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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한 동기로 이룬 연합의 허무함 (삼하 3: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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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요한 목사

저는 오늘 본문말씀을 중심해서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가 점점 격차가 나는 과정 속에 사람과 사람의 야욕과 욕망들이 어떻게 진행되어져 가고, 또 그 가운데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그들이 감추고, 왜곡하면서 살아가는가를 보면서 이 시대의 우리의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진정으로 새로워지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울왕의 군대 장군이었던 아브넬이 사울이 길브아전투에서 죽은 이후에 나라가 완전히 망해가는 그 운명의 상황에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추대해서 자신이 다시금 북왕국이스라엘 12지파 중에 10지파를 지배하는 큰 국가의 실권자로 자리매김을 했습니다.

이스보셋은 왕이긴 하지만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모든 권력은 군대장관 아브넬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80년대 최아무개 대통령이 계시기는 했지만, 그 분보다는 국방위원장으로 있었던 어느 장군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던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보면 아마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그러는 와중에서 이 아브넬은 전 왕이었던 사울왕이 사랑했던 애첩을 자신이 통간을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아들이었던 이스보셋왕은 군대장관을 불렀습니다. 어찌해서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분노해서 그를 책망을 했지만 오히려 아브넬은 두 가지 이유로 이스보셋왕을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 나라가 완전히 망해가는 이 상황에서 내가 그래도 선왕 사울왕의 은혜를 입은 상황이라 이 나라를 추슬러서 당신 왕자라고 왕으로 세우고, 그 형제들과 일가친척들을 왕족으로 대우하면서 여기까지 은혜를 베풀었는데, 이제와서 은혜를 모르고 무슨 소리냐? 하면서 협박했습니다.

정 내가 이 나라의 실권을 가지는 것이 싫다면, 내가 이 이스라엘 이 나라를 송두리째 유다의 왕으로 있는 다윗에게 가져다 바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왕노릇도 못할 것 아니냐? 왕노릇하려면 아무 소리 말고 입 다물고 있어라. 그런 협박이었습니다.

11절에 보면 이스보셋왕은 아브넬이 두려워서 감히 한 말도 대꾸를 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왕이지만 왕으로서의 권위와 권세가 없는 참 안타깝고 불쌍한 왕이었습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6절에 아브넬이 점점 권세를 가지는 것과 그가 선대왕의 첩을 통간하는 일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 속에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 역사적으로 왕의 위를 이어 받는다는 것은 선왕이 애지중지 했던 첩들을 자신의 소유로 삼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아브넬의 위치는 지금 군대장관이지만 내가 왕으로써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 장차 내가 왕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그런 선조들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함으로써 자기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선왕의 애첩을 자신이 통간함으로써, 이제 그들이 나의 소유가 됨으로, 곧 내가 이 나라의 왕의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행동인 것입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행동에서의 잣대로 보기보다는 통치적인, 권력의 이동에 안목에서 보아야 이 의미는 알 수 있습니다. 아브넬은 곧 이 나라의 실질적인 왕이라고 하는 것을 실질적으로 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스보셋임금은 윤리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네가 군대장관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그렇게 책망했지만 그는 본전도 찾지를 못했습니다.

요즘 우리 공직사회도 무척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최근 정부 들어서는 고위공직자들이 추천과정에서 낙망하거나, 아니면 임명은 받았지만 며칠 못 가서, 몇 달 못 가서 중도에 사직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럴까? 두가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지도자들이 더 옛날 사람들보다 더 타락해서 그럴까? 그런 이유도 있겠지요. 또 다른 사회학자들의 진단은 과거에는 그 정도의 일들은 문제삼지 않고 지나갔던 의식들이 이제는 지도자들이 되려면 그 정도도 안 된다고 하는 높은 시민의식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라고 하는 평가도 있습니다. 두 가지 측면이 다 강합니다만, 후자가 더 강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땅을 사면서 주민등록을 이전한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어느 지역에 땅을 사려고 하는데, 어느 지역에 아파트를 내가 구입하려고 하는데 그 지역 주민이 아니면 안 된다더라. 그 자격이 그 지역의 주민등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람이더라.

