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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라는 것 (히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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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기도원. 어디로 갈까?
조용한 곳에 가서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진주 부근에는 금원산이나 지리산 휴양림도 좋을 거라는 추천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책도 읽지만 기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진주 근교에는 갈만한 기도원이 없는 겁니다. 거창이랑, 함양, 합천 목회자들한테 물어 보아도 고개만 갸우뚱 할 뿐입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찾은 곳이 경기도 양평 쪽 입니다.

주일 날. 어느 집사님이 “어느 기도원 가세요?” 그 물음에 제 대답이 “글쎄요.” 아마 그 집사님은 이상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기도원 간다는 분이 어디 갈 곳도 안 정했으니 말입니다.
월요일에 대구에 있는 배목사님께 전화했더니, 대구 주암산 수양관을 소개해 주는 겁니다. 1954년에 설립된 기도의 동산입니다. 낮에도 엄청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서 산에서 기도하는 겁니다. 밤에도 사람들이 올라와서 밤새도록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겁니다. 월요일 저녁부터 목요일 저녁까지 의정부 열방순복음교회 이승우목사님이 강사로 오셔서 집회를 가졌습니다. 새벽과 저녁에는 참석하고 낮에는 책을 읽었는데, 월요일 저녁, 민수기 14장의 말씀으로 설교했습니다. 다 아는 이야기이고, 부흥사답지 않은 안변이라 그냥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래도 졸지 않고, 눈 똥그랗게 뜨고 내내 강사 얼굴을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설교 마치고 통성기도 했습니다.
사실 연말이 되면 목회자들의 마음은 금년 한 해 동안 얼마나 부흥했는가를 생각합니다. 물론 부흥이란, 외적인 것도 있고, 내적인 것도 있어서 분명한 결정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금년, 생각만큼 숫자가 늘지 않았습니다. 그게 다가 아닌 줄 알지만 어떻든 양적인 성장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이었습니다.
그 답답함에 기도조차 못하고 엎드렸는데, 갑자기 제 가슴을 울리고 머리 속에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거 잊었느냐?”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약속한거라니요?”
“진주시민의 십분의 일!”
그 순간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겁니다. “감사 합니다”만 반복하다가, 깨달음이 있어 회개 했습니다.
왜 교회가 여기 있는가? 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나? 왜 나는 여기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그런 질문을 수도 없이 했었고, 그래서 함께 기도 했던 것이,
“진주시민의 10분의 일을 우리 손에 붙이시옵소서!”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이 두 가지였습니다.
여기, “진주시민의 10분의 일”은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사명이고.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은 그렇게 영향력을 끼치는 그리스도인을 양육하겠다는 교육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놓치고 있었던 겁니다. 왜? 무엇을? 이라는 사명과 목적을 놓치고 있었던 겁니다.
“진주시민의 10분의1”
전 그것이 제가 생각해낸 그리고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내 바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바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었고, 그것은 저와 이 교회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소원을 우리 안에 넣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소원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그 일에 쓰임이 되게 하시고, 끝내 이루시는 분이심을 잊었던 겁니다.
그동안 여러분에게는 “꿈을 가지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고 설교 했는데, 정작 제 자신은 그 꿈을 놓치고 있었던 겁니다. 정작 제 자신은 그 약속을 잊고 있었던 겁니다.

분명히,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고 하셨는데, 그 바라는 것을 놓쳐버린 겁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십시오. 바라는 것을 놓쳐 버렸는데, 그래서 바라는 것이 없는데, 이루어질 것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출애굽기 3장 10절,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하겠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그 사명에 따라 모세는 바로에게 가야 합니다. 그리고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야 합니다.  그런데,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출애굽기 3장 7-8절,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 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이집트 사람의 손아귀에서 그들을 구하여, 이 땅으로부터 저 아름답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사람과 헷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이 사는 곳으로 데려 가려고 한다.” 이것이 비전입니다. 이 비전을 이루시기 위해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신명기 8장 7-8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데리고 가시는 땅은 좋은 땅 입니다.
골짜기와 산에서 지하수가 흐르고 샘물이 나고, 시냇물이 흐르는 땅이며, 밀과 보리가 자라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나는 땅이며, 올리브기름과 꿀이 생산되는 땅이며, 먹을 것이 모자라지 않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돌에서는 쇠를 얻고 산에서는 구리를 캘 수 있는 땅입니다.” 이것이 비전입니다. 이 비전의 땅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려고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모세가 왜 바로 앞에 갑니까? 이 비전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 비전을 그림으로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망쳐 나왔던 이집트, 그 바로 앞에 선 겁니다.
