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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선물 : 자녀 (시 1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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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근두 목사

구주 대망 2004년 마지막 주일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제 우리는 성탄감사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물, 예수님#을 살폈습니다.

ꡒ생사 간 유일한 위로가 무엇이뇨?ꡓ라는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 제1문에 대한 답은 ꡒ생사 간 유일한 위로는 우리의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ꡓ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선물 그리스도를 먼저 살핀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또 다른 소중한 선물인 자녀에 대해서 살피려고 합니다. 그것은 내년도 우리 교회 목표가 교육을 통해ꡒ밝은 미래를 열어가는 해ꡓ이고, 그 구체적인 표현으로 오늘 오후 3시부터 부모님과 함께 하는 청소년 예배를 처음 시작하는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구주 대망 2004년 한 해를 보내면서 여러분이 한 일 가운데 어떤 일이 가장 값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한 평생을 보내면서 어떤 일이 부모로서 가장 큰 상급을 받을 만한 일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합니까?

그것은 우리 자녀들이 지혜와 키가 자라갈 때에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칭찬 받는 자녀들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감사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잘 섬기는 자녀로 양육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상급을 받는 사역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27편은 그것을 집을 세우는 일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우는 집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인 자식을 어떻게 키우느냐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집을 세우는 일이나 성을 지키는 일이나 아침부터 늦도록 수고하여 살아가는 일, 모두에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벽돌과 나무로 짓는 집을 그럴듯하게 세우는 일은 자식 농사에 비하면 쉬운 일입니다. 돈 있고 시간 넉넉하고 좋은 건축가에게 맡기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을 바로 양육하는 것은 돈 있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좋은 과외선생에게 맡긴다고 보장되는 일도 아닙니다.

자녀를 바르게 키우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중요한 일인지 우리 시대 사람들은 망각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아니, 자녀의 공부를 위해서 무조건 부모가 희생을 하면 교육을 잘 시키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철도 없이 기러기 아빠, 엄마가 양산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없이 기러기 떼가 이동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돈만 많이 쓰면 좋은 교육을 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특히 남에게 돈을 주고 맡기면, 그것도 더 많은 돈을 주고 맡길수록 더 좋은 교육이 이루어질 줄로 착각하지 말아야합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내모는 이유는 집에 있으면 자기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에게 뒤지는 것 같고 자기가 가르치는 것은 뭔가 부족하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에 대한 최고의 교육의 장은 가정이요, 최고의 선생은 부모라는 유대인들의 오랜 경험적 교훈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늘 시간만 있으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데 어떻게 자녀에게 영재교육을 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아이들은 학원으로 내몰고 엄마는 계모임에 바빠서 돌아다니면 아이들은 그들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교사와 학습의 장을 동시에 잃고 맙니다.

하나님의 선물, 자녀 어떻게 키워야 할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주신 소중한 선물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신앙의 시인의 지혜를 들어봅시다. 동서고금 모든 인생 가운데서 가장 지혜로운 임금으로 인정받는 솔로몬의 충고에 귀를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1. 먼저 자녀를 위한 여러분의 모든 생각과 노력에 하나님을 두시기 바랍니다. 시인의 말을 직접 들어봅시다.

ꡒ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 도다.ꡓ(1-2절)

어떤 말을 반복해서 강조합니까? 헛되다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임금 솔로몬은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개입하지 아니하시는 곳은 그 어떤 현장이든지 헛되다고 강조합니다.