여러분들이 남편이나 자식이나 자녀들의 이름으로 주민등록을 한 사람 옮겨놓고 아파트를 사거나 땅을 산 후에 등기등본 해놓고, 그 다음에 다시 사는 곳으로 자기의 등기부등본 그 주소와 관계없이 주민등록을 옮겨오는 경우가 있지요. 주민등록등본을 쭉 띄어보면 저 쪽으로 갔다가 온 사람은 언제 갔다가 언제 다시 들어왔다고 하는 그런 기록들이 남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면서 마음에 어떤 마음을 가지십니까? 내가 어마어마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마음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파트를 사기 위해서 땅을 사기위해서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최근에 한 고위공직자도 부인의 이름으로, 자녀의 이름으로 땅을 사기 위해서 주민등록을 옮겼다가 다시금 땅을 산 뒤에 돌아온 사건이 아주 오래된 사건이지만 그것이 시민연대에 의해서 밝혀져서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도중에 하차를 했습니다.

부동산 투기를 위해서 위장전입을 했다는 것이지요. 아마 일반 시민 사회에 이 기준을 가지고 걸리는 사람들을 직장에서 제명시키거나 공직에서 제명시킨다면 아마 대한민국은 큰 소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아마 교회 안에서도 그런 분들이 적지않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회개하셨습니까? 아마 이런 것도 회개 해야 되나? 아마 그런 생각을 가졌을 지도 몰라요.

그런데 장관이 되려면, 국회의원이 되려면 아마 어마어마한 범죄에 해당될 것입니다. 문제는 시민사회에서는 넘어가는 일들이 지도자의 세계에서는 넘어갈 수 없는 큰 범죄라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이나 법관이나 그런 중책을 맡으려면 중학교 때 장난 삼아 대마초 한 대 피워본 것도, 그런 것도 결정적인 결격사유가 됩니다. 그러니까 지도자가 되려고 하면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자기 행동 하나하나를 잘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교수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대학교 1학년 들어가면서부터 A학점을 맞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쩌다가 실수해서 B+라도 맞으면 그는 그 과목을 취소하고, 다시 재수강해서 A학점을 맞고야 맙니다. 그래서 전 학년의 자기의 학과점수가 A학점 이상이 되어야 유학을 가서 돌아왔을 때 교수로서의 기회가 주어지는 거지요. 교수의 관심을 가진 사람은 이미 대학교 1학년때부터 자기 점수의 관리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대통령의 꿈이 있고, 장관의 꿈이 있다면 초등학교 때부터 자기관리 하라고 시키세요. 장난 삼아 중학교 때 담배한 번 피어봤다. 지도자로서는 용납이 안 되는 결격사유가 됩니다.

바울사도는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마라. 이것은 지도자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어려움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저는 지도자들의 문제가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몇 년동안 지도자에 대한 여러 가지 부분에 대해서 묵상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사회가 이렇게 어렵고 힘든 것 중에 큰 이유는 바로 지도자들의 문제입니다. 대통령의 문제, 국회의원의 문제, 장관의 문제, 적어도 신문지상에서 뉴스메이커가 되는 바로 그들의 문제가 이 나라의 문제라고 합니다.

돌이켜서 우리는 한국교회를 생각합니다. 바로 지난 4월 5일은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항을 통해서 이 땅에 복음을 가지고 들어온지 꼭 120년이 되는 날입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런 시기즈음에 선교 120주년에 우리 한국교회는 1200만명의 성도를 보유한 전세계 역사상 유래없는 그런 크리스찬 성도들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독교가 국교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이상한 나라입니다. 영국은 성공회가 국교로 인정되어 있는데, 영국성공회를 포함한 감리교회, 성결교회, 침례교회, 장로교회, 이런 다른 교단까지 포함을 해서 현재 영국은 땅덩어리도, 인구도 비슷한 나라입니다만은, 4%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40%가 아니고 4%입니다. 그런데 4%가 신앙생활을 하는 그 영국이 기독교가 국교입니다. 그런데 25%가 넘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고 있지만 국교가 아닙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기독교가 국교가 되느냐, 안 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짧은 시기 동안에 하나님께서 이 나라, 이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이렇게 1000만이 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성도를 주신 것은 축복 중에 축복인 줄 믿습니다. 이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들을 우리가 잘 간수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하겠는데, 지금 한국교회도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일일이 다 거론할 수 없지만, 우리가 그 한국교회의 문제들 가운데에 중요한 문제의 중심이 누구냐 라는 것입니다. 처음 교회 나온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집사님, 권사님 중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의 문제는 100%로 볼 때에 몇 퍼센트도 되지 않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교회의 문제는 목사님과 장로님의 문제예요. 다시 말하면 교회 지도자들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저를 포함해서 한국교회에,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그리고 죄송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도자의 높은 윤리적, 신앙적, 사회적 리더쉽을 잃어간다면 한국교회는 그 숫자를 자랑하는 그 시간이 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제는 사회적 지도자들의 기준만을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신앙의 지도자들에게도 높은 신앙적 기준이 요구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목회자들에게도 우리 장로님들에게도 높은 기준이 요구가 됩니다. 인격적으로 높은 기준이 요구가 됩니다.