모세는 이 비전을 그림으로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광야 40년의 힘들고 어려운 때를 이겨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교회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의 꿈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행복한 교회, 행복한 가정, 행복한 사회” 이것이 우리의 비전이며 우리의 꿈입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 교회에서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와주고 먼저 헌신하고 희생하며 행복한 믿음의 삶을 사는 겁니다.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도 호감을 사서 주님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는 그런 교회를 꿈꾸며 그려보는 겁니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겁니다. 그래서 그 가정이 행복한 겁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계 3:20)
그렇게 주님께서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삶에 함께 계셔서, 여러분과 더불어 먹고, 여러분과 더불어 사시는 겁니다. 여러분이 듣고 따르는 그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분 가정의 반석이 되셔서,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무너지기는커녕, 오히려 여러분을 튼튼히 지키는 울타리가 되어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을 꿈꾸며 그려 보는 겁니다.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 말씀 따라 삶으로 모든 복이 찾아와서 온통 복 있는 삶을 사는 그런 가정을 꿈꾸며 그림으로 그려보는 겁니다.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그런 성도, 그런 가정을 꿈꾸며 그런 삶을 그림으로 그려보는 겁니다.
좀 더 넓게 이 사회가 예수님과 함께 행복한 사회가 되는 것을 꿈꾸는 겁니다.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이 한데 어우러지는 사회,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이 한데 어우러지는 사회, 건강한 사람과 건강치 못한 사람이 한데 어우러지는 사회, 그런 사회를 꿈꾸며 그림으로 그려보는 겁니다.
이런 꿈을 가지고 전도의 사명을 감당하는 겁니다.
이런 꿈을 가지고 말씀과 교육으로 내가 변하고, 가정이 변하여,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겁니다.
마치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하나님의 백성이 그 약속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꿈꾸며, 당당하게 바로 앞에 서서 하나님의 백성의 해방을 외쳤던 모세 같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이 비전 이 꿈을 우리 함께 그려 보십시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진주 시민의 10분의 일을 우리 손에 붙이시옵소서.” 기도하며 전도 하십시다.
“나로 하여금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 되게 하소서.” 기도하며 자신의 성숙을 위하여 훈련 하십시다.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런 사명 이런 비전은 교회에만 주신 것 아닙니다. 여러분 각자에게도 하나님께서 이런 사명과 비전을 주신 줄 믿으십시오. 여러분에게도 바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 이름으로 구하라고,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라는 것이 없으니, 구할 것도 없고, 그러니 응답도 없는 겁니다.
바라는 것이 없으니, 사명도 없고, 비전도 꿈도 없는 겁니다.
이런 사람을 상상해 봅니다. 아내와 다툰 남편 홧김에 집을 나와 차를 몰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갈 곳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그냥 동네를 뱅뱅 도는 겁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된 땅이 없다면 뭐 하러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백성을 해방시키라고 말하겠습니까? 또 그렇게 해서, “해방 시켜 줄 테니 가라”고 한들 어떻게, 어디로 가겠습니까?
교회는 꿈을 파는 곳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꿈을 파는 꿈 장사입니다.
꿈의 사람들이 곧 성령의 사람은 아니지만, 성령의 사람은 모두 꿈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말세에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을 부어주게 될 것인데, 그렇게 성령이 오시면 이 땅의 사람들이 환상을 보고 꿈을 꾸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인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고난 속에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인생을 아무렇게나 살지 않습니다.
마틴 루터 킹목사.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백인 친구들과 놀지 못하고 왕따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인생을 아무렇게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워싱턴 대행진에서 그는 그 유명한 "I have a dream"이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나는 오늘 나의 친구 되는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어렵고 좌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국인의 꿈에 깊이 뿌리박힌 또 하나의 꿈입니다. 때가 오면 어느 날 이 나라가 일어서서, ‘우리는 이러한 진리가 자명한 것을 믿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독립선언문에 있는 선조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는 날이 오리라는 꿈이 내게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흑인 소년소녀가 백인 소년소녀와 손을 잡고 형제와 자매로서 같이 지내는 날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의 소중한 4남매가 피부 색깔이 아니라, 그들의 소중한 인격에 따라서 평가 받는 아름다운 나라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그의 생명, 그의 생애를 걸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플로리다 주에 디즈니 월드를 만든 월터 디즈니는, 디즈니 월드가 완공되기 전에 사망했습니다. 완공식 때 많은 사람들이 월터가 이 위대한 디즈니 월드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디즈니 스튜디오 책임자인 마이크 벤스씨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분은 이미 비전으로 이 위대한 시설을 보았다. 그러기에 오늘날 디즈니 월드가 실재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께서 오늘날 자기의 백성들을 위해 그려 놓으신 그림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하여 이루실 수 있는 일을 미리 사진으로 찍어 지갑에 넣어 다니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환경을 탓하지도 않습니다. 인생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인생을 아무렇게 살지도 않습니다.