1.1 거기가 어디입니까? 집을 세우는 현장입니다. 사실 솔로몬은 수많은 집을 지었던 왕입니다. 호화로운 왕궁뿐 아니라 아버지 다윗이 소원하던 성전까지 세운 임금입니다. 우리 중 누구보다 건축에 대해서 많이 아는 사람으로서 고백합니다. ꡒ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ꡓ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수고해야 합니다. 특히 좋은 건물을 세우려면 더욱 수고해야 합니다. 시간과 수고가 들어가야 제대로 된 건물을 세울 수 있습니다. 온갖 지혜와 힘을 발휘해야 아름다운 작품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그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애써 집을 세워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초토화되고 맙니다. 솔로몬은 새로운 도시를 세우는 일에도 일가견을 가진 임금이지만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던 성곽과 그 안의 집들이 한 줌의 재가 되는 현장도 수 없이 목격한 임금입니다.

야심에 찬 사람들이 세웠던 엄청난 건물들이 형체도 없이 허물어지고 마는 현장을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헛된 지를 깨달은 임금입니다. 여호와께서 대 건축자가 되어 주시 않으면 우리 손에 들린 삽과 망치, 톱과 대패는 헛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1.2 또 다른 영역에 대해서도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거기가 어디입니까? 수많은 집들로 가득한 성을 지키는 현장입니다. 성벽을 높이 건축하고 보초들을 세워서 계속 파수를 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면 함락될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파수꾼이 잠자지 않고 깨어서 지켜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성은 어이없이 적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파수꾼이 깨어서 그 의무에 충실해도 하나님이 전능자 하나님이 지켜주지 아니하면 헛되다고 말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오늘 시편은 그러므로 집을 세우는 노력이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깨어서 성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질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뢰하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주의하셔야 합니다.

믿음의 용장 크롬웰은 부하들을 이렇게 격려를 했습니다. ꡒ하나님을 신뢰하고 화약은 마르게 해 두라ꡓ마른 화약만으로는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신뢰한다고 화약을 젖은 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공부를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공부만 한다고 내일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공부도 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뿌린 대로 내일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눈물로 씨를 뿌릴 때에 기쁨으로 거두리라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엿새 동안 열심히 여러분의 모든 일을 하십시오. 사람은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집도 세울 수 있고 성곽도 높이 올릴 수 있고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아무 것도 달성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부지런히 손을 놀린다고 깨어 있다고 해서 뭔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ꡒ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ꡓ

1.3 다만 집을 짓고 성을 지키는 현장만 아닙니다. 삶의 모든 영역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고백합니다. ꡒ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ꡓ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부지런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부지런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들은 여기에서 나그네와 행인으로 생각했지만 이 세상을 살면서 그들은 성실하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의 부지런함에 복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명합니다. ꡒ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ꡓ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지런함만 믿는다면 그 모든 수고는 헛될 것입니다. 자신의 깨어 있는 시간이 성공과 비례한다고 믿는다면 그 결과는 참담할 것입니다. 이런 말들을 하지 않습니까? ꡒ네 시간 자면 합격하고 다섯 시간 자면 떨어진다.ꡓ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식적이지도 않고 신앙적이지도 않습니다.

어떤 녀석은 다섯 시간만 자도 거뜬히 하루를 버팁니다. 그런데 저도 아들을 키워 보았지만 어떤 녀석은 하루 8시간을 자면서도 늘 9시간 자야 된다고 한 시간 못 잤다고 투덜댑니다. 타고난 생태적인 차이를 일률적으로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충분히 잠자는 것이 필요합니다. 필요한 휴식을 취하지 않고 설친다고 능률이 오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이면 해가 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밝을 때 일하고 밤이 오면 쉬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그렇게 합니다. 물론 밤중에 사냥하는 놈들은 대낮에 자지만, 그래도 밤낮 근심하며 자신을 들볶는 사람보다 잘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사람은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활동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자연이 요구하고 신체가 감당할 정도를 넘어서서는 능률이 오르지 않습니다. 달리 말해 자연 질서를 무시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이 종처럼 일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무서운 주인에게 혹사당하듯이 그렇게 활동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work holic 이 되어서 일 중독자로서 조금 천천히 가는 것을 허용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쉬는 것을 봐주지 못하는 그런 인생을 살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 백성들이 왕자처럼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평안한 삶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필요한 휴식이나 휴가도 거부하고 볼품없는 음식으로 연명하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적당한 음식을 먹고살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이 건강에 좋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신자는 결코 게으르거나 사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혹사시키거나 그렇게 해야 신앙 좋은 사람이고 헌신하는 것이라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는 시인의 고백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ꡒ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ꡓ