가정생활에서 높은 신앙적 리더쉽이 요구가 됩니다. 당신은 신앙생활을 잘 하는데 자녀들은 신앙생활이 영 아니예요. 심지어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던가, 예수를 믿지만 지금은 신앙생활에 전혀 헌신적이지 않다던가, 그래서 오죽하면 우리 감리교회 장정에는 장로가 되려고 하면 온 가족이 인가귀도가 되어야 하고, 자녀들도 신앙생활에 헌신적이어야 한다고 단서까지 붙여놓았어요.

그것은 교회 안에서 지도자로써 인정을 받으려면 그것은 가정생활에 있어서 본인이 영적인 리더쉽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리더쉽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장로님 가정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축복하셔야 합니다. 어느 교회는 목사님이 장로님들에게 돈을 조금씩 드린답니다. 그래서 왜 주느냐고 하니까 장로님들이 속회시간에 헌금을 천원을 하고, 주일헌금을 천원하는 것이 창피스럽고, 덕이 되지 않아서 정말 못 보겠다는 거예요.

장로님 속회 헌금은 만원씩을 하시고, 주일헌금 만원씩만 하세요. 창피스러워서 안 되겠습니다. 교인들 앞에 덕이 되지 않습니다. 오죽 그 장로님이 가난했으면 그랬겠어요. 하지만 꼭 가난해서는 그런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인색해서, 또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거예요. 저는 우리 장로님들이 물질생활에 있어서도 성도들에게 본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넉넉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물질적으로,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가정적으로, 윤리적으로 지도자들에게는 수없이 많은 것들이 우리의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되는 일은 무척 피곤하고 힘든 일입니다. 이런 것도 모르고, 내가 교회생활 오래 했으니
까 장로 시켜달라고 해야지. 신앙생활 오래했으니까 권사 시켜달라고 해야지.

‘목사님, 어떤 사람이 왜 안나오는지 아세요?’ ‘왜 안 나오는데요?’ 권사 안 시켜줘서 안 나온대요. 제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권사 안 시키기를 잘 했네. 어떤 교회가 그럽니다. 어떤 교회의 장로는 그럽니다. 장로 투표 떨어져서 교회를 옮겼답니다. 그 사람 장로 떨어지기를 잘 했네. 그런 사람 장로가 되고, 그런 사람 권사가 되었으면 얼마나 우스울 뻔 했습니까? 지도자에게는 높은 수준이 요구가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아브넬을 보면서 그에게는 권세가 있고, 그에게는 힘이 있지만, 그에게는 정말 결정적으로는 지도자가 가져야할 여러 부분들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현재 힘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앞에 굽실거리기는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존경은 아닙니다. 허리는 굽혔는지 모르지만, 마음은 굽히지 않은 것이지요.

오늘 우리는 그가 이스보셋왕에게 두 가지를 협박하면서 그 협박의 내용 속에 아주 중요한 스스로 고백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우리는 들을 수 있습니다. 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게 이루게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그 맹세가 무엇이냐 하면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곧 이 나라를 사울의 집에서 다윗에게 옮겨서 그 위를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에 세우리라 하신 것이니라.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지금 사울이 길브아 전투에서 죽임을 당한 것도 하나님의 약속이고, 하나님의 예언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다윗이 결정적으로 두 번이나 죽일 수 있었지만,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지 않다고 하는 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다윗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해결하실 일이다.

