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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위력 (출 24:3~8, 롬 14:17~19, 막 12: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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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종화 목사

구약의 말씀: 출애굽기 24: 3 ~ 8
  모세가 내려와서, 백성에게 주의 말씀과 법규를 모두 전하니, 온 백성이 한 목소리로 주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을 지키겠다고 대답하였다. 모세는 주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산기슭에 제단을 쌓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따라 기둥 열두 개를 세웠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서 젊은이들을 보내어, 수송아지들을 잡아 주께 번제를 올리게 하고, 화목제물을 드리게 하였다. 모세는 그 피의 절반은 그릇에 담아 놓고, 나머지 절반은 제단에 뿌렸다. 그리고 그가 '언약의 책'을 들고 백성에게 낭독하니, 그들은 "주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을 받들어 지키겠다"고 말하였다. 모세는 피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뿌리며 말하였다. "보아라, 이것은 주께서 이 모든 말씀을 따라, 너희에게 세우신 언약의 피다."

서신서의 말씀: 로마서 14:17 ~ 19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그리스도를 이렇게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평화를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씁시다.

복음서의 말씀: 마가복음서 12:28 ~ 34
  율법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서, 예수께 물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밖에 다른 이는 없다고 하신 그 말씀은 옳습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와 희생제보다 더 낫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그 뒤에는 감히 예수께 더 묻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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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의 추석 명절이고, 다음주일은 우리교회의 추수감사절입니다. 추석이란 참 좋은 명절인 것 같습니다. 반가운 사람들도 만나야겠지만, 우선은 도시생활에 심신이 피곤하실 테니 휴가를 잘 조정하여서 하루 이틀이라도 푹 쉬시기 바랍니다.

