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전도자의 영적준비 (겔 3:1-11)

  • 잡초 잡초
  • 328
  • 0

첨부 1


- 설교 : 이영무 목사

  우리 사회의 최대 위기는 살림의 문화보다 죽임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는 자살하는 사람들의 증가입니다. 우리 사회에 이런 이들이 점점 늘어가는 것은 큰 영적인 위기입니다. 48분마다 한 사람씩, 결국 하루에 30명씩 자살하는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최고가 되었습니다. 예전엔 스위스나 노르웨이가 자살률이 높았는데 요즘은 우리가 그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예전엔 생활고로 인해서 또는 퇴직에 따른 상실감, 가정의 갈등으로 인해 자살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요즘은 우울증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 전, 이은주라는 영화배우가 자살한 이후로 ‘이은주 효과’로 자살자들이 엄청 늘어났다고 합니다.  이은주가 죽은 방식을 따라 죽는 경우가 많다는데 보기에 그렇게 멋있어 보였나 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를 죽임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정확한 통계는 나오지 않았지만 낙태로 인해서 세상의 빛을 보기 전에 엄마의 태 속에서 살해당하는 아이들이 연간 수십 만명에 이르고 있다고 하니, 이것도  바로 우리 사회의 죽임의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면으로 보면, 가출 청소년 4명중의 한명은 초등학생이랍니다. 예전엔 중학교나 고등학교는 가야 가출한다고 했지만 이제는 초등학생 아이들도 밤이면 집에서 자는지, 안 자는지 잘 살펴봐야 할 때가 되었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집 안과 밖을 들락거리면서 성장하는 아이들이 과연 어떤 가치관, 인간관을 갖게 될 것인지 심각하게 묻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죽임의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의 영적인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살리는 곳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을 살림의 문화로 바꾸어 가야 합니다. 물론 육체적으로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수많은 영혼을 살려내는 일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영혼을 구조하는 일입니다. 세상 풍랑 속에서 지금 배가 전복되고 파산되어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이 있는데, 구원의 보트에서 구명줄을 내려 그들을 건져내는 것, 곧 그들의 영혼을 건져내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즉, 살림의 문화를 만들어 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무엇입니까? 벤치위의 교인들이 증가하는 것입니다.

  2002년 월드컵을 기억하십니까? 4강까지 올랐고, 온 국민이 열광했던 때라 잘 기억하실 듯 싶습니다. 그라운드에서는 열한명의 선수가 뛰지만, 전체 대표 선수는 스물세명입니다. 열한명을 제외한 다른 선수는 벤치를 지키는 후보 선수입니다.
  주전선수는 많이 뛰는 만큼 여기저기 다치기도 하고 힘듭니다. 어떤 선수는 코를 다쳐서 안면보호대까지 쓰고 나와 열심히 뛰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후보 선수들은 무료하게 시간을 보냅니다. 카메라가 이따금 비출 때 보면 하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언제 끝나나하고 지켜보는 모습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가 4강에 진출해서 많은 포상금을 받게 되었는데 그 때 어느 선까지 포상금을 받느냐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었습니다. 주전 선수들만 받았을까요? 후보선수들도 받았을까요? 포상금은 후보들도 다 받습니다. 어찌보면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어라하고 뛰었는데 벤치에 앉았던 사람들도 똑같이 받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들이 선수라면 어떤 것을 원하시겠습니까?
  시원한 벤치에서 구경이나 하면서 포상금이나 받을까, 아니면 나가서 뛸까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선수라면 누구나 다 뛰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뛰는 것이 가문의 영광아니겠습니까? 후보 선수들은 30초라도, 1분이라도 뛰는 것이 소원이랍니다.