정말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전쟁을 통해서 사울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셨는데,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이 나라에 하나님이 인정하는 지도자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단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도시를 말하는 것이고, 브엘세바는 제일 남쪽도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 나라 전체 열두 지파를 다윗에게 맡기셨다는 사실을 아브넬 군대장관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넬은 자신의 정치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이스보셋을 부추겨서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나라를 세운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운 것도 아니고, 세운 왕 이스보셋을 위해서, 사울의 가문을 위해서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대외적인 명분입니다. 내가 선왕을 얼마나 존경했느냐? 내가 선왕의 아들 이스보셋을 얼마나 존경하는데, 대외적인 명분은 그렇게 세워놨지만, 자신의 욕심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야심을 채우려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지금 이스보셋왕에게 협박을 하는 말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진실이 나와 버렸습니다. 이야기 하는 가운데 자신의 속 진실이 나와버렸습니다. 사실은 나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 나라를 하나님의 뜻은 다윗에게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을 나도 알고 있다고 이스보셋에게 내가 너를 왕으로 세운 은혜도 모르느냐고 공박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 진실을 이야기 해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때때로 이 아브넬과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명분은 그럴 듯 하지만 실상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가 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시장이면서 장로이신 분이 교회에서 주차안내를 하십니다. 아침 저녁으로 주차봉을 들고 주차 안내를 합니다. 교회가 큰 교회라 차들이 1부, 2부, 3부, 4부, 5부 드나듭니다. 쉬운일이 아니지요.

그 장로님을 잘 하는 장로님이 저에게 지난번 기독교 TV 방송 예배 인도를 갔다가 차를 한 잔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목사님’ 그 장로님이 그렇게 주차안내를 하니까 그 청장년 남선교회 회원들이 서로 주차 안내 하겠다고 그냥 구름떼 같이 모여든다는 것입니다. 너도나도 주차안내 하겠다는 사람이 많아서 목사님이 아주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주차안내를 하겠다고 나선 것입니까? 시청 가도 만나 뵐 수 없는 높은 분이 어쩌면 아마 이 나라에 큰 책임을 맡을 수 있을지 모르는 그 분을 좀 사귀어 보자. 눈도장이라도 좀 찍어놓자. 그런 개인적 욕심들이 많이 작용을 했을 거예요.

군대의 사단장이 교회를 나오면 100명 출석하던 교회가 갑자기 500명이 나옵니다. 500명 출석하던 교회에 사단장이 바뀌어서 불교신자 사단장이 오면 갑자기 100, 200명으로 줄어들어요. 무얼 이야기 하는 것입니까? 지금 우리가 이야기 하고 있는 사회의 일반적인 흐름들 이것을 우리는 여러 경황을 통해서 보고 있는 거예요. 공통적인 무언가를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나올 때 아니 성도 이전에 교인들이 나올 때 여러 가지 이유로 온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 따라서 처음 교회에 나온 동기를 물었을 때 친구 따라서 교회왔다고 하는 퍼센테지가 굉장히 많습니다. 20%가 넘어요. 그것보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옛 말도 있는데, 친구 따라 교회 간다. 예수 잘 믿는 친구를 만나면 그도 예수 믿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이해관계 때문에, 사업하는 사람은 여기서 사업을 해야 내가 잘 되리라. 그런 사람들은 작은 교회는 안 가지요. 제가 개척교회때 그런 상처를 받은 적이 있어요. 부천시내에 그 때 5천원이면 예수님 사진과 성구가 들어있는 그 밑에 평안의교회, 입주, 회갑을 쓰고 드리는 게 그 때 5천원이었어요. 22년전에 5천원이면 한 달 전기세입니다. 적은 게 아니었어요. 그것을 제가 직접 가서 쓰고 포장해서 오는데, 그 유리가게 하면서 표구를 함께 하는 그 주인을 오래도록 만나면서 전도를 했어요.

