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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전천후적인 삶 (빌 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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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신만교 목사

(빌 4:10) 내가 주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 가 없었느니라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옆에 분과 인사합시다. '요새 여러모로 힘드시지요?'
그렇습니다. 요즘, 우리 모두가 힘든 세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태백이니, 삼팔선이니, 사오정이니, 오륙도니'하는 말이 오늘의 어려운 세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힘내십시오. 우리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산 믿음은 능히 환경을 이기게 해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삶이 그 가능성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만큼 어려운 환경에서 산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수 없는 절망적(絶望的)상황에 이르렀고 죽음의 고비를 수 없이 넘긴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너무도 크고 위대한 일을 해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류 역사상 가장 능력 있게 살다간 한 사람입니다. 꺼질 줄 모르는 활화산(活火山)처럼 타오르는 정열을 품고 한평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몸은 찌르는 가시 때문에 쇠약(衰弱)했으나 위축되지 않고 위대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습니다.

  누군가가 '사도 바울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이며, 이 세계에서 가장 이력(履歷)이 놀라운 사람이며, 그의 업적은 교회사에서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부유하고 풍족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당시 유대인으로서 로마의 시민권(市民權)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풍족하고 좋은 환경에서 자랐는가를 짐작케 해 줍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60년대쯤 미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보통 사람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당시 최고 학부에서 공부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사도(使徒)가 된 후로부터 안정된 생활과 모든 특권을 포기한 채 이방인의 전도자로 고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몸소 체험하였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기를 밥먹듯 하고, 가는 곳마다 매를 맞거나 쫓겨나기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세월을 감옥(監獄)에서 보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삶 속에서는 기쁨과 감사가 흘러 넘쳤습니다. 그는 입만 열면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를 강조하였습니다. 그야말로 그 어떤 환경에도 매이지 않는 영원한 자유인(自由人)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가르쳐 전천후적(全天候的)인 삶이라고 말합니다. 전천후(全天候)란 어떠한 기상 조건에서도 사용하거나 활동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전천후 농업하면 수리 시설이 잘 되어 있어서 가뭄이나 홍수 등의 기상 조건 아래서도 지장을 받지 않는 농업을 말합니다. 전천후 폭격기하면 밤중이나 안개가 끼었을 때에도 활동할 수 있도록 레이더를 갖춘 비행기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전천후 인생을 살아야합니다. 과연 사도 바울은 전천후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 비결을 배워야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정도의 경제적 어려움은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어려운 환경을 초월하여 전전후적인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영광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작은 것에도 크게 기뻐하며 감사(感謝)하는 열린 마음을 갖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고 또한 항상 감사하면서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오늘 본문 역시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으면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감사의 편지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늘 은혜 받으시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랜만에 빌립보 교회로부터 에바브로디도 편에 선교 후원금으로 얼마간 도움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감사의 말을 전하고자 하는 겁니다. 10절을 읽습니다. 
(빌 4:10) 내가 주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이 말씀에 의하면 바울에 대한 빌립보 성도들의 물질적 후원이 한동안 끊어졌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싹이 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겨울잠을 자던 나무가 봄을 맞아 싹이 나듯이 사도 바울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다시 소생된 겁니다. 이것이 이 빌립보서를 쓰게 된 동기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작은 일에도 기뻐하고 감사하는 바울의 열린 마음을 배워야하겠습니다. 우리는 때로 사랑을 받고도 감사한 마음보다 그냥 무심하게 당연한 것으로 넘기기 쉽습니다.

  바울의 경우, 복음 전하다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는 사도에게 영치금(領置金)조로 선교비를 보내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이 크게 안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너무 기뻐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감사의 인사를 하였던 겁니다.
  우리가 늘 만족하고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작은 감사거리라도 잊지 않고 찾아서 크게 기뻐하고 감사를 표시하는 겁니다. 가정(家政)에서도 그렇고 교회생활에서도 그렇고 사회생활(社會生活)을 하면서도 그렇습니다. 작은 감사라도 잃지 말아야합니다. 