  우리에게 적용 해 본다면, 우리는 복음의 월드컵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경기장에서 뛰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앞에서 열심히 뛰는 주전멤버들이 있는가 하면, 그늘 밑에 앉아서 무료하게 하품만 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이라곤 예배드리러 왔다가 가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봉사하기를 꺼려하는 분들은 어찌 보면 벤치위에 앉아있는 후보 선수들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전 멤버가 되겠습니까? 후보 선수가 되겠습니까?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월드컵을 보고 계실 때 어떤 선수들을 더 원하시고 축복하시겠습니까? 온 성도들은 복음의 전사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성가대나 교사를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살아가는 삶의 영역 속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의 전사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의 경기장에서 열심히 뛰는 것!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오늘날 교인들에게 전도하라고 하면 많은 분들은 이렇게 되묻곤 합니다. “좀더 고상한 방법이 없습니까? 우아한 방법이 없습니까? 꼭 전도지를 갖고 나가서 전도하는 방법 말고는 없습니까?”하고 말입니다.
  요즘 다른 큰 교회들에서는 ‘맞춤 전도’라고 해서 연령, 직업에 따라 전도 대상자를 선정하고 30대 여성이면 그녀들에게 맞는 노래, 음악, 말씀, 게스트까지, 또한 40대 남성이면 그들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기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합니다. 왜입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너무나 중요하기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영혼을 구하는 일은 전도밖에 없습니다. 복음 전도! 내가 사람을 만나서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교인들의 90프로 이상은 이 1:1 개인 전도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전도에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 하신다”고 했습니다. 미련해 보이지만, 세상의 방법과 좀 뒤쳐진 것 같아 보이지만, 오늘도 전도라는 방법을 통해서 한 영혼 영혼을 구원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도하라고 하면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부끄러움입니다. 바쁜 세상에 전도지나 들고 다니고, 남들을 귀찮게 하는 것 같고, 받아도 잘 보지도 않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끄러움은 2000년 전, 사도 바울부터 경험한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000년 전에도 사도들 중에는 부끄러워하는 자들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전도하라고 하면 뒤로 숨는 자들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나 오늘이나 같습니다. 오히려 그때는 복음을 전하면 매를 맞고 옥에 갖히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렇게 때리고 옥에 가두는 사람이 없다는 점만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끄러워서 그 일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가 봅시다. 본문 에스겔 3장의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있었던 상황입니다. 그 가운데 에스겔이란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도 자기 동족과 함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어느 날,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내용은 나를 대신해서 이 백성에게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선뜻 나서서 “예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나설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에스겔이 주저하는 것 같습니다. 몹시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왜 인줄 아십니까? 그 당시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때는 1년 안에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 사람들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몇 년 지났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이럴 수 있는가 하고 그들의 마음속엔 분노와 불만이 가득 차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가서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을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쉽게 동조하지 않을뿐더러  마음을 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선지자나 예언자는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이사야도 핍박 받았습니다. 엘리야도 핍박 받았고 숨어 다녔습니다. 오죽했으면 낙심해서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원했겠습니까? 예레미야서에 보면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실 때 예레미야 1장 6절에서 밝히듯이 그는, 하나님! 내가 슬픕니다. 주 여호와여 보십시오. 내가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합니다. 나는 입이 우둔해서 선지자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뭐 그런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예언자의 활동이 두렵고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에스겔은 순종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그냥 보내시지 않습니다. 이 강퍅한 백성에게 보내는데 그냥 보내서는 안되는 것을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를 무장시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에스겔의 모습이 바로, 전도자의 모습입니다.
 
  에스겔이 가서 말씀을 전할 때 “잘 오셨습니다! 할렐루야!”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두 분노하고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그를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전도자가 나가서 십자가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할 때 사람들이 반가워합니까? 우리한테나 기쁜 소식이지 그들에게는 분노의 소식 아니겠습니까? 사람들한테 죄인이라고 하지 않나, 회개해야 한다고 하지 않나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겔은 가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과연 오늘, 전도자는 어떤 영적인 준비를 갖추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할까요?