오래도록 교제를 하면서 거의 전도가 무르익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태신자로 품고서 오래도록 교제를 나누었어요. 그리고 결국은 결심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교회를 갈께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어서 교회 나오기로 결심을 했는데, 그 다음에 제가 그 분 선물을 사러 갔더니 그 분 가게 문에 다른교회 교패가 붙었어요. 이름을 대면 알만한 큰 교회 교패가 붙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된건가요? 물어봤더니 교회 갈 결심만은 변함이 없는데, 제가 목사님 교회를 가려고 생각을 하니까 이 5천원짜리 하나 사는 것도 바둥바둥 하는 것을 보니까 내가 이 장사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그래서 이왕 믿을 거면 큰 교회로 가서 장사에 좀 도움이 되고, 예수도 믿고, 그래서 두 가지 다 해 보자. 그래서 가까운 큰 교회 등록을 했습니다. 목사님한테는 미안하지만 어쩔수 없잖아요. 이해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분은 솔직하게 그 담겨진 속 마음까지도 이야기 해 주어서 고마웠어요. 그거 감추고 딴 소리 했으면 더 속상했을 텐데, 그 속마음까지 이야기하면서 양해를 구했어요. 그래요, 그러면 거기서 잘 하시는데, 한 가지 권면해 드리고 싶은 것은 장사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가시면 도움이 안 되면 당신 또 교회 옮겨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당신 상처받습니다. 신앙은 절대로 이해득실을 따져서 선택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 전도할 때도 우리 교회 오시면 많이 팔아준다고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지 마세요. 정말 잘 못된 권면입니다. 많이 안 팔아 주면 어떻게 할 건데요? 그래서 가끔 교회 왔다고 안 나오시는 분들에게 물으면 도움이 안 되서 안 온다는 분들이 있어요. 평안의 교회 오면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교인들이 자기 집에 안 오고, 딴 집에 가니까 속상해서 속이 뒤집어 져서 못 가겠다. 그것은 출발부터 잘 못 된 것입니다. 우리가 출발부터 예수를 소개해야지. 그 외에 어떤 것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에 그것이 지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넬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자기의 야욕 때문에 그 뜻을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권력을 장악하고, 왕 이상의 권세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해 봅니다. 왕 이스보셋이 나에게 도전하고 있구나. 어쩌면 저 사람이 자객을 보내서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이스보셋하고의 권력 투쟁에서는 이겼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 지는 몰라요.

그는 고민하다가 밀사를 남왕국 다윗에게로 보냈습니다. 이 북왕국을 송두리째 당신에게 가져다 바칠테니, 그리고 왕의 목을 쳐서 왕의 목을 가져다 바칠테니 나에게 기득권을 주십시오. 밀사를 보냈는데, 다윗이 그렇다고 하면 전제조건이 하나 있어. 처음에 나의 아내였던 사울의 딸 미갈을 나에게 보내라. 그 미갈은 다윗과 처음으로 혼인한 첫 아내입니다만, 사울왕이 다윗왕을 얼마나 미워했는지, 그들이 서로 살 수 없도록 만들었어요. 결국은 원수지간으로 만들었습니다. 후에 미갈은 다시금 재가를 해서 결혼생활을 잘 하고 있는데, 그를 불러들인 것입니다. 한 번 그를 보기 원하는 것입니다.

‘물론이지요. 제가 미갈을 찾아서 왕에게 보내겠습니다.’ 미갈을 찾아서 왕에게 보내서 자기가 다윗에게 순종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20명의 호위병을 데리고 다윗에게 갔습니다. 다윗은 그를 잔치로 맞아주었습니다. 다윗은 그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하나님의 나라로 하나되게 하는 일에 하나님이 쓰신다고 생각을 해서 그를 받아주었습니다.

그 잔치가 있는 그 시간에 그 남왕국의 군대 장관 요압은 다른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돌아오니까 소식이 들립니다. 북왕국의 실권자 아브넬이 20명의 호위병을 데리고 와서 다윗왕의 환대를 받고, 막 떠나는 중이다. 요압은 생각합니다. 내가 이 나라에서 군대장관으로서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데, 저 북왕국의 땅을 통째로 바친 아브넬이 온다면 그와 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 경쟁자가 되는 것이니까 초반에 경쟁자를 없애 버려야 되겠다.
얼른 사람을 보내서 왕이 보내는 양 왕께서 아브넬 장군을 잠깐 한 번 더 보자고 그럽니다. 다시 성으로 초대를 했습니다. 성에 자객들을 두었다가 그 아브넬 장군이 성에 들어오자마자 칼로 찔렀습니다. 아예 경쟁자를 초반에 없애버리자는 이야기지요.