이어지는 지혜자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ꡒ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 도다.ꡓ 언제? 밤에 그 말입니다 지금 잠을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 생각을 좀 읽어야 됩니다. 그렇지요? 너무 글자에 매이면 지금 예배시간에 자면서 역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구나 하고 착각하면 안됩니다. 성경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하나님이 잠을 사랑하시는 자에게 밤에 평안히 자도록 해 준다 그런 말입니다. 12시 대낮에 예배드리러 와서 졸고 있으면 그것은 조금 문제가 있거든요 그렇지요? 어떤 분은 끝까지 우기지만 “아버지 집에 가니까 마음이 편해 좋더라”  하지만 잠은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 우리의 궁핍한 모든 것을 순간적이나마 잊게 합니다. 조용히 이런 잠은, 사실 때로는 돈보다 명예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소란한 바다 한 가운데서도 주무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의 손안에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큰 물결에 흔들리면서도 편히 쉬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소유한다면 그 많은 불면의 밤을 지새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나아가서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은 근심 걱정에서 건짐을 받고 주님의 품에서 달콤한 휴식을 취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조용히 바쁜 일에서 물러나서 하나님과 더불어 안식을 얻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쉬게 하시고 쉬는 동안에도 그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자고 있는 동안에도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들을 위해서 일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위하여 밤낮 쉬지 않으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까?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여러분을 위하여, 여러분의 소중한 자녀들을 위하여 역사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여러분은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서 쉴 때는 쉬고 일할 때는 일하도록 해야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주일 하루는 쉬게 하고 엿새 동안에는 열심히 공부하도록 그렇게 지도하여야 그것이 옳습니다. 여러분도 물론 그렇게 사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고 저는 개인적으로 말을 못해보았지만 어떤 분들을 보면 8시 예배가 마치 참석하고 가면 주일날 가게 문을 열어도 되는 면허증을 주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안됐어요 보면, 그렇게 열심히 해서 번다고 벌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하루쯤은 쉬면서 살아가는 특권을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주셨습니다.

그 특권을 행사하면서 사는것이 복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인데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렇게 주일까지 쉬지 못하고 아등바등 대면 제가 옆에서 보기에 너무나 딱하지 않습니까? 물론 사람들 중에서 먹고살기 힘들어 주일에 일하는 사람이 없지 않아 있겠지요. 정말 그분을 쉬게 하기 위해서는 함께 굶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하나님 법도에 따라 살면 주일 없이 정신없이 애쓰는 사람들 보다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서 살아가는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께서는 복 주실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설교를 들으면서도 제가하는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잘못된 논리를 펼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 그래도 주일날 학원간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갔던데요” 예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을 지키지 않고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의 자녀들을 말씀을 벗어나서 지도할 권리를 부여한 것은 아닙니다. 주일날 학원에 보내도 좋은 대학만 들어가더라는 논리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도록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소위 좋은 대학에 들어간 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들이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살펴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어떤 자리에 있는지도 눈여겨 보십시오. 

대학을 간 다음부터 더 이상 부모의 권고를 듣지 아니하고, 결국 신앙이 없는 사람을 만나 쉬쉬하며 불신결혼을 시키고, 그 자녀 때문에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 여러분 주위에는 없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착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수긍하시고 진리를 따르기로 결단하십시오. 아직도 자녀들이 여러분의 품을 벗어나지 아니하고 여러분과 함께 먹고 자고 할 때에 진리로 바로 인도해야 됩니다.

