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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치심도 창조적 힘으로 쓰임 받습니다. (사 5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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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주홍글씨에 출연한 한 여배우가 자살한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오빠의 진술에 따르면 그녀는 영화‘주홍글씨’촬영 후 누드 연기 등에 의한 수치심으로 우울증이 심했고 그로 인해 자살 직전까지 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또 한 여대생이 대학원생에게 성폭행 당했다고 건물에서 뛰어 내려 자살한 것도 보도를 통해 보았습니다. 몇 년 전에는 한 대 기업 총수가 자살한 것을 보았습니다. 수치심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수치심은 우리의 존재를 옭아매고 있는 감성의 병입니다. 수치심은 우리의 존재를 내부로부터 곯아 버리게 하는 인생의 가장 큰 파괴적인 기운 중의 하나입니다. 수치심은 우리의 삶을 피기 전에 시들어 가는 그늘 아래 화초와 같이 만들어 버립니다. 수치심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은 자신은 무가치한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존재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극단적일 때는 자살로 수치심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앤드류 레스터 박사는 수치심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아의 관점으로부터 생기는 것이고 죄의식은 양심으로부터 생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치심이란 나에게 있어서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있다고 마음속 깊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죄책감이란 내가 한 일에 대한 것이라면 수치심은 내가 어떠한 사람이냐에 대한 느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첩의 딸이었다는 것 때문에,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것 때문에, 아버지의 직업이 부끄러운 직업이었다는 것 때문에 수치심이 생깁니다. 수치심은 가족의 역사나 부모나 중요한 타인들로 부정적인 메시지로 인해 생겨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특별히 가족 내의 중독이나 역기능적인 상황들, 숨기고 싶은 가족의 비밀 자신의 신체적인 조건, 지력, 의지, 재능, 인격, 성품 등과 같은 정신적인 조건, 직업, 직위 등과 같은 사회적인 조건에 의해 생겨납니다. 이러한 파괴적인 수치심은 사람 마음 속에 자리잡고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아주 부정적으로 만듭니다. 열등한 존재로 여기게 합니다. 우울증에 빠지게 하고 절망하게 만듭니다. 수치심은 자신을 공격하며 자기 존중감을 사라지게 하고 분노를 촉발하며 자신을 스스로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수치심이 창조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수치심을 창조적 힘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요?

1. 우리는 수치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존재에 대한 인식
수치심의 노예에서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쓸모없는 존재, 열등한 존재, 거부된 존재로 받아들입니다. 부모의 적극적인 학대(구타, 욕설, 희롱, 성적학대), 소극적 학대(무시, 과잉보호, 방치,비난) 비현실적 기대등으로 자신은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부모로부터 거부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서부터 수치심은 시작됩니다. “나의 인격 그 자체가 태어난 것 자체이고 잘못된 것이고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버림받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라서도 그것을 숨기려하고 숨기고 싶은 가족의 비밀을 수치심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어, 우리 집은 가난한 집이야, 나는 외모가 내 놓을 것이 없어, 나는 이혼한 사람이야, 나는 누구 앞에 말할 수 없는 직업은 가진 사람이야" 등 자신의 환경과 조건을 다른 사람 앞에 내 놓기에 지극히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여 깊은 열등감과 상실감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처한 삶의 환경이나 조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로 의식하고 사느냐에 따라 삶의 질과 함께 신앙생활의 질도 달라집니다. 우리는 수치심으로부터 해방되어야 건강한 가정생활도, 행복한 신앙생활도 역동적인 사회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은 참 수치스러운 백성이었습니다. 6절에 보십시오. 젊을 때 버림받은 아내와 같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았지만 늘 배반하고 범죄하여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을 회복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5절에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남편이 되겠다고 말씀합니다.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온 세상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가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4절에 보십시오.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수치를 당치 아니하고 부끄러움을 보지 않도록 우리 하나님께서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네 가지 면에서 받아주겠다는 말입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과거의 행동, 둘째 인격, 셋째 존재, 넷째 현재 상태와 미래의 실현 가능한 상태를 수용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는 것처럼 실제로 나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 만들어 주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의 수치를 다 당하였습니다.

