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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의 축복 (창 49: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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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피영민 목사

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24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25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6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27 베냐민은 물어 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28 이들은 이스라엘의 십 이 지파라 이와 같이 그 아비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가정에서 아버지의 위치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녀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참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에도 ‘하나님 어머니’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버지는 어머니와는 달리 가정에서 특유의 권세와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유감스러운 것은 수많은 자녀들이 장성해가면서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시간이 지나면 자녀는 아버지를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닮고 싶은 아버지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 49장은 147세 된 노인 야곱이 열두 아들에게 예언적인 축복의 말씀을 나누는 장면입니다. 1절에는 “야곱이 그 아들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는 모이라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고 쓰여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야곱은 단순히 열두 아들을 놓고 ‘내가 너희가 이렇게 되기를 소원한다.’는 개인적인 소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을 통해 예언적인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이 아들들에게 한 축복 속에는 책망과 심지어는 저주의 내용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제일 고귀한 축복을 받은 아들은 네 번째 아들 유다입니다. 유다에 대한 축복을 살펴보면, 8절에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또 10절에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라고 나와 있습니다. 실로는 누구입니까? 실로는 ‘화평을 가져오는 자, 화평케 하는 자’ 라는 뜻입니다. 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유다지파에서 홀이 떠나지 아니할 것이고, 치리자의 지팡이가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윗도 유다지파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도 유다지파에서 나온 유다지파의 사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가장 고귀한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축복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으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은 단연코 요셉일 것입니다. 창세기 49장은 요셉에 관해서만 다섯 절(22-26)을 할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에 관한 축복의 말씀에 보면 복, 혹은 축복이라 하는 단어가 7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야곱이 열두 아들을 축복한 본문을 통해서 부모 된 우리가 자녀를 축복하는 4가지 원리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자녀에게 하나님의 관점으로 인생을 보는 눈을 길러 주어야 한다.

우리가 자녀들을 축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인생을 볼 수 있는 그런 시각을 길러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인생은 인간의 관점에서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관점에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요셉에 대해서 두 가지 비유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22절에서입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이것은 요셉의 현재의 축복된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현재의 삶은 마치 샘 곁의 무성한 가지요, 담을 넘은 가지와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연말연시에 샘 곁의 가지요 담을 넘은 가지처럼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런데 요셉이 지금 현재의 축복을 누리는 것은 거저된 것이 아닙니다. 요셉이 어려운 시련을 다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야곱의 두 번째 비유에 나타나 있습니다. 23절에는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활 쏘는 자들이 그를 향하여 계속 활을 쏘아대는 인생이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고 활 쏘는 자가 되어 구덩이에 가두고 노예로 팔아먹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유혹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요셉을 모함했습니다. 보디발은 재판도 없이 요셉을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보디발 부부는 활 쏘는 자가 되어 요셉을 군박했던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통해 그의 꿈을 해석 받는 놀라운 은혜를 받고서도 감옥에서 나간 뒤에 요셉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결국 그도 요셉의 활 쏘는 자의 역할을 감당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자신을 향해 활 쏘는 자가 많은 인생이었지만 요셉은 지지 않았습니다. 24절을 보니까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요셉도 그들을 향해 활을 쐈는데 요셉의 활이 더 강했다는 말입니다. 왜 강하게 되었을까요? 본문은 “야곱의 전능자의 팔을 힙입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어린 소년입니다. 어린 소년이 활을 당기는데 힘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활을 당기는데 그만 끝까지 당겨지지 않습니다. 끝까지 당겨서 숨을 죽이고 놓아야 과녁에 들어가는 것인데 당겨보니 힘이 모자라서 당겨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 뒤에서 요셉의 팔을 붙들어주고 있습니까? 전능자 하나님,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이요 목자 되신 그 분이 뒤에서 요셉의 팔을 붙들어서 활을 끝까지 당겨주시고 정확하게 과녁에 놓게 하셔서 요셉의 활이 더 견강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지금 현재 많은 축복을 누리고 있지만 그 축복은 우연히 온 것도 아니고 도박해서 딴 것도 아니고 요행스럽게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그의 인생 가운데 많은 시련을 거치게 되었지만 그 시련을 자기의 능력이 아닌 전능자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극복함으로 말미암아 현재의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요셉의 인생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려다보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요셉 자신도 자기 인생을 이야기할 때에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려다보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 45장 7-8절에 요셉의 시각이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요셉은 자기 인생을 밑에 놓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 가지 어려운 시련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처럼 위로 올라가서 내려다보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어려움은 잠깐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요셉을 축복한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인생을 보게 하려면 세 가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성공적인 인생이 되기보다는 열매 맺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성공하라는 이야기 할 것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열매 맺는 인생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매 맺는 인생이 될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공적’이라 하는 말은 인본주의적인 관점입니다. 밑에서 위로 올려다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는다는 단어는 위에서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유명한 도산 안창호 선생은 ‘돌배 나무에 돌배 열리고 참배 나무에 참배 열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돌배보고 참배를 열어야 성공하는 것이니까 너는 오늘부터 참배를
열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돌배나무는 돌배가 풍성히 열리면 되는 것입니다. 돌배는 사람이 못 먹으면 날아가는 새라도 먹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돌배의 사명입니다.