아브넬은 이스보셋과의 권력투쟁에서는 이겼지만, 요압과의 권력투쟁에서는 희생을 당했습니다. 요압이 통일왕국의 군대장관이 되었습니다. 최고의 다윗왕 다음에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요압장군은 그 후에 솔로몬왕이 왕위를 받았을 때 브나야라고 하는 장군에게 그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아브넬은 요압에게, 요압은 브나야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 마키아벨리에 정치에 대한 이론 중에 조작된 여론을 가지고 권력을 잡은 자는 반드시 여론에 의해서 망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권력투쟁의 중심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는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대외적으로 요압은 뭐라고 하고 아브넬을 죽인 줄 아십니까? 다윗왕에게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서, 저 아브넬은 자기 왕 이스보셋의 목을 쳐서 다윗왕에게 왔지만, 한 번 배신한 저 사람이 다윗왕도 배신 안 한다고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으로 내가 다윗왕의 안전을 위해서 내가 처리했습니다. 다윗왕의 대한 충성심으로 아브넬을 죽였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감추어진 두가지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남왕국과 북왕국이 아브넬과 요압장군이 서로 싸울 때 요압장군의 동생이었던 아사헬 장군이 북왕국 아브넬장군에게 죽임을 당했던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 요압 장군은 동생을 죽인 철천지 원수를 그냥 둘 수 없는 거지요.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앞으로 다가올 권력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경쟁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하는 이기심이 자기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가지 자신의 이기심과 개인적인 원한은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명분은 다윗왕을 위해서, 앞으로 다윗왕의 안전을 위해서 그는 그 일을 했다고 그는 왕에게 변명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 우리의 개인적인 욕심이나 이기심, 개인적인 이유를 감추고, 대외적인 명분을 가지고 일을 한 적은 없었습니까? 여러분이 열심히 어떤 일을 하시지만 어떤 동기로 열심이셨는지, 우리는 지금 한 번 뒤돌아 보기를 원합니다.

내가 이 교회를 나오는 이유,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유, 내가 믿음의 생활로 감당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까? 직장인들이 새벽같이 가서 밤 늦게 돌아옵니다. 때때로 감당못하면 집에까지 가지고 옵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해요? 봉급주니까, 삼성 아니라 그 이상이라도 봉급 안 주면 그만 두는 거지요. 그 충성심에는 봉급이라고 하는, 경제적인 지원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지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이유를 다시 한 번 검토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감추었던 우리 속마음들은 없었습니까? 이런 것들이 있다면 이제 다 버리기를 원합니다. 헌금을 할 때도 순전한 마음으로 했습니까? 봉사할 때도 순전한 마음으로 했습니까? 헌신할 때도 순전한 마음으로 했습니까? 아니면 그것은 명분일 뿐 속 마음은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까? 주님의 뜻이 제외된 어떤 다른 동기도 그것이 연합되고, 그것이 어떤 힘으로 다가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화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들의 삶을 통해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은 88년의 삶을 사시면서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내 평생 가장 행복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물질,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권력, 지위, 그것은 축복이요,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요, 우리의 삶의 비극이라는 것을 이제 내 인생의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기 원합니다. 주님, 주님과 함께 함이 축복이요, 주님이 동행하심이 행복이요, 주님이 인정하심이 내 삶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주님 나와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함이, 주님께서 인정하심이 우리의 축복이요, 우리의 승리인 줄 믿습니다. 감추었던 우리의 모든 야망들, 우리의 속셈들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어떤 인간적 이유라도 그것이 연합되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축복이 아니요, 비극의 시작임을 다시한 번 깨닫게 하옵소서. 순전함으로, 신실함으로 주님 앞에 서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 예수그리스도 안에, 십자가 보혈 안에 새롭게 된 우리, 거듭난 우리, 이제는 순전함으로 주님 앞에 서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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