경기가 침체되고 시장도 얼어붙었다고 하고, 정치 돌아가는 것도 시끄럽기만 해서 편히 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쉬시는 동안에 한 가지는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추석에 한 해 동안의 소출에 감사드리고 그리고 휴식을 취한 후에 새로운 해를 시작할 계획과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눈으로 지나온 한 해를 돌아보아야 할지, 새로이 시작되는 미래는 어떤 눈으로 내다보아야 할지가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가져야 할 눈을 오늘 제가 성서 말씀을 통해서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오늘의 복음서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유대교를 대표하는 율법학자들하고 마주서 있습니다. 첨예한 대립이 벌어지는 현장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 가운데 가장 큰 게 뭡니까?” 그러자 예수께서는 몸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계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6장에 있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예레미야서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 대답으로 논쟁은 끝났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이스라엘 역사의 총체적 결론입니다. 이 결론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단 하나입니다. 야웨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셨던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찌 보면 오히려 인간의 역사가 멸망으로만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를 보내셔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예수 이전의 역사, 곧 구약 역사를 청산하고, 자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 역사의 비전을 제시하시게 됩니다. 말하자면 예수께서는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를 제시하는 사명을 갖고 태어나신 것입니다. 지금 율법학자들과 맞닥뜨린 것도 과거의 역사를 청산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 역사의 총체적 주제가 뭡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유대교 역사의 총괄, 오늘 출애굽기 본문에서도 읽었습니다만, 모세를 통해서 받은 계명을 총괄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문제는 어떤 눈으로 그 계명을 이해하고 지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율법의 근본을 알고 있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는가 하는 점에서 예수와 율법학자들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의 경우, 유대인들은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율법을 제대로 지킨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께서 보기에는 살인의 행위만이 아니라, 미워서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가진 것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교 율법에서는 살의는 행동으로 표출되지 않는 한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 묻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셨다고도 하고 율법을 완성하셨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둘 다 맞습니다. 살인한 행위만을 문제 삼는 율법은 폐하셨습니다. 그러나 살인 행위만 아니라, 살인하고 싶은 마음까지도 금하심으로서 율법을 온전하게 하셨습니다. 복음이란 그 완성된 율법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면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어떻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인간의 역사를 볼 거냐 하는 것입니다. 과거 역사를 미움과 보복의 눈으로 보면 과거를 다 파괴해야 됩니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사랑의 눈으로 보면 건질 것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역사 청산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 전체를 청산할 때 십자가에서 하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든 부채를 혼자 끌어안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청산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스라엘 역사, 혹은 구약성서를 읽을 때에는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대의 사랑을 통해서 읽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나 개인이나 우리의 과거를 밝힐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경을 쓰고 밝혀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인 로마서에서는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 마시는 것 그런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의와 평화와 기쁨은 막연한 의와 평화 혹은 기쁨이 아닙니다. 자기희생적인 십자가 사랑을 통해 미래에 우리에게 주어질 의요, 평화요, 기쁨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은 과거도 살리고 미래도 약속합니다. 이것이 성서 말씀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일본 친일문제 등 과거사 문제를 다루고 청산을 말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살기 위한 것이지 죽이기 위한 것은 아닐 겁니다. 살리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돌아가서 과거와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제가 오늘 이런 말씀을 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세계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이나 이라크나 전 세계가 과거를 어떻게 볼 거며 미래를 어떻게 조망할 거냐는 문제로, 그 문제에 접근하는 관점의 차이로 굉장히 고통스러운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잠깐 미국 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미국은 ‘네오콘’이라고 부르는 신보수주의자들과 남부의 기독교 근본주의들이 연합하여 굉장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국제 정치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현재 미국을 움직이고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네온콘과 기독교 근본주의의 연합을 신앙의 측면에서 생각해보려는 것입니다. 미국의 기독교는 유럽보다 훨씬 더 열성적입니다. 때로는 우리나라 교회보다 더 열성적인 데가 많습니다. 제가 통계를 몇 개 살펴보았습니다만, 통계를 보면 미국에는 보수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인 교인들이 자유주의적인 교인보다 배나 많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근본주의는 미국 남부를 중심으로 큰 힘을 발휘하고 있고, 이 힘이 지금 부시정부나 미국 전체에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목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인데, 재림을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조건은 이스라엘의 건국입니다. 이스라엘은 2천 년 동안 유랑생활을 하다가 1948년에 일단 건국을 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건국된 이스라엘을 무조건 지켜내야 합니다. 네오콘이나 근본주의나 똑같습니다. 네오콘 사람들의 대부분이 유대인이란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곧 이집트 강에서 출발하여 유프라테스 강까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겠다고 하신 약속이 반드시 실현되어야 합니다. 이집트 강이면 나일 강입니다. 유프라테스 강은 현재 이라크입니다. 이집트에서 시작해서, 현재의 이스라엘 땅만 아니라, 이라크까지 유프라테스 강까지, 아브라함이 떠났던 갈대아 우르까지 다 하나님의 백성의 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조건이 이루어져야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로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현재는 성전이 파괴된 상태로 있습니다. 모든 나라는 다 그 나라의 얼과 혼이 집중된 뭔가를, 그것이 건물이든 정신이든 사상이든 무언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에서는 성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아주 아름답게 지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완성한 아름다운 성전은 BC 587년 당시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파괴되었습니다. 1차 성전 파괴입니다.