그들을 향하여 축복하고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고 그들의 내일을 바라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낮에도 일하시고 밤에도 쉬지 아니하십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틀림없이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살필 점이 있습니다. 2. 우리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ꡒ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ꡓ여러분의 자녀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선물이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양육해야 합니다. 잠깐 우리에게 맡겼는데 맡아있는 동안에 주인의 뜻에 따라서 관리를 잘해야 될 책임이 부모에게 있습니다.

옛말에도 ꡒ농사 중 으뜸이 자식 농사ꡓ라고 한 것을 보면 제일 어렵고 힘든 농사인 동시에 제일 보람되고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솔로몬 왕은 집을 세우는 또 하나의 측면으로서 자식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땅에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우리가 믿는 신앙을 전수하고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세워 가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도록 하는 것, 그렇게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 또 다른 의미에서 집을 짓는 일입니다. 재산을 많이 축적하거나 근사한 집을 짓고 살아도 후손이 없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제대로 양육 받을 자녀가 없으면 넓은 땅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커다란 집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자식은 분명 여호와께서 주시는 기업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이 없는 부자는 재산의 반이라도 내어놓고 자식하나 얻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태의 열매는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임이 분명합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이런 진리를 읽고 들었으면서도 지난 수십 년간 대한민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정부의 선전에 놀아난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ꡒ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ꡓ그러면 덥석 둘만 낳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한번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청종하지 않았던 죄의식조차도 없습니다. 그건 나라망치는 짓이고 하나님에게서 칭찬 받을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도 야만인취급을 당하면서 셋 씩 낳아서 키운 부모들은 마땅히 칭송을 받아야 합니다.

어제 2부 예배에 세례를 베푼 아이도 세 번째 아이이고 주보에 실려있는 어떤 강도사님 집의 아이도 세 번째 아이입니다. 우리 울산교회는 셋은 기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자녀를 형벌이나 짐으로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녀를 상으로 주셨습니다. 신앙인은 이 사실을 바로 알고 자식을 교육하면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 될 것입니다.

사회가 건전할 때는 자식을 방해물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식을 낳게 된 것을 실수를 저지른 것으로 후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보낸 귀한 선물이 예상치 않게 왔구나’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목사님 몰라서 그렇지 요새는 아이 키우기가 얼마나 돈이 많이 드는데 그랍니까?’ 그럴지 모릅니다. 엄마가 저 키울 때하고 비교해 보면 돈이 많이 드는 것은 맞네요. 그렇지요?

그러나 돈을 많이 들이니까 많이 드는 겁니다. 학원에 안 보내고 과외를 안 시키면 돈은 많이 안 듭니다. 그러고 자식이 없으면 그러면 둘 대신 하나만 있으면 고생이 반으로 줄어듭니까? 자식이 하나도 없으면 세상 살면서 고생을 안 합니까? 그들도 마찬가지로 다른 영역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나 어려움을 겪게 되어 있어요. 여기가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왕 겪는 어려움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서 겪는다면 그것은 자랑스런 부모일 것입니다. 자녀들을 키우다 보면 그들로 인해서 우리는 자주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장차 그 자녀들로 인해서 크게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ꡒ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에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 되도다ꡓ(4,5절) 특히 부모가 젊은 시절에 태어난 자녀는 하나님의 복 주심에 따라서 부모의 노년에 위로가 됩니다. 잘 양육 받은 자녀는 아버지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신속히 날아가는 화살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가 아직 어릴 때 바르게 양육해야 합니다.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화살이란 살이 반듯해야 쓸모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의 마음이 비뚤어지고 쓸모없이 되지 않도록 자녀를 똑바로 반듯하게 키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청소년의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반듯한 화살처럼 만들어야 가야할 시기입니다. 반듯하게 자란 자녀라야 부모의 노년에 자랑이 됩니다.

