 결혼을 했다는데 도대체 그 여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 외에도 또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인가? 등등입니다. 참 어려운 질문이지요? 아마 여러분도 이런 질문 한 두 번은 꼭 받아보셨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질문까지 합니다. “레위기에 되새김질 안하거나 굽이 안 갈라진 짐승은 못 먹는다고 되어있는데 토끼는 되새심질을 한다고 쓰여 있다. 어떻게 된 거냐?” 뭡니까, 이거... 우리는 이런 내용이 성경에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도 잘 모르는데 정말 이런 사람 만나면 골치 아픕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은 안 받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을까? 얼핏 보면 전혀 설명이 없습니다. 아무 설명도 이유도 없이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다고 하니 참 이해가 안 가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그 결과로 형제를 살인하는 무서운 일까지 생겼으니 이만저만 심각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러분, 오늘 본문은 결코 난해구절이 아닙니다. 그냥 가볍게 읽어보면 본문에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이유가 안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좀더 집중을 해서 깊이 있게 읽어보면 본문에 그 이유가 분명히 설명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앞에 열납되는 제사를 드리는 방법은 무엇인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제물을 드리는가?

첫 번째로 제물이 중요합니다. 어떤 제물을 드리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는 당연히 제일 좋은 것, 최상의 것을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다고 합니다. ‘땅의 소산’이란 곡식이나 과실 등 농산물을 뜻합니다. 가인은 농부였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이 수확한 농산물을 가지고 제물을 삼았던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농사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이 있어서 아벨이 드린 양(유목민)은 가치 있는 제물이고 농산물(농경민)은 가치가 떨어지는 제물로 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받아주지 않으셨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양은 가치 있고 농산물은 가치가 떨어진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가인이 농산물을 드렸다고 해서 그 자체가 제물이 가치로서 떨어지거나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땅의 소산’이라는 표현 속에는 그저 그렇고 그런 제물이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단순히 자신이 농사지은 것들 중에서 아무 것이나 하나를 선택해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최선의 것, 최상의 것이 아닌 그저 그런 것, 아무거나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말이 바로 이 ‘땅의 소산’이라는 표현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난주 신명기 26장에서 본 것처럼 ‘땅의 소산 중에 가장 좋은 것’이라든가 ‘땅의 소산 중 첫 열매’라는 말이 들어있었다면 얘기는 또 달라졌을 것입니다.

반면 아벨은 단순히 양을 드렸다고 되어있지 않고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고 자세히 설명합니다. 곡식의 첫 수확이나 가축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은 구약성경 여러 곳에 강조하고 있는 명령입니다(출 34:19~20). 첫 번째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첫 번째로, 가장 소중한 분으로 여긴다는 뜻이 됩니다. 아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축 중 첫 번째 새끼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가장 첫 번째로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 최우선주의입니다. 또한 아벨은 양의 여러 부위 중에서도 특별히 기름을 골라 드렸습니다. 레위기 3:15~17에 보면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취할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단 위에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식물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 모든 처소에서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고 했습니다. 기름이 제물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고 이 기름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가장 귀한 분으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겼고 그 분께 가장 귀한 제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4에서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아벨이 이렇게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이 자세를 바로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드리는가?

두 번째로, 제물의 종류도 중요하지만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자세와 마음이 중요합니다.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이 말이 참 중요합니다. 그냥 무심코 넘어가기 쉽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받고 가인의 제물은 안 받았다고 되어 있지 않고 분명히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 제물은 안 받으셨다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제물을 바칠 때 제물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신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제물만 그럴듯하게 바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우리들의 자세가 바른 자세여야 하고 우리의 인격이 바른 인격이여야 하고 우리의 중심이 바로 서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신약본문인 로마서 12:1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제사”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본디 헬라어 원문에는 제사라고 되어있지 않고 제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개역개정판 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제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린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우리 자신의 몸을, 우리의 인격을, 우리의 삶 자체를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난주에 단순히 물질만 드리는 것은 봉헌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지요? 물질을 드릴 때 더불어 내 삶을 드려야, 내 인격을 드려야 참된 봉헌이 되는 것처럼, 제사도 단순히 양과 염소를 제물로 드리는 것으로만 그쳐서는 안 되고 내 삶 자체를, 내 인격을, 내 인생과 전부를 제물과 더불어 드릴 때 진정한 제사요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눈에 보이는 예배가 아닌 영적인 예배, 즉 신령한 예배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 삶을 변화시키는 제사인가?

