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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율법사와 사마리아 사람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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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필재 목사

오늘 말씀을 가리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인해 많은 종류의 해석과 설교가 나왔으며, 기독교인의 의무가 주어지고 또는 불필요한 책임 추궁의 논리까지 이 말씀 때문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중심적 교훈이 어떻게 보면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이나 혹은 인도주의의 의무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불쌍한 사람에 대한 자선이나 구제가 중심이 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복음적 교훈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를 우리가 오늘 밝혀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비유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찾아온 곳에서부터 출발을 합니다. 그리고 그 율법사의 질문이 사회적 책임이나 인도주의, 구제활동을 질문한 것이 아니고 영생의 문제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영생의 문제에 대한 답변을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 자체에서 문제가 하나 발생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율법사는 왜 예수님을 찾아왔는가?'입니다. 정말 무엇을 알고 싶어서 혹은 자기가 모르는 부분을 예수님께 질문해서 겸손히 배우려고 찾아왔는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 처음에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려고"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율법사는 유대 사회에서 제일 유식한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율법사 앞에서는 아는 체도 못하고 잘난 체도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식의 우월성을 넘어서 종교적 우월성마저 가지고 사는 그런 부류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율법사 앞에서는 절대 꼼짝 못합니다. 그런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율법의 선생이라서 솔직히 이 사람은 교만에 가득 차 예수를 한번 골탕 먹이고자 찾아온 것입니다. '너는 나사렛 산골에 율법 학교도 못 다닌 무식한 촌놈이 무엇을 안다고 선지자 역할을 한답시고 대중을 모아놓고 잘난 체하고 떠들고 돌아다니느냐? 내가 질문하는 것에 대해 한번 대답해 볼 것이냐?' 망신을 주려고 덤벼든 것입니다. 아는지 모르는지 시험을 하려고 계획적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영생의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자신의 유식한 우월성을 가지고 예수를 망신 줌으로 대중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일 계산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 이 사람은 이 질문을 받을 때 신이 났습니다. 자신의 실력대로 아주 거침없이 대중 앞에서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백점입니다. 예수님도 인정합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그러면 이야기는 거기서 끝내야 합니다. 질문과 대답이 아주 훌륭하게 종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사가 또 잔머리를 굴려서 이상한 질문을 또다시 합니다. 29절에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 오니까?" 이 질문도 이웃을 알고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의를 나타내고자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자기 정당화에 목적을 두고 질문합니다. 이 율법사는 문제아요, 당시 종교인의 고질병 환자에 속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시 종교인들의 그러한 그릇된 신앙관을 깨우치려고 두번째 대답 즉,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한 답변을 예화로 설교하시게 된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첫째 질문인 영생에 대한 이야기는 질문과 대답이 완벽하게 종결되었습니다. 후속적 질문은 이웃설정에 대한 답변인데 "영생을 얻은 자의 이웃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가? 이것이다." 예수님이 설교를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배경 설명이 필요합니다. 본문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그 반대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왔다고 그랬습니다. 예루살렘과 여리고는 거리상 그리 멀지 않습니다. 산 고개 하나만 넘어가면 됩니다. 다만 그 중간의 산이 너무나 험악한 계곡이라서 매우 위험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 주변의 모든 땅이 쓸데없는 불모의 땅인데 비해 먹을 것이 많이 생산되는 기름진 땅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민둥산 계곡을 지나가다가 여리고 지방에 들어가면 푸른 색깔의 곡식이 눈에 띄고 과일가게에 과일이 얼마든지 쌓여있고, 바나나 나무가 즐비하게 서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 정복을 시도할 때 바로 이 곳에 와서 여리고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사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여리고 보다 더 좋은 길목이 얼마든지 있고, 그곳으로 가면 지키는 사람도 없이 쉽게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왜 하필 여리고로 찾아왔는가? 거기네 먹을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성을 빼앗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부족들이 전쟁을 해서 여리고 성이라고 하는 성토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입니다. 거기를 점령해야 먹을 것이 있기 때문에, 여리고 사람들은 그들이 농사지은 농산물을 나귀에 싣고 예루살렘으로 팔러 갑니다. 그러면 팔았으니까 돈이 있잖아요? 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서 산 계곡을 넘어 여리고로 갑니다. 강도들이 그것을 압니다. 인적이 없는 산 계곡을 돈을 가지고 지나가니까 강도들은 그 계곡에 숨어 있다가 무차별 공격을 가하고 돈을 빼앗아 가는 일이 빈번하게 있는 그런 장소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런 일이 많이 있었고 예수님도 이미 알고 있는, 자주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 문화를 아시는 대로 지금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나타난 이 강도들도 성경에 보니까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반 죽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등장하는 몇 종류의 사람들을 보면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이 나올 수 있도록 예수님이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다른 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율법사에게 이웃을 가르쳐주기 위한 말씀으로 이해하여야 정확합니다.