결코 자녀들을 내 개인의 소유물처럼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살아주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자녀들은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키워야 합니다. 저는 별로 공부한 것도 없이 장가를 가서보니 아이들이 태어나니까 예비학습도 없었는데 아버지가 되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두 아이가 있는데 큰애는 순종적이어서 그 아이의 아빠노릇 하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이 기쁨만 누리면 되었지요. 그런데 둘째는 태어날 때부터 반체제 인사로 태어난 것 같아요. 그래서 이야기를 하면 듣는 법이 없어요.

‘사과를 먹을래 배를 먹을래’ 그러면 ‘바나나 먹을래’ 그랍니다. 내 기억에는 적어도 내가 제시했던 양자택일 중에서 하나도 받아들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언제나 제삼의 자기 안을 들고 나옵니다. 처음에는 정말 어이가 없었어요. 책을 읽으면서 피가 역류하는 것 같다. 이런 표현은 문학적인 표현인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조그만 애가 아비를 몰라보고 달려드는데 이성을 잃게 되더라고요.

가만히 정신을 차려보니까 내가 잘못하고 있어요. 아들이 내가 아닌 이상 자기의 의견이 있을 게 아닙니까? 자기 의견이 있어서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것이고 그것을 내가 아비라는 타이틀로 누르려고 하니까 화가 나게 되고 되는 게 없는 겁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들이 나이가 들었는데 아버지 눈치만 살피고 아버지 시키는 데로만 하려고 하면 대학을 보내도 걱정되고 나이가 찼는데 엄마 아버지만 쳐다보고 있고 배우자 골라올 생각을 않고 있으면 그것도 애타는 일입니다.

간신히 장가를 보냈는데 장가를 가서 무엇을 할지 모를 것 같아 결혼과외를 시킬 수도 없고 신혼과외를 시킬 수도 없고 이것은 난처한 일이거든요. 그래서 아이가 자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 화낼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이가 독립인격체이네요.” 내가 비로소 배우게 되었어요. 아이가 독립인격체라는 겁니다.

독립된 인격으로 존중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존중을 받은 자녀만이 자기 자신과 부모와 타인을 존중하는 인격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자녀들을 여러분의 소유물로 간주하지 마십시오. 자녀들을 억압하지 마십시오. 방관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않도록 격려하는 부모가 되십시오. 자녀들을 내 기분에 따라 좌절시키지 말고 신앙으로 격려하는 부모가 되기로 다짐해야 합니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것만으로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해야 되요. ‘올백’ 그런 소리하지 말고 올빼미도 아니고 어떻게 올백 할 수 있습니까? 그 엄마 아빠에게서 태어났는데, 그러니까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주는 것 만 해도 생각해 보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아이가 정상적으로 자라주는 것 만해도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초등학교 때에는 신체적으로 잘 자라는 그 일에 감사하고 그 다음 청소년시기가 되면 지적으로 한창 발달되니까 그럴 때는 정신적으로 좀 성숙하도록 배려해 주고 그래서 여러분 오늘부터 시작하는 학부모와 함께 하는 청소년 예배에 우리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들은 지원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를 여러분이 안 가르치면 누가 가르치란 말입니까? 여러분 자녀들이니까 여러분이 가르쳐야 됩니다. 다른 일, 할 수 있는 일 있습니다. 올해는 보류하고 할 일이 많지만 다른 일을 일단 보류하고 ‘자녀 제대로 키운다. 청소년시기의  내 자녀 내가 기도하면서 내가 키운다’ 하고 결심하는 겁니다.