  먼저, 전도자는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 1절, 2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아멘!
  옛날 성경은 두루마리입니다. 에스겔이 환상 속에 보니 하나님이 두루마리 성경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는 환상 속에서 그것을 먹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고 와서 이 말씀을 백성에게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원리로 적용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전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전도하면서 자신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담대하게 나가서 영적으로 준비를 갖추고 복음을 전할 수 있으며, 담대한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말씀을 잘 먹을 때 건강한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경험하게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밥을 참 잘 먹습니다. 자다가 일어나도 밥 한그릇이 뚝딱입니다. 그리곤 “또 없어요?”하고 묻기도 합니다. 이런 아이들은 쑥쑥 잘 크고 건강합니다. 그러나 어떤 아아는 젓가락으로 밥 먹는 모양이 시원치 않습니다. 게다가 짜니, 싱겁니 하고 반찬 투정을 하기 일쑤입니다. 얼마 안 먹고서는 숟가락 놓고 가버립니다. 그런 아이는 뭔가 부실하고 잘 크지 못합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잘 먹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목사의 설교를 듣는 것은 말씀의 식탁 앞에 초대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는데 “아멘! 아멘”하고 잘 먹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꼭 따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설교가 왜 이리 기냐, 짧으냐, 왜 신문에서 본 얘기를 하느냐, 뉴스 얘기를 하냐, 왜 드라마 얘기를 하느냐, 너무 딱딱하다등등 별별 이유가 많습니다.
  어떤 교인들은 보리밥이든 식은 밥이든 쌀밥이든 냉큼 냉큼 잘 집어 먹습니다. 그런 교인들이 비교적 건강합니다. 말씀을 잘 먹을 때 좋은 전도자가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잘 먹어야 잘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엄마가 아이를 낳고 난 후 모유 때문에 고생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저도 큰 아이를 낳았을 때, 젖이 잘 돌지 않아서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신학생이었는데 남들에게 돼지족을 삶아 국물을 먹으면 좋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경동시장에 가서 돼지족을 사다가 핏물을 빼고, 푹 삶아서 파를 넣고 깨소금을 넣어 만들어 주었는데 고맙게도 아내가 잘 먹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젖이 잘 돌아 큰 아이를 잘 먹였습니다. 그런데 둘째를 낳았을 때는 장모님이 오셔서 뒷바라지를 해 주셨는데 돼지족을 안해주신 모양입니다. 저도 돼지족을 못해주었습니다. 젖이 충분치 않아서인지 둘째 아이는 첫째보다 좀 키가 작습니다. 볼 때마다 그 때 돼지족을 사다 먹였어야 했던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잘 먹어야 젖이 잘 나와서 아이를 잘 키우듯이 전도자도 똑같습니다. 전도자가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설교를 잘 듣고, 새벽에 나와 성경통독도 하고, 말씀을 읽고 연구하는 분들이 전도하라고 하면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엔 하나님의 말씀이 꼭 필요합니다.

  동물의 세계엔 생존경쟁이 있습니다. 내가 다른 동물을 먹지 않으면 먹히고 맙니다. 그래서 늘 경계를 합니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 먹지 않으면 우리는 마귀에게 먹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뭐가 뭔지 모르고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오늘도 마귀들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우리는 마귀에게 먹히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이라 불리는 존 워너 메이커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매우 가난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학력은 초등학교 2학년 밖에 안 되었지만 그는 미국의 ‘백화점 왕’이 되고, 나중에 체신부 장관까지 지냈습니다. 대통령이 체신부 장관을 임명하려 할  때에 “저는 주일은 교회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쳐야 되기 때문에 주일은 출근할 수 없습니다. 저를 불러 내지 마십시오.”라는 조건을 달았고, 그 조건의 수락 하에 장관으로 취임할 정도로 신앙이 독실했습니다.
  그가 60세 생일을 맞이 했을 때 기자가 와서 “당신의 생애 속에 가장 위대한 투자를 꼽으라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제가 10살 때 성경이 너무너무 가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벽돌을 나르고 몇 센트씩 받아서 저축을 했습니다. 돈이 모여 처음으로 성경을 샀는데,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의 가장 위대한 투자였습니다. 난 그 때부터 성경을 열심히 읽었고, 성경이 내 인생의 질이었습니다. 난 초등학교 2학년밖에 못나왔지만 체신부 장관이 되고, 세계적인 ‘백화점 왕’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은 이처럼 중요합니다. 인생의 바른 진리를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경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도움이 안 됩니다. 성경을 펴서 읽으셔야 합니다. 어떤 분은 잠이 안 올 때 베고 잤는데, 불면증에 별로 도움이 안 되더랍니다.^^
  어느 교회학교 아이가 성경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가죽성경을 선물 받았는데 너무 좋아서 성경에 이름을 쓰고, 소중히 품고 다녔습니다. 교회 선생님이 어떤 성경인지 한번 보자고 했습니다. 아이는 펄쩍 뛰며 “안돼요! 이 성경을 열면 큰일 나요. 하나님이 나와요. 하나님이!”그러더랍니다. 성경 안에 하나님이 갇혀 계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을 펴서 읽는 순간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신다는 이야기 입니다. 성경 속에 갇혀있던 하나님이 내가 성경을 읽고 내 삶에 적용하는 순간부터 능력으로 변화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보면 성경은 위험한 책입니다. 존 크루지란 아프리카 선교사가 영국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 가방을 들고 내렸습니다. 검색대를 지나는데 삑 하고 경보음이 울렸습니다. “가방에 들은 것이 뭐요?” 무장 경관이 물었습니다. “예! 성경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쇠로 된 지퍼가 있어서 경보가 울렸나 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 그 무장 경관이 “선생님, 그렇지만 성경은 매우 위험한 책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성경이 위험한 책이 될 수도 있다니 무슨 이야기 입니까? 보십시오. 성경을 읽으면 인생이 바뀝니다. 핍박자가 전도자로 바뀝니다. 나를 위해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들로 바뀝니다. 성경을 함부로 읽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180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쯤이면 매우 위험한 책이 아닙니까? 성공하는 인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풍부한 인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옛날 성경을 보면 겉표지에 빨간색이 칠해져 있습니다. 파란색보다 빨간색은 경고의 표시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책이기 때문에 성경은 위험한 책 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전도자가 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히 먹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전도자의 영적인 준비는, 상대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8절과 9절을 읽어보면,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 하시고”라 말씀 하십니다.
  전도자는 전도 대상자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전도하다가 날 조롱하면 어떻게 하냐는  걱정에,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는 고민에, 창피만 당하면 어떻게 하냐는 생각에 전도를 부끄럽게 여기고,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도자는 담대하셔야 합니다.