노래 잘하는 사람보고 공부해서 고시에 합격하라고 한다면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보고 건축가가 되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조용히 앉아서 공부하는 사람보고 너는 대통령이 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 각자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은사대로 살면서 열매를 풍성히 맺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주신 은사대로 열매 맺으면 되는 것이고 우리의 자녀들도 열매 맺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돈 많이 벌고, 인기를 얻고 유명해지고, 높아지는 것을 강요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은 첫째로 성공적인 것 보다는 열매 맺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하고 우리 자녀들도 그렇게 가르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시련이 올 때에 그것을 겪는 사람은 괴롭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그것은 훈련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요셉이 많은 시련을 겪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련을 통해서 사람은 더 성숙하게 되는 것이고 큰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시련을 겪은 목사들은 같은 메시지를 전해도 파워가 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시련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겪을 때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면 좌절하고 실망하고 낙망하겠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려다보면 그것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성숙시키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도 “너는 예수 믿으면 인생에 아무 시련이 없을 것이다.” 하는 것을 가르치지 말고 예수 믿어도 시련이 오지만 시련은 요셉처럼 능히 잘 감당해야 할 것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시련을 이기는 능력은 인간 내부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시련을 이기는 능력은 어린 요셉의 팔을 잡아주시는 전능자 하나님의 능력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능력을 의지하고, 내 힘을 의지하고, 내 지혜 의지하고 내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 없어도 인생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벌써 싸움에서 진 사람입니다. 그런 생각은 패배한 인생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내가 부족하니 내 팔을 붙들어 주시고 내게 힘이 되어 주시고 나의 돕는 자가 되어 주옵소서!” 하는 기도를 올리고 우리 자녀들도 그렇게 되도록 가르쳐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이 지금 요셉을 축복하면서 두 가지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에도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림을 새가 내려다보는 것 같다고 해서 조감도(鳥瞰圖)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을 볼 때에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내려다보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사업에 망하고 빚더미에 올라앉고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굶어서 죽기를 기다리느니 금식기도나 하자 해서 일주일을 금식을 하는데 7일째 되니까 자기 모습이 저 밑으로 보이더니 마음의 평안이 오고 “이것은 잠시 있는 시련이니라.” 하는 하나님의 그 음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시련을 이겨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시각에서 인생을 내려다보고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과 현실적으로 동행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는 우리가 자녀를 축복하려면 현실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말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말로만 하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이들은 우리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봅니다. 야곱은 흠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온전한 아버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생애 중에 두드러진 것은 위기 중에 언제나 하나님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야곱의 12아들은 ‘우리 아버지는 참 사기꾼이고 우리 아버지는 거짓말도 잘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틀림없다. 우리 아버지의 인생에는 하나님이 함께 있었다.’고 하는 것을 자녀들이 본 것입니다. 그것이 이 야곱의 힘이 되었고 자녀들을 축복할 수 있는 강력한 권위가 된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말은 종교적으로 하지만 삶이 전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누가 제일 먼저 알아차리겠습니까? 자녀들이 제일 먼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그렇고 그런 분이야, 우리 아버지는 참 교회에서 높은 직분을 받았지만 사실은 그렇고 그런 분이야” 이렇게 여기게 되면 아버지의 권위가 서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이를 독촉합니다. “야! 빨리 일어나라 주일학교에 늦겠다. 빨리 일어나서 성경 배우러 가야지, 5분 뒤에 버스가 온다.” 그러니까 아이가 묻습니다. “아빠 아빠도 어려서 주일학교 열심히 다녔어?” 그러니까 아빠가 자랑스럽게 “암, 그렇구 말고!!” 그러자 아들이 다시 말합니다. “아빠 그러면 주일학교 공부도 별 소용이 없는 것 같네? 주일학교 열심히 다녀서 아빠처럼 되면 나는 안다니는 것이 나을 것 같어.”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 집안에서는 아버지의 권위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얘들아, 내가 죽기 전에 너희를 축복하겠다. 집합해라.”고 한다면 자녀들이 그 아버지의 권위 앞에 순종함으로 모일 수 있겠습니까?야곱은 하나님을 뭐라고 이름을 붙입니까? 24절에 “야곱의 전능자라”(The the mighty one of Jacob) 야곱은 하나님을 자기의 전능자라고 불렀습니다. 24절 후반에는 이스라엘의 반석(The rock of Israel)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은 얍복강에서 바뀐 야곱의 이름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5절에는 “네 아비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또 25절 중간에 나오는 전능자라는 단어는 ‘엘 샤다이’라고 하는 히브리어입니다. ‘샤드’라고 하는 말에서 나왔는데 ‘샤드’는 넓은 가슴이라는 뜻도 있고 요동치 않는 산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전능자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껏 그 가슴에 뛰어들어도 받아주시는 분이시요, 우리가 마음껏 의지해도 넘어지지 아니하고 요동치지 아니하는 큰 산과 같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야곱은 하나님을 부르되 매우 친숙한 존재로 부르고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며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버지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고 한다면 자녀교육은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을 자녀들이게 보이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자녀의 장점과 단점을 잘 파악해야 한다.