세월이 흘러 페르시아 왕국이 이스라엘을 점령한 다음에 재건의 기회를 주어서 이스라엘은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 역시 파괴되었습니다. 예수 당시에 엄청난 세력을 과시하던 로마제국이 서기 70년에 제2의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예루살렘 성전은 없습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언제 재림하신다고 믿느냐 하면, 제3의 성전이 완성될 때 재림하신다고 믿습니다. 제3의 성전을 어떻게 재건합니까?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려고 하면, 현재 있는 회교 사원 모스크를 부수고 그 자리에 다시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이 말이 갖는 뜻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팔레스타인과 유대 땅으로 갈라져 있는 그곳에서, 팔레스타인 땅이라고 하는 예루살렘 가운데에 있는 회교 모스크를 파괴하고 거기에 다시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는 날, 그날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천년 왕국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해야 됩니까? 이건 제가 소설 쓰듯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황당무계한 것 같으나, 현재 미국의 정치, 군사, 안보, 경제, 이 모든 것에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가진 신념입니다. 최근에 이런 세력의 중심이라고 하는 남장로교가 선교단체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그 단체는 이라크 선교를 위한 단체인데, 이슬람이 국교인 이라크를 완전히 기독교화 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아랍권 전체를 예수 믿는 국가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장로교가 이라크 복음화 선교에 나선 것입니다. 무엇이 필요할 것 같습니까? 이라크 전쟁?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 수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이런 국제적 갈등과 전쟁의 원인 중에는 정치, 경제, 군사적인 측면만 아니라, 근본주의적 신앙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년왕국이 예수께서 재림하신 다음에야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노력해서 천년왕국을 이루어 나가야 하고, 천년왕국이 다 완성될 때쯤에 예수께서 재림해서 하나님나라가 임하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미국 기독교인들의 신념입니다. 한국에서도 상영된 아마겟돈이라는 영화가 있죠? 세계의 종말을 놓고 벌어지는 전쟁영화입니다만, 아마겟돈 전쟁이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것인데, 마지막 사탄과의 대결, 최후 최고의 전쟁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최소한 7년 전에 아마겟돈 전쟁, 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탄과의 마지막 전쟁이 시작된다. 여기서 이겨야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천년왕국이 이뤄진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고 역량을 비축해야 한다.’ 이렇게 믿는 사람이, 그러니까 아마겟돈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통계를 보면 미국 기독교인의 59 %에 달합니다. 통계가 맞고 안 맞고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것이 오늘의 정치, 역사, 경제의 현실이라는 점, 이것이 미국의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크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예수께서 오늘 오실 겁니다. 그리고 물으실 겁니다. “그대들이 아마겟돈 전쟁설을 믿든지 선천년설을 믿든지 후천년설을 믿든지 간에 상관없이 한 가지를 대답하라. 그대들이 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세 가지 조건을 달았는데, 그대들이 만든 이 조건은 낡은 율법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내가 스스로 죽은 십자가의 헌신적 사랑에서 나온 것인가? 사랑 때문에 예루살렘에 제3의 성전을 지으려고 하는 것인가? 이집트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까지 땅을 사랑으로 덮겠다는 것인가? 이스라엘을 건국이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인가?”

사람으로 사람을 살리는 것, 사랑으로 인류를 살리는 것이 아닐 때, 아무리 좋은 이름을 달아도 예수께서는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미래는 좋아야 되고 미래는 복된 것이어야 됩니다. 허황된 미래 말고 십자가에서 잉태된 부활의 미래, 여러분 이것을 다시 한번 꿈꾸셔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정치적 동기나 역사적 해석이나 경제적 이익 추구나 사회적 갈등이나 모든 면에서 해답이 없어서 우왕좌왕하고 이렇게 시끄럽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갈등이 있을 때마다 충돌이 있을 때마다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공감대 하나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적 사랑이라는 안경을 가지고 좌도 보고 우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아마겟돈 전쟁도 그 눈으로 보게 하십시다. 우리한테 임할 하나님의 나라, 복된 그 나라가 어떤 모양으로 올지도 십자가 사랑의 눈으로 보게 하십시다. 이것이 신앙의 태도 아닙니까?

이 눈으로 보면 보복, 정복, 살육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세상, 하나님이 창조하신 멋있는 세상을 보게 되지 않겠습니까? 사랑의 눈으로 보면 과거 역사에는 건질 것도 많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미래의 역사는 허황한 것이 아니라 현재 고난 속에서 꽃피어나는 인동초 같은 것이 됩니다. 확실한 희망이 됩니다. 우리는 무한한 환상을 가지고 미래를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잉태된 부활의 미래를 찾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진정한 복입니다.

이번 추석에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의 사랑의 눈으로, 자기의 삶을 한번 성찰해보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에서 무얼 건질 수 있는지, 십자가에서 잉태된 부활의 희망이 나한테 있는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런 성찰을 세계의 모든 지도자들이 한번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지도자들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추석에 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런데 그 사랑은 십자가라 이름하는 헌신적 사건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강령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역사를 보는 평가기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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