인간은 세상에서 이것과 평생을 관계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이웃과 물질이 됩니다. 오늘 비유 설교에는 이 세 가지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세 사람의 종류가 나오는데, 하나는 강도에 대한 평가를 우리가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의 삶의 철학에 있어서 물질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도 이웃도 무시하는 삶의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물질의 관계만이 중요시되는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자기 앞에 닥칠 때는 하나님도 이웃도 무시합니다. 물질만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대는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한 시대이다." 그 말의 뜻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인간이 몰아내고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가 사이버 공간에서 수없이 느끼는 것이 있는데, 야스퍼스의 말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하나님 자리에 인간이 앉았다고 했지만 앞으로는 기계들이 인간을 몰아내고 인간 자리에 앉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컴퓨터가 하라는 대로 해야 됩니다. 컴퓨터가 말을 안 들으면 세계가 다 어지러워집니다. 인간이 기계 앞에서 순종해야 되는 그런 시대로 점점 변해간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강도는 하나님이 없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웃은 죽여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물질은 제일 고귀한 것이니까 취해야 합니다. 처음에 이 율법사는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대답에서 하나님과 이웃이 나타났습니다. 영생을 얻은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고귀한 인간 대우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강도라는 사회적 문제아가 바로 영생과 관계되는, 하나님과 이웃을 완전히 무시한 행동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취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고유 권한인데, 이 강도는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질의 귀신이 그의 영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이 강도를 만난 현장을 제사장과 레위인만 그 옆을 지나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제사장과 레위인 같은 종교적 전문가를 이 예화에 등장시켜 말씀하셨는가? 질문한 율법사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질문의 목적이 진정한 이웃을 발견하려는데 있지 않고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당시의 종교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지금 예수님 앞에 와서 앉아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대상으로 믿으나 이웃을 잃어버린 상태의 종교가 된 것입니다. 사람이 이웃을 도와주는 것도 자신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할 수도 있고 어떤 때는 할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은 무조건 도와주어야 한다는 그 자체가 더 무서운 율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데에 초점을 두신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한 관심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쓰러진 이 강도 피해자를 돌보지 않고 그냥 지나간 것은 그들만의 이유가 있습니다. 율법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구약 시대 율법은 피는 절대 만지지 못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또 죽은 시체를 만지는 것은 절대 부정입니다.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레위인이요, 제사장입니다. 그 율법 즉, 하나님 말씀에 충실하기 위해서 그냥 지나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율법사를 놓고 그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너도 그냥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면 그 율법은 잘된 율법이며 그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들이냐? 혹시 너희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율법의 근본정신을 잃어버린 율법주의자가 된 것이 아니냐?" 이렇게 지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희랍 신화 가운데 우리는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죠? 나르키소스는 미남으로 아주 잘 생겼습니다. 자기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어느 날 연못에 비친 자기 얼굴에 너무나 도취되어서 '어쩌면 내가 저렇게 아름답게 생겼을까?' 마침내 그 자리에서 침식을 잃고 죽어 그 연못의 한 종의 수선화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종교인들이 간혹 이렇게 자기도취에 빠져서 세상을 부정으로 피하고 이웃을 멸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 가운데도 많습니다. 어느 날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기도를 합니다. 자신이 잘하고 있는 종교적 의무에 충실해서 행복에 도취된 말로 기도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더 심각한 그의 기도는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지금 이 율법사는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인정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께 두번째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세리를 이웃에서 떼어 내버리는 행위를 하는 기도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때 그의 기도를 의롭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얼굴을 들지 못하고 나는 죄인이라고 기도하고 간 세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율법사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사장과 레위인 같은 전문 종교인을 이 예화에 등장시키신 것입니다. "너 같이 영생의 문제를 잘 아는 사람이 가져야 할 이웃에 대한 율법은 무시하고 내버리는 행위가 하나님의 뜻이냐?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웃을 인격 대우해야 할 사람이 바로 너 같은 사람이 아니냐? 너는 지금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나 예수를 한번 보기 좋게 망신 주고 너의 그 유식한 율법의 힘을 한번 과시해 보려는 흉악한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의 종교는 그래서 이미 병들었고 썩어 냄새나는 질이 나쁜 율법주의에 빠졌도다. 나는 복음을 주노니 들으라." 그리고 나서 이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도 관심을 가질 일은 왜 예수님이 이 예화에 사마리아 사람을 선하게 조명하셨는가 입니다. 그러면 그 시대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다 그 사람과 같이 정말 훌륭한 시민이요, 종교인이었는가? 그건 아닙니다. 또, 유대인은 모조리 다 나쁜 사람인가? 그것도 아니잖아요? 왜 사마리아 사람을 여기에 등장시켰는가? 지금 예수님 앞에서 끝까지 덤벼들고 있는 이 율법사의 마음속에 사마리아 사람은 절대 이웃이 아니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물 길러온 여인에게 예수님이 물 좀 달라 하셨을 때 사마리아 여인은 깜짝 놀라면서 대답합니다. "당신은 유대인 남자로서 어찌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 합니까?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일러라." 그런 말씀이 요한복음에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율법사는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그러한 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예화에 사마리아 사람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것까지는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만, 지금 강도를 만나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은 유대인입니다. 만약 반대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를 만나 죽어가고 있을 때 유대인이 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절대로 돌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이 강도 만난 사람은 그 상태가 거반 죽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다. 