  오늘 에스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도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너는 두려워 말라. 저들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들은 사실 무서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강퍅하고 완고하고, 그들의 이마는 화강석 같이 아주 견고하다고 했습니다. 에스겔 2장 4절에도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뻔뻔하고 강퍅해서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고 선지자들을 향해서 돌을 던질 수도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나 하나님이 그들보다 너, 에스겔을 더 강하게 준비 시켜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굳은 이마보다 너, 에스겔의 이마를 더 굳게, 금강석같이 만들어서 절대로 그들에게 깨지지 않게 할 것기에, 내가 너를 준비시켜 줄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시기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들고 갈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이 나를 무장시켜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재판관 앞에 설 때에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무슨 말을 할지 염려하지 말아라. 너희 속에서 할 말을 주장하시는 이는 바로 너의 성령님이시다.”아멘! 또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담대히 무장 시켜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도 가나안 땅을 정복해 갈 때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말씀이 “여호수아야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하지 말라”였습니다.

  전도자는 거절 당할까봐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거절당할 것을 미리 예감하고 미리 마음에 준비를 하면 두려움이 없고, 창피한 것도 없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전도하다가 받아들이지도 않고 욕하면 창피한데 안하는게 낫지”, “내가 권사, 집사 인데 전도 하다가 창피 당하면 안 되지! 체면은 지켜야지”라고 생각하면 전도하기 어렵습니다. 담대한 마음을 가지시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늘 성경 11절에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시더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듣든지 아니 듣든지’라는 말씀은 그들이 듣기보다 듣지 않을 확률이 더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말고 복음을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때가 좋든 나쁘든지, 듣든지 아니 듣든지 이 시대의 교회의 사명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고, 이 시대의 성도의 사명은 말씀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교회되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 성도는 성도 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의 근거가 그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소돔성이 유황불로 멸망당하기 직전에 성문에 서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목소리를 높여서 하나님 말씀을 예언하던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너무나 부패하고 타락한 도시였기 때문에 도무지 영적인데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외쳐도, 하나님 말씀을 전해도 귀 기울이지도 않고, 눈도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지나가던 한 행인이 다가와서 안타깝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노인 양반, 아무도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데 왜 그렇게 힘을 허비하고 있소? 왜 그렇게 허공에 대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있소?” 그랬더니, 노인은 “그들이 나를 변화 시키지 못하도록 계속 외치고 있소.”라고 했답니다.
  무슨 이야기 입니까? 내가 하나님 말씀을 전해서 그들이 변할지 모르지만, 내가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그들에 의해서 내가 변질되어 버리고 말 것이라는 교훈입니다. 내가 오염되어 버리고 말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세속주의 문화가 얼마나 강력합니까?
  교회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교회가 세상에 오염되어 버립니다. 성도들이 세상에 전염되어서 생명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복음전파는 교회의 생명의 유지인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그 몸부림은 교회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곳에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 3장 17절에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파수꾼은 외적이 침입해  오면 성 안의 사람들에게 나팔을 불어서 그들이 대피하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파수꾼이 게을러서 나팔을 불지 않아서 성 안의 사람들이 다 죽으면, 그 책임을 파수꾼의 손에서 찾겠다는 것입니다.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믿지 않고 대피하지 않아서 죽으면 그들의 책임이지만 네가 나팔을 불지 않아서 그들이 죽임을 당하면 너에게서 그 핏 값을 찾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 교회는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영접하든지 영접하지 않든지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이 우리 성도와 교회에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말씀을 전하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전도자는 말씀을 전할 때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셔야 합니다.