세 번째로, 무엇보다 바른 제사를 드릴 때 나쁜 감정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리기 전에도 둘 사이의 감정이 그리 좋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공동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고 각각 개인적인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한 가족이라면 당연히 함께 제사를 드려야 할 텐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복을 독차지하겠다는 개인주의와 경쟁주의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가인이 제사를 드린 후 오히려 감정이 더 나빠졌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4:6에 보면 가인은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분노를 동생에게 표출합니다. ‘바로 저 녀석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이러한 가인의 태도는 우리에게도 종종 나타납니다. 내 일이 잘 안 될 때 내가 무슨 문제인가 살펴보지 않고 괜히 남 탓하는 것, 남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가인의 성향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가인은 이 미움을 이기지 못해 동생을 살해합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면서도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실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이 감정을 해결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미움이나 섭섭함, 시기 등의 인간적 감정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배드리기 전에는 섭섭하고 미운 마음이 있었다 해도 예배를 드리고 나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은혜를 체험하고 나면 그런 감정들이 다 사라져야 정상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배는 예배, 내 삶은 별개라는 생각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니 예배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거나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서 마음속에 있는 원망이나 분노, 미움의 감정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 만무합니다. 사실 목회자들도 부부싸움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싸움이라는 게 시간을 정해 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서 어떤 때는 예배 직전에 부부싸움을 할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부부싸움을 하고 감정이 상한 가운데 설교를 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심란하고 분노에 가득 차 있는데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설교를 해야 하니 목사가 참 보통 어려운 직업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설교를 하는 설교자 자신이나 또 그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 은혜 받을 리가 만무합니다. 감정의 문제는 그만큼 중요합니다. 분노와 미움과 상한 감정이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있으면 은혜가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이 지방에서 목회를 하는데 어느 토요일 저녁, 권사님 한 분이 이런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 미운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 꼴 보기 싫어서 내일 교회 안 갈랍니다.” 이분은 미움과 증오가 눈앞을 가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안중에 없고 사람만 보인 것입니다. 가인의 이야기가 남 얘기가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도 누가 미워서 교회 안 가본 적은 없다 해도 미움과 나쁜 감정이 앞서 예배에 은혜가 없었다거나 신앙생활에 지장을 받은 경험이 있으시다면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는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주님도 마태복음 5:23~24에서는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참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그 태도가 변해야 합니다. 그 인격이 변해야 합니다. 삶이 변하지 않는 예배는 가인의 제사와 그리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적용 :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제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까? 어떤 예배를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늘 궁금해 합니다. 바로 이런 궁금함에 대한 답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가인의 제사를 왜 하나님이 기쁘게 받지 않으셨을까? 왜 아벨의 제사는 기쁘게 받으셨을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이 사건에 나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 앞에서 외형에만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제물을 좋아하실까? 하나님은 어떤 행동이나 말을 좋아하실까? 어떤 복장이나 자세가 거룩한 것일까? 물론 이런 외적인 요소들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겉모습만 그럴듯한 신앙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하나님 중심주의, 하나님 최우선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제물만 그럴듯하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과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하여 변화된 삶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제사를 드리는 성도를 기뻐하십니다. 그 성도 자신을 받아주시고 그의 제사를 받아주십니다. 그의 예배를 진정으로 기뻐하며 열납하십니다. 그의 삶을 기뻐 받아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예배가 아닐 경우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예배 시간 한 시간(11:10~12:10) 앉아 있음으로, 이 자리에 채워 앉아 있음으로 예배 잘 드렸다고 생각하며 돌아가지만 정작 하나님은 “나는 너의 예배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도 목사이기 이전에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제가 설교하지 않는 때, 전도사님이나 다른 강사들이 설교할 때 가급적이면 이 강단 아래 내려와 예배를 드립니다. 또 가능하다면 맨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립니다. 제가 먼저 참된 예배자가 되지 못하면 저는 여러분에게 예배 잘 드리라고 설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목사이기 이전에, 그 어떤 직분자이기 이전에 우리는 먼저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 중에서도 이렇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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