세 번째로 아버지가 자녀를 축복하려면 자녀의 장점과 단점을 잘 알아야 합니다. 어떤 군인인 아버지가 자식이 말을 듣지 않으니까 너 죽고 나죽자 해서 총알을 권총에 장전하고 산으로 끌고 갔습니다. 힘이 들었던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 좀 쉬었다 가요.” 그러자 “그래 좋다 네가 아직 죽을 때가 안 되었으니 쉬었다가 가자”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니까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 참 좋습니다. 내가 평생 살면서 아빠와 등산해 본 것은 처음입니다. 너무 좋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언제 한번 같이 등산해본 적도 없고 불러다가 어려운 문제가 있는가 없는가 물어본 적도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을 하던 그 아버지는 자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자식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죽이려던 총을 다시 집어넣고 아들에게 잘못을 고백했다고 합니다.

자녀를 길러도 자녀가 무엇을 고민하는지 자녀가 지금 무엇 때문에 요사이 성적이 떨어지는지 잘은 모릅니다. 우리는 자녀가 많아도 각각 개성이 다르고 특징이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한 원리와 기준으로 “네 형은 이렇게 했으니, 너도 이렇게 해라.”하고 적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각각의 장점은 키우고 단점은 꾸짖고 해서 바르게 교육시켜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야곱은 지금 르우벤을 축복할 때 그 두 가지를 얼마나 잘 조화하고 있습니까? 3절을 보시길 바랍니다.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 르우벤이 자기 서모인 빌하와 통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르우벤을 축복하되 축복하면서도 잘못을 꾸짖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교육에는 채찍도 필요하지만 더러는 당근도 필요한 것입니다.

네 번째로 야곱은 요셉을 축복하되 현세의 일시적인 축복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축복을 더 앞세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기를 때에 “돈 잘 벌어라 높아져야 위대해져라” 하고 말하지 “기도하는 사람 되어라 믿음의 사람, 신앙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라” 하는 이야기 잘 하지 않습니다. 교회 나와도 “아 저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다, 믿음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사람이다”라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여기 요셉이 받은 복은 세 가지입니다.
25절에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첫째복은 위로 하늘의 복입니다. 하늘의 태양이 잘 비취고 비가 잘 내리는 것이 하늘의 복입니다.
두 번째는 아래로 원천의 복입니다. 원천은 강과 샘의 축복입니다. 땅이 물을 잘 내는 축복입니다.
세 번째로는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입니다. 젖먹이는 복은 자녀를 낳는 자녀의 풍성함의 복이고 태의 복은 육축의 복입니다. 언뜻 보면 이것이 현세의 축복인 것 같지만 26절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네 아비의 축복이 네 부여조의 축복보다 더 낳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영원한 산의 한없음 같다(the eternity of the ancient mountains)는 것은 옛날부터 있는 큰 산들의 영원성의 축복이 너에게 임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영원한 축복, 하나님의 언약적인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기를 때에 현세의 축복만을 강조하지 말고 신앙의 사람 되기를 강조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결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어른들의 언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자녀들에게 신비한 예언적인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 보고 “축복된 자녀라, 좋은 아들이라, 앞으로 잘 될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자꾸 해줘야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너무 부정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배불러 죽겠네, 행복해 죽겠네” 배부른데 왜 죽습니까? 오늘 우리는 부정적인 언어를 고쳐야겠습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목사님은 스펄젼 목사님입니다. 이분이 어렸을 때에 부흥사 한 분이 집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어린 스펄젼을 무릎에 앉혀놓고 기도하면서 “너는 앞으로 목사가 될 것이고 너는 큰 회중
앞에서 설교하게 될 것이다”라는 예언의 말씀을 했다고 합니다. 어린 스펄젼은 그것을 마음에 담았습니다. 그래서 후에 7,000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Metropolitan Tabernacle)을 짓고 설교할 때에 스펄젼은 “내가 어렸을 때에 닐 목사님의 그 말씀은 내 마음속에 그대로 살아있게 되었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위대한 목사가 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에 인천 화평동에 살았던 제가 어느날 밖에서 구슬치기도 하고 딱지치기도 하고 놀고 있었는데 우리 어머니가 가만히 보더니 “우리 아들 얼마나 잘생겼냐!” 하고 지나가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제가 그것을 들었는지 안들었는지 모르실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그때 그 말을 마음속에 담았습니다. 지금도 저는 거울을 볼 때마다 설교 영상을 볼 때마다 실망이 많이 됩니다. 그러나 그래도 어렸을 때 “우리 아들 얼마나 잘생겼냐!”하는 어머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즉시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자녀들에게 한마디 하는 것은 예언적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도 완전하지 않고 우리 자녀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 생애 중에는 어려운 시련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족해도 매일매일 하나님과 동행하면 우리의 자녀들도 축복받고 우리도 복을 받고 우리의 삶이 샘 곁에 가지가 되어 담을 넘겨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요셉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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