  에스겔 5절 6절에 보면 “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너를 방언이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알아듣지 못할 열국에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었더라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에스겔을 보내는데 언어가 다른 이방 민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말이 통하는 동족에게 보낸다는 의미입니다.
  바꿔 말하면 오늘 우리가 전도하려면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말이 통하는 내 가족, 친척, 이웃, 직장 동료, 친구부터 전도대상자를 작정하고, 그들을 위해서 하루 세 번씩 기도하면서 그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풀면서 전도 하라는 것입니다. 이슬비에 옷이 젖는다고 조심스러운 접근과 기도를 통해서 한 영혼이 언젠가는 예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됨을 믿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아프리카에 가서 복음을 증거 하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언제 그 나라 말을 익혀서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외국어를 익힌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며칠 전에 한 세미나 모임에 러시아에서 7~8년 계시던 선교사님이 오셨는데, 그 분 말씀이 자기는 7~8년 됐지만 아직 러시아말로 설교를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50대에 접어드니 말을 못 익히시겠답니다. 그래서 통역을 세워서 설교 하신답니다. 일반적으로 식당을 찾거나 길을 찾을 때는 혼자 할 수 있지만,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설교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이 통하는 사람들, 감정이 통하는 사람들에게 전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한국에 처음으로 복음이 들어온 해를 1885년으로 잡고 있습니다. 그 해 부활절 4월 5일 아침에 정식으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인천 제물포항에 들어 왔습니다. 부활절 아침에 복음의 역사가 시작 된 것입니다. 영어권에 사는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려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한국말 배우기가 영어 배우기보다 더 힘들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저는 영어 공부한지 15년이 넘었는데도 남 앞에서는 영어 한마디 잘 못합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언제 한국말을 배워서 한국말로 전도를 하겠습니까? 그러니 갖가지 오해와 착오들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선교사는 전도하러 어느 집에 가니 대문에 ‘개조심’ 이라고 써 있었답니다. 그것이 사람이름인줄 알고 “개조심씨! 나오세요.”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문화의 차이 때문에도 엄청난 실수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알렌이란 선교사는 의사인데, 고종황제의 주치의를 하면서 선교를 했습니다. 조그만 성경공부 그룹을 열게 되어서 남자 여자를 모아서 성경공부를 하는데, 옛날엔 남녀칠세부동석인지라 천막을 치고 따로따로 앉아서 공부 했습니다. 선교사님이 자리를 안내 하면서 “숫 컷들은 이쪽으로 오시고, 암 컷들은 이쪽으로 오시오.” 라고 말했답니다. 숫컷, 암컷은 우리에게 모욕적인 말이지만, 영어로 보면 male, female이 남성 숫컷, 여성 암컷으로 똑같이 사용합니다. 문화, 언어의 차이라는 것이 참 넘어 서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더듬거리는 말로 복음을 전해서 오늘 한국 땅에 이렇게 많은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선교사들은 언어가 다른데도 와서 복음을 전했는데,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비우고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조금만 더 영혼 구원의 열정을 가지면 얼마든지 증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전도할 만큼의 재물과 시간적인 여유도 다 주셨습니다. 언어가 통하니 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일에 예외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공사 현장 아래를 지나다가 인부가 실수로 떨어뜨린 망치에 어깨를 맞았습니다. 얼마나 아픈지 위에 대고 “여봐! 눈 좀 똑바로 뜨고 해! 누구 죽일 일 있어?”라고 소리쳤답니다. 그랬더니 적반하장으로 뭘 그 정도 가지고 시끄럽게 구냐고 대꾸를 하더랍니다. 그 사람은 너무 화가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더니 인부의 말인즉슨, “그 사람 정말 시끄럽구만! 아까 먼저 지나간 사람은 머리에 떨어져서 죽었는데도 아무 말 안했는데, 뭐 그걸 가지고 그리 말이 많아?”라고 했답니다.

  여러분, 죽은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말을 합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는 살아 있기 때문에 복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 있다는 것은 오늘도 복음을 증거 한다는 것입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우리 모두가 되셔서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축복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