만약 의식이 있었다면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 거부합니다. 아마 큰 소리를 쳤을 것입니다. "비켜라! 내가 죽으면 죽었지, 너 같은 인간에게 도움을 받기 싫다!" 그것이 유대인의 생각이요, 레위인과 제사장의 생각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예화에 그들을 다 등장시킨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인간 관계성의 사랑문제는 우월감과 열등감의 벽이 깨어지기 전에는 진정한 이웃 관계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도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상대가 유대인인데 내가 도와주면 괜찮을까? 도와주고 오히려 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나?' 그러나 그는 그 현장에서 사마리아인이라고 하는 자신의 열등감을 초월합니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오늘 말씀의 뜻은 불쌍하게 된 사람을 도와주었다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영생의 문제를 질문한 율법사가 하나님 말씀의 비중 첫번째와 두번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인데, 문제의 갈등은 이웃이 누군가입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누가 이웃이냐? 이웃을 가르쳐 주시려는데 복음의 성격이 들어있는 초점의 말씀이 됩니다.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은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인데 문제는 이웃이라는 관계 설정이 분명해져야만 그를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 사람 사이에 큰 장벽이 가로막혀 있는데, 어떤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겠는가? 예수님의 초점은 분명합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우월감도 없애버리고 사마리아인의 열등감도 없애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웃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랑은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가장 중요한 암시가 이 예화 속에 들어있습니다. 여기서 조명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마 자기 자신을 조명하셨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고 거반 죽게 된 사람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택함을 받은 유대 백성에 속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선택해서 온 세상에 구원의 빛을 전하여 주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 앞에서 예수를 시험하고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하는 이 율법사와 같이 야훼 종교는 그 생명을 잃어버리고 거반 죽게 되어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죽게 된 종교를 생명의 종교로 회복시켜야 되는 사람들이 유대 사회에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제사장이요 레위인들입니다. 만약 그들이 자기희생을 지불하고 나선다면 하나님의 근본 목적이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비추게 하려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오직 피해 지나가는 것만이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하는 병든 신학의 주인공들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죽게 된 환자를 살리려고 복음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도다."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들을 도와주는 일은 율법상 금지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을 초월해서 복음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이 말씀의 중심입니다.

오늘 말씀의 소재 지역이 예루살렘과 여리고입니다.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교의 본거지를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예루살렘의 반응이 성경에 예수님 자신의 말씀으로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에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를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를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를 모으려 한 적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사실상 유대교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독점함으로 온 세상을 이웃으로 만들라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나머지 썩어진 종교로 거반 죽게 된, 생명을 잃어버린 그런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회복시켜야 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관심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불씨가 나타남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새롭게 살아나 온 세상을 복음으로 정복해 나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배척하는 종교, 율법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자가 하는 일이 자기를 옳게 보이기 위해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율법 지식으로 예수를 시험하여 자신의 우월감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사는 거반 죽게 된 종교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믿는 거룩한 공동체도 신학이 잘못되면 썩은 종교가 됩니다. 지금 온 세상은 과격 이슬람 단체에 테러 비상을 겪고 있습니다. 가장 슬퍼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이슬람의 지도자들입니다. "우리 이슬람은 본래의 교리가 그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단 이슬람의 과격 지도자들이 저렇게 온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잖아요? 진장한 이슬람의 지도자들은 지금 슬퍼하고 있단 말입니다. '어째서 이슬람의 교리를 가지고 이렇게 세상을 망가뜨리고 있느냐?' 과거에 우리 기독교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십자군 전쟁"같은 것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기독교가 세상을 망친 그런 일도 있지 않습니까? "가서 너도 이같이 하라! 그러면 영생을 얻으리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진정한 이웃이며 그가 베푸는 사랑을 영접할 때 하나님의 영생과 생명의 종교는 살아나는 것입니다. "거반 죽게 되었지만 살아날 것이다. 만약 부비가 더 들면 내가 책임을 지겠다. 살려주시오." 오늘 우리는 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어 이웃을 찾아갈 때 거기서 생명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는 내 곁에 더 다가오게 하는 것을 더 한층 업그레이드해서 내가 찾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웃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찾아갈 수 있는 그런 역사를 우리가 살아갈 때 오늘 이 종교는 생명을 살리는 종교가 될 것이다. 이것이 뭐냐? 복음이다. 너는 유대인의 선생이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전공한 사람이 어찌 너 자신 하나만을 그렇게 공명심이 강해서 옳게 보이려고 나를 시험하는데 목적을 두고 나를 이렇게 찾아왔느냐? 가서 너도 이같이 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시고 그 복음을 들고 이웃을 찾아가시면 피차 함께 살 수 있는 생명의 구원 역사를 우리가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몸을 담고 있는 교회 공동체가 그렇게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유대 종교는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살려낼 사람이 그냥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관심하지 아니한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살려내는데 온갖 정성을 기울인 예수님이 해주신 예화 설교가 무슨 뜻인가? 우리는 이웃을 찾아가며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관심가지며 그의 영생을 얻기 위한 노력에 아까워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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