  지난번 정의여고에서 성결인 대회를 성공적으로 맞추었는데 그만 끝나고 나서 학교측에 감사인사를 못하는 바람에 큰 결례(缺禮)를 했습니다. 그 후 우리 임직식을 할 때 주차장으로 학교 운동장을 빌려주었던 동오 초등학교를 방문하여 인사를 하니까 그렇게 좋아하시더군요.
  제가 이번에 설교집을 제작하여 200여분 가까운 목사님께 보내드렸는데, 실제 감사의 전화를 주시는 목사님들은 불과 20명 내외였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설교집을 한 권씩 드렸는데  고맙다는 마음이 들었습니까? 아마도 그런 사람은 소수에 불과 할겁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10명의 문둥병자를 만나 너의 몸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가다가 문둥병이 나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때 즉시 주님께 돌아와 감사를 표시한 사람은 단 한 명에 불과하였습니다.(눅 17:17) 역시 감사하는 자는 10%정도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만큼 메말라있다는 겁니다. '살기 힘든 세상인데 언제 그런데 신경 쓰는가' 그렇게 지나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사를 잃은 9사람에게는 섭섭한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그 한 사람에게 더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눅 17: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여러분, 하나님께나 사람에게나 감사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야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런 삶 가운데 불평 불만이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감사(感謝)는 새로운 것을 얻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얻은 은혜를 깨닫는 것에서 감사의 출발점이 있습니다. '감사'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참 좋은 천국의 언어입니다.

  옆 사람에게 인사합시다. '오늘 제 옆에 앉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를 잊지 마세요. 여러분 앞에 감사봉투를 보면서 기억났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것에도 크게 기뻐하며 감사(感謝)하므로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를 표현하다가 혹시 다른 오해를 사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대한 감사가 또 다른 물질적 도움을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11절의 고백을 합니다. 다같이 읽습니다. 

(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전천후적인 삶의 두 번째 이유를 발견합니다.   

2.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自足)할 수 있는 비결은 터득한 겁니다. 

  '자족'(自足)이란 무엇입니까? '스스로 만족(滿足)하는 것''스스로 충족(充足)하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조건이나 환경이나 상황으로부터가 아닌 스스로 언제나 만족하고 행복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자족(自足)이 현실 부정,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그저 되는 데로 산다',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 쓴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산다'는 식으로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루 하루를 치열하게 싸움하는 자처럼 산 사람입니다. 목표(目標)가 뚜렷한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을 상을 얻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달리는 자였습니다. 
  이와 같은 치열한 신앙경주에 있어서 그 어떤 환경이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자신이 터득한 자족의 비결에서 왔다고 고백합니다. 12절을 읽습니다.
(빌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첫째, 바울은 비천(卑賤)에 처할 줄 아는 비결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가난하게, 궁핍하게 사는 비결을 말합니다. 이 같은 가난이 주의 일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 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가난한 생활도 할 수 있어야합니다. 셋방살이도 할 수 있고 반 지하에 살수도 있어야 합니다. '난 가난하게는 죽어도 못살아!' 하며 부자 될 때까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고후 8:9)