이들은 주님을 위한 기회만 바라봅니다.
이들은 아무리 바빠도 자나 깨나 미래에 대한 꿈을 키웁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 속에 그려 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바라는 것도 없습니다. 비전이 없습니다. 꿈이 없습니다.
노아가 산꼭대기에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대로 홍수가 나는 것을 보았던 겁니다.
아브라함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길을 떠났습니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기에, 그 땅에서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이 행복하게 사는 꿈을 꾸었기에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겁니다.
이 믿음이 사람들에게는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그것이 그들이 바라는 것이 되었던 겁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었고, 바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 “나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광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채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마태복음 7장 9절,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락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이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비전이 있습니다. 꿈이 있습니다. 이 믿음이 크면 비전도 큽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방해도 있었고, 음모도 있었고, 그래서 공사를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원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일을 완성 할 수 있었던 것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이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느헤미야 2장 12절에 “하나님이 나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예루살렘에서 일하도록 하신 것을 나는 그 때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움직여서 예루살렘에서 일하도록 하신 것”
예루살렘 성벽 재건은 느헤미야 개인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원이었고, 하나님은 그 소원을 느헤미야 속에 넣으셔서 그 일을 완성케 하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쁜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소원을 두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이 소원 이 버전에 볼타는 소망이 넘치는 열정을 가지게 됩니다. 그 소원, 그 비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소원, 그 비전은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신다는 사실을 확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이 하나님의 비전을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을 세우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본문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합니다.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진 것이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5장 21-28절에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여인은 귀신들린 딸로 인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예수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하고 외쳐도 예수님은 한 마디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곁에 있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하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간청합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예수께서 또 대답하십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여인이 말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제서야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뭐라고 하신 것 같습니까?
“여자야,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말씀, “여자야,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여인에게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 소원은 딸 건강하게 되는 겁니다. 그 여인은 딸이 건강하여 뛰노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라면 그 꿈을 이루어 주실 분임을 믿게 되었고, 몇 번이나 거절당하고, 심지어 모욕까지 당해도 오히려 예수님께 무릎 꿇고 간청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비전이 없습니다. 꿈이 없습니다. 소원이 없습니다. 기껏 있어봐야 먹고 입고 그렇게 사는 겁니다.
그러나 믿음이 큰 사람은 비전도 큽니다. 꿈도 큽니다. 소원도 큽니다.

요나서를 읽으면 뭔가 찜찜한 게 있습니다.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는 겁니다. 그것도 통째로 말입니다. 그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살았다니 과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싶으면서도 그냥 넘어가는 겁니다.
‘스카불’이라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방에 뛰어 들어오면서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아빠!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통째로 들어갔다고 그러잖아요. 아빠는 이 사실을 믿으세요?”
“그럼”
“아빠! 그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어요?”
“큰 물고기는 누가 만들었을까?”
“하나님이 만드셨지요.”
“요나는 누가 만드셨을까?”
“하나님이 만드셨지요.”
“사랑하는 아들아, 그렇다면 하나님이 만든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아빠는 믿을 수 있단다. 아니, 반대로 요나가 큰 물고기를 삼켰다 해도 아빠는 믿을 거란다.”
이게 믿음이고요. 이런 믿음이라면 무슨 꿈인들 못 꾸겠습니까?
가나안 여인의 믿음과 소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귀신들린 내 딸을 고치실 수 있어” 이것이 믿음이었고. 그래서 “내 딸을 고쳐 주세요.”하는 소원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 믿음과 소원이 있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 안 하셨다고 그냥 돌아서지 않습니다.
“나는 이방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보냄 받았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자기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이방인이지만 그냥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모욕적인 말씀을 하셔도 그냥 물러나지 않습니다.
믿음과 소원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예수 앞에 나아갑니다.

인생에서 무서운 것이 뭔지 아십니까?
실패 그 자체가 아닙니다. “나는 틀렸다. 나는 다시는 일어 날 수 없어”라는 패배감과 좌절감에 사로잡히는 것이 무섭습니다.

아프리카 밀립에서 최고의 맹수는 사자입니다. 그러나 이 사자도 코끼리 곁에는 함부로 가지 못 합니다. 코끼리가 휘둘러 대는 코에 맞았다가는 10-20m 밖으로 내동댕이쳐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코끼리가 어린아이 손에 이끌려서 재주를 부리는 서커스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코끼리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훈련시켰기 때문인데 그 훈련은 이렇답니다.