전도하는 일도 소중합니다. 복음을 전해야하는 것 하나님 명령인 것 맞습니다. 그런데 내가 전도해서 산토끼를 집토끼 만드는 동안 집토끼들 산토끼 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전도하러 다닌다고 쫓아다니는데 여러분 자녀들이 어떻게 크는지 챙기지 못하고 있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여러분 봄에 가꾸는 일이 없으면 가을에 거두는 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일이 있어야 기쁨으로 수확하는 그날이 옵니다. 자녀들을 위한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복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ꡒ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ꡓ(잠22:6) 가르쳐야 될 때는 아이 때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고 마음에 기쁨을 주는 자녀들은 꾸지람과 채찍을 통해서 자라는 아이들입니다. 징계하는 채찍을 경험하지 않고 자란 아이들을 ꡒ아비의 재앙ꡓ(잠19:13)이요 ꡒ어미를 욕되게 하는 자ꡓ(잠29:15)라고 잠언서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원하기만 하면 뭐든지 다 들어주는 부모를 만난 아이들은 재앙을 만난 아이들입니다. 자라서 아무 일에도 절제할 수 없는 인간이 되고 맙니다. 성욕이든 물욕이든 절제할 줄 모르는 엘리의 자녀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달라고 하면 즉각 해 주어야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려 한 주간 하는 것 봐가며 일주일 뒤에, 한 달 뒤에 아버지 월급 받아오면” 여러분 그렇게 기다리게 해서 하나 사주면 천 원짜리도 아이들이 받을 때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만원짜리, 5만원짜리, 십만원짜리를 사 줘봤자 아이들이 감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봐서 알지만 세상 살 때에 생각대로 그때그때 되는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도 여러분들과 똑같은 생을 할 것인데 기다리는 것을 배우지를 못하면 그 아이들의 인생이 사람이 되겠습니까?

무얼 먹고 싶다는 이야기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즉각 대령하는 아이들,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마를 찌푸리게 하는 데도 그대로 내버려두는 부모는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자라는 아이들은 사람들 사이에 폭탄이 되는 것입니다. 전쟁터의 폭탄도 파괴적이지만 절제와 징계를 모르고 자란 아이들은 인간폭탄이 되는 것입니다. 더 무서운 재앙입니다.

바른 욕구와 그런 욕구를 분별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욕구를 절제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사는 것을 배우지도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성경이 말하는 축복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폭탄이고 반드시 터지는 시한폭탄입니다. 터지면 자신만 다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까지도 다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자녀들을 주인의 뜻에 따라서 양육합시다. 그 고귀한 책임을 완수하기 위하여 우리는 오늘 오후부터 구체적으로 시도합니다. 부모와 함께 드리는 청소년예배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학부모 여러분을 교사로 초청합니다. 다른 어떤 교회일 보다 더 우선적으로 자녀를 신앙으로 올곧게 키우는 일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일은 뒤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소년 시절의 아이를 바로 지도하는 일은 그때 지나고 나면 더 이상 할 수 없습니다.

예배에 오셔서 여러분의 자녀들을 바라보며 축복의 손을 내밀기를 바랍니다. 그들을 위해 중보의 손을 올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손이 올라가면 여러분의 자녀의 내일이 보장됩니다. 여러분의 축복의 손이 펼쳐지면 그들의 미래가 펼쳐질 것입니다.

시인의 마지막 훈계가 무엇입니까? ꡒ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에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 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ꡓ

싸움터에 나가 싸울 때에 활은 있는데 전통에 화살이 떨어져 버리면 그건 끝입니다. 화살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활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화살이 가득한 전통이 복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시대의 사람들이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시대말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가 많은 사람이 복 받은 사람입니다. 전통의 화살이 많은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동서양에서 가장 지혜로운 임금 솔로몬이 성령의 영감으로 고백한 것조차도 무시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뜻이 아니면 집을 세우는 자식이 없을 것이며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부모에게 힘이 될 좋은 자식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를 화살에 비유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잘 키운 자녀는 부모의 원수를 쏘는 화살처럼 힘이 되지만 잘못 키운 자녀는 그들의 부모를 쏜다는 것을 여러분을 관찰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아직도 가능할 때에 여러분의 자녀들을 신앙으로 키우겠다고 결단하십시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본성상 죄 가운데 태어난 자녀들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을 바로 잡아 줍니다. 죄악의 본능은 끈질기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더 크십니다. 막대기가 저절로 화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드럽고 멋진 화살로 손질해야 합니다. 그 일에 부모 된 여러분의 참여가 꼭 필요합니다.