  둘째, 나는 풍부(豊富)에 처할 줄 아는 비결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부자로 사는 비결을 말합니다. 사실 부자로 사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부자가 돼서 불행해 지는 사람 많습니다. 부자가 되므로 하나님을 멀리하고 교만(驕慢)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자가 천국 가기가 더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아굴이란 사람이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여,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8-9)
  그러나 바울은 부자로 살 자신도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부자로 사는 올바른 비결을 배워 다 멋진 부자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실제 이렇게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가난할 때 청렴하고 깨끗하고 믿음생활도 잘 하다가 돈이 많아지니까 몰인정해지고 교만해지며, 더욱 욕심을 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넉넉할 때는 인심도 좋고, 너그럽고 부드러웠는데, 직장에서 퇴직 당하고부터 비굴해지고 신경질적으로 툭하면 싸우려하고 낙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결코 그런 환경에 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았고, 아무리 부하여져도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겸손하고 친절했고 마음의 평안과 감사와 기쁨을 잃지 않았으며, 전도자의 사명(使命)을 바로 감당했습니다. 결코 환경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전천후적인 삶입니다. 
  우리도 이런 삶을 배워야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환경이라면 바꾸라! 그러나 바꿀 수 없는 환경이라면 겸허히 받아 들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 봐도 당장에 바뀌지 않는 환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행복을 마냥 뒤로 미루어 놓을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때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바울은 이 자족의 비결을 배웠다고 합니다. 신앙의 연단을 통해 얻은 것입니다. 자족의 비결은 한 순간에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하루의 삶의 연단이 축적되어 비로소 임하는 것입니다. 연단을 통해 조금씩 터득하는 겁니다. 이 자족의 비결, 그 놀라운 능력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3. 자족(自足)의 비결, 그 놀라운 능력의 근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이 그 어려운 환경에서 복음을 전하면서도 자족하고 만족할 수 있는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습니다.
  옛날 스토아 철하자들은 자족을 위해 욕망과 감정을 내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의지력으로 자족하기를 배우라고 하였습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려면 그 소유를 늘리지 말고 그 욕심을 제거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후, 체험적으로 이 진리를 터득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모든 세상적인 욕망을 버리고 스스로 자랑하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버리고 오직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예수님과 같이 살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바울이 있었고 바울 안에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입니다.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것은 그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바뀌었다는 겁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이 바뀌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인생관과 가치관이 바뀌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대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면, 그는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만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후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바뀌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야말로 곧 능력의 원천입니다. 바울은 항상 능력 주시는 분 안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형편과 처지가 어떠하던지, 그 어떤 환경과 조건에 관계없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을 공급받음으로써 자족할 수 있는 겁니다.

  문제는 내 인생의 삶의 뿌리를 어디에 내리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 2:16)에 뿌리를 두고 사는 사람은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바울처럼 내게 능력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뿌리를 두고 있을 때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흔들리지 않고 자족하며 살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능력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능력이신 예수 안에 거하십시오. 나 혼자라면 가난을 이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라면 그는 어떤 비참함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라면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어떤 위협도 참아낼 수 있고 죽음마저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습니다.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주님 안에서라면 그는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을 너무 자주 오용(誤用)하고 있습니다. '성공과 성취'라고 하는 목적을 위해 얼마나 자주 이 말을 이용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성공과 보장을 위해 이 말씀을 잘못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능력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주여, 환경을 초월하여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옵소서' 

결론)
  환경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환경이 우리를 붙잡고 주인 노릇 할 수 없습니다. 환경은 언제나 변합니다. 환경은 일시적인 과정입니다. 환경과 여건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주변 환경이 예수 안에 있는 나의 행복을 좌우하지 못합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그렇게 무능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도 자족의 비결을 배웁시다.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라고 못할 것 없습니다. 바울에 비하면 우리가 훨씬 잘 삽니다. 사도 바울은 집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집이 있습니다. 바울은 힘들게 걸어다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좋은 차를 타고 다닙니다. 그는 독신(獨身)으로 살았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족(家族)이 있습니다. 그는 밤마다 힘들게 천막을 만들어 선교비용을 마련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에 비하면 우리는 부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부자로 살면서도 탄식하며 삽니까?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自足)하며 삽시다. 바울처럼 작은 것에도 크게 기뻐하며 감사(感謝)하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自足)할 수 있는 비결을 배우고 터득해야합니다. 자족(自足)의 비결, 그 놀라운 능력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예수님을 더욱 사랑합시다. 주님과 동행합시다. 
  찬미예수 263장을 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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