어린 코끼리를 강한 쇠말뚝에 묶어 둡니다. 끊어지지 않는 철사로 꽁꽁 묶어두면 어린 코끼리가 몸부림을 칩니다. 목에 피가 납니다. 그래도 쇠말뚝을 뽑거나 철사를 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1. 2년이 지나는 사이에 코끼리는 실패감과 좌절감에 젖어들게 됩니다.
“저 말뚝은 절대로 뽑을 수 없다 게다가 이 사슬도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이때 쯤 되면 쇠사슬 대신 노끈 하나를 묶어두고 쇠말뚝에 적당히 걸쳐만 놓아도 코끼리는 가만히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만 줄을 당겨도 끌려온다고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좌절하지 않습니다.
비전이 있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믿음과 비전이 있는 사람은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같은 병실에 두 사람의 환자가 있었습니다. 안쪽 침대에 있는 사람은 조용해서 묵상하기가 좋고 안정이 되어 좋다고 말했고, 창가의 환자는 산만하여 혼란스럽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침대를 바꿔 주었습니다. 안쪽으로 옮긴 환자는 이번에는 보이는 게 하얀 벽뿐이니 우울증에 시달렸고 미치겠다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러나 창가로 옮긴 환자는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며 자신의 건강을 꿈꾸었고, 부지런히 돌아가는 세상을 보며 이 세상 한쪽에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무한 감사 하였습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있는 자리, 위치,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불평하다보면 불평도 체질화 됩니다. 그래서 만사가 다 귀찮아지는 겁니다.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하면 기뻐하는 삶이 내 앞에 펼쳐질 수 있습니다. 삶의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감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스펜서 존슨이 쓴 “누가 내 치즈를 옮겼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두 마리의 생쥐와 두 명의 꼬마 인간이 행복의 치즈를 찾아 여행을 떠납니다. 천신만고 끝에 치즈 창고를 발견합니다. 마냥 신난 겁니다. 행복해 했습니다. 그런 사이에 치즈는 말라 갑니다. 상해갑니다. 평생 행복의 치즈와 함께 살 줄 알았는데 치즈가 다 상하고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두 마리의 생쥐는 다음 치즈를 향하여 새로운 도전을 합니다.
한 꼬마인간도 며칠 동안 고민하고 실의에 빠져있는 듯 하다가 다시 치즈를 찾아보기로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쉽지 않았습니다. 넘어지고, 때로는 피를 흘렸으며, 때로는 고독 가운데 울어야 했습니다. 이게 치즈 창고인가 보다 하고 기쁨에 뛰어 들어가 보면 별거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도전하고 또 도전하여 커다란 치즈 창고를 발견합니다.
나머지 한 꼬마는 빈 창고에 웅크리고 앉아 넋두리를 늘어놓습니다.
“행복의 치즈는 어디를 갔을까?”하며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누가 내 치즈를 훔쳐 갔을까?” 하며 두리번 거리가 시작합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 난 최선을 다했는데.” 하며 허탈감과 좌절감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새 치즈를 찾아 떠나서 마침내 치즈 창고를 발견한 꼬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없앤다면 성공의 길은 반드시 당신 앞에 열리게 될 것입니다. 치즈 냄새를 부지런히 맡다보면 치즈가 상해가고 있음을 빨리 느낄 수 있습니다. 새로운 치즈를 마음속에 그리며, 영상을 그리며 살아가면 행복의 치즈를 향하여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사라져 버린 치즈에 대한 미련을 빨리 떨쳐 버릴수록 새 치즈를 향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실패의 창고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것은 무익 합니다. 과거의 방식은 우리를 새 치즈 곁으로 인도하지 못 합니다. 환경과 함께 자신도 변해야 합니다. 세상과 함께 당신도 변해가야 승리 할 수 있습니다. 그 변화를 차라리 즐기십시오. 그리고 도전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 비전이 있습니다. 꿈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행복한 교회를 그려 봅니다.
예수님과 함께 행복한 가정들을 그려 봅니다.
예구님과 행복한 사회를 그려 봅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복음을 전합니다. 진주시민의 십분의 일, 그리고 나아가 세계 선교를 감당함 사명을 가집니다. 그리고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고 훈련하여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 되기를 소원 합니다.
성도들 가운데, 진주와 서부경남의 행정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랑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도들 가운데, 진주와 서부 경남의 경제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도들 가운데, 진주와 서부 경남의 문화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도들 가운데, 진주와 서부 경남의 교육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가까이, 이웃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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