여러분 신앙을 가진 청소년과 신앙이 없는 청소년은 같은 가방을 들고 같은 학교를 드나들지만 그 내면세계는 하늘과 땅만큼 다릅니다. 천국과 지옥만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으로 바르게 자란 아이들은 자신과 세상을 바르게 봅니다. 세상을 살면서도 감사하며 찬송하며 천국의 삶을 누립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 정말 누가 그 부모인지 참 존경스럽습니다. 그러나 매사에 불평하고 짜증내고 난폭하고 예의라곤 없는 아이들은 남을 힘들게 하기 이전에 자신이 지옥의 삶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마른 탱자나무 가시로 몸을 두르고 자신과 주변사람들을 끊임없이 찌르고 살고 있습니다. 어느 부모라도 자녀들이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자녀들은 이미 지옥의 고통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신앙을 심어 주기 위해서는 여러분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아야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어인지를 알아야합니다.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는 내 자녀에게 다른 어떤 것을 물려주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가 믿고 사랑하는 주님 한 분 알게 된다면 저는 감사하겠습니다.” 부끄러움 없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 하늘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까요? 여러분이 무엇이 중요한지 이 자리에 나와서도 아직도 붙들지 못하고 있으니까 늘 켕기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어떻게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 수 있습니까?

저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올 한해 살면서 정말 하나님 앞에 마음깊이 감사했던 일이 그겁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두 아들을 선물로 주셨고 그 들이 내가 믿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나처럼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소원을 주셨으니 정말 감사합니다. 내가 세상에 살면서 해야 될 내 일의 반은 감당한 것 같은 기분, 우리가 어떻게 한 순간 불평이 가득한 세상에서 감사하고 찬송하게 되었습니까? 우리 마음에 오신 주님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직도 세상에서 겪는 어려움을 우리도 겪고 있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삶을 바꾸어 놓은 하나님의 은혜가 내 자녀의 삶에 역사하기를 기다리면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하늘의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 자녀들이, 특히 우리 청소년들이 항상 기뻐하며 살도록 도와주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삶을 살도록 지도합시다. 범사에 감사하는 천국의 삶을 이 땅에서 경험하도록 그 젊은 아름다운 꿈을 키워 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할 수 있도록 새벽이슬과 같은 청년들이 될 수 있도록 우리 자녀들을 키워 보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자녀들을 신앙으로 키우는데 적어도 강남 8학군은 가장 좋은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차라리 길거리 농구도 안 된다는 이 울산의 척박한 이 땅이야말로 우리 자녀들을 신앙으로 키울 수 있는, 그래서 오늘의 청소년들이 10년 20년 후에 울산의 자랑이 될 수 있도록 열방의 기쁨이 될 수 있도록 우리 함께 기도하면서 자녀들을 키워야 되겠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키가 자라며 지혜가 자랄수록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을 바라보면 그저 입을 다물 수 없는 신앙의 올곧은 자녀들로 그렇게 키워나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종교가 하는 일이 백일기도 시중 들어주고 한 주간동안 수능 학부모 기도해주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미친 듯이 세상이 달려갈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지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 나라에 어떤 교회도 어떤 목회자도 둘씩 낳자 하나씩 낳자 할 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사회는 급속도로 고령화 사회가 되고 내일에 대해 기대를 걸 수 없는 이런 비참한 자리로 내 몰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신앙의 형제자매 여러분 한평생 잠깐 살아가는 동안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소원 가운데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중간한 신앙생활은 우리시대로 끝내고 우리 자녀들은 정말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도록 키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오후 3시부터 예배하는 복된 자리에 청소년을 두신 부모님들은 함께 나오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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