바로 앞에 나온 이사야 53장을 보십시오. 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다 당하였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다 당하였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십자가에서 상하였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수치스러운 조건들이 다 해결된 것을 믿습니까? 말할 수 없는 가족의 비밀스러운 수치가 다 용서되고 해결된 것을 믿습니까? 부끄러운 나의 과거가 다 주님 안에서 용서된 것을 믿습니까? 나의 신분이 완전히 변화된 것을 믿습니까?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3-35)"

가족 내의 중독도 역기능적인 상황들도, 숨기고 싶은 가족의 비밀도 자신의 신체적인 조건도, 부끄러운 정신적인 조건도,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는 직업, 직위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옆사람 보고 우리 인사해 봅시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딸입니다. 나는 중전 마마입니다. 나는 전하입니다."
지난 우리의 가정 환경, 우리의 인생 역정 우연히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이루어 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시 139:13)"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사 44:2)"
모세는 젊을 때 살인하여 광야에 도망가 40년을 살았습니다. 그에게도 수치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을 위한 사명을 맡겨 줄 때 피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너를 택하여 보낸다고 말씀합니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하다고 할 때 하나님은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고 말씀합니다. 내가 네 입을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중요합니다. 모든 조건은 수치심이 아니라 자부심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가정에서도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딸로 부르셨다는 생각을 하면 얼마나 자부심이 생깁니까?
[알코올 중독상담]의 저자 샌드라 윌슨(Sandra D.Wilso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도 한 때는 수치심의 포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알코올 중독자인 사람과 두 차례나 결혼하였지만 실패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의붓 아버지가 술에 만취해서 자신과 어머니를 향해 망치를 들고‘죽이겠다’고 하며 달려들 때 책상으로 이를 막아내고 이웃집에 가서 경찰에 신고를 해야만 했답니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고 합니다. 한 때 수치심 때문에 깊은 우울증에 빠져 16시간 잠을 자기도 하고 우울증 치료제를 복용하기도 하였지만 하나님을 만나 이 수치심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교수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신과 같이 수치심의 그늘에 있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2. 우리는 수치심을 은폐할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께 내어놓으므로 자유함을 누려야 합니다./수치심의 해결 방법
수치심이 있는 사람들은 가능하면 최대한 숨기려고 합니다. 가족 중에 장애인 자녀가 있으면 그것을 수치로 알고 최대한 숨기려고 합니다. 부모가 알콜 중독자였다면 그것을 최대한 숨기려 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모방합니다. 자신의 비밀스런 문제를 최대한 숨기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진실정과 진지성이 없어집니다. 자신을 과대 포장합니다.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삶을 살게 만듭니다. 신앙 생활도 진실성이 없고 형식적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올무가 되어 평생 수치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신앙 생활을 해도 그 문제에서 자유함을 받지 못합니다.
수치심은 숨기려 한다고 해서 숨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이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숨기려고 애를 쓰면 사람들에게 조금 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건강한 삶을 위해, 행복한 삶을 위해 지난 환경이 수치심이 되어 우리의 미래를 붙들고 있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숨기려 하면 더욱 그것이 자신을 괴롭히고 밝고 건강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합니다. 우울하게 하고 침체되게 만들고 매사 소극적이고 부정적이게 만들어 버립니다. 자신의 과거 환경보다 더욱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전철을 걷게 만들고 오히려 더 악화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죄의식을 동반한 수치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 앞에 내어놓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밧세바는 공범이니까 말하지 않으면 되고 자신만 은폐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러나 은폐하면 할수록 더욱 문제는 복잡해졌습니다. 수치심을 은폐하기 위해 남편을 죽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나단 선지자를 통해 드러냅니다. 만약 다윗이 그 문제를 은폐하고 살았다면 평생 수치심으로 고통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해결되지 않은 그 과거의 기억 때문에 평생 고통을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 수치심을 가리기 위해 늘 신경을 쓰고 우리아의 동료와 그 집 근처에 사는 사람을 숙청하고 죽였을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 나와 다 회개하고 문제를 해결받으니까 그 문제에서 자유함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두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아마 대단한 죄의식과 수치심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일평생 그 문제로 인해 우울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닭만 울면 귀를 막고 깊은 골방에 들어가 미친 사람처럼 울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다 해결 받습니다. 친밀 구룹과 나눌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과 나누도 좋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께 가지고 나오면 됩니다.
우리 하나님께 나오면 어떤 수치심도 다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이 사실을 믿습니까?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사 43:25)" 이 사실을 믿습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 1:18)"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시 25:3)"
수치를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행해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보십시오. 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두려워 말라 김목사 너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너의 아버지 문제로, 너의 가정 문제로, 너의 약점 문제로, 너의 실수 문제로, 너의 과거로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놀라지 말라 네가 부끄러움을 보지 아니하리라. 네 청년의 때 수치 과부의 때의 치욕을 다 잊어 버리겠고 다시 기억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의 수치스런 문제를 하나님께 내어놓아야 합니다. 함께 공감하고 위로할 신앙 동료에게 내어 놓는 것도 수치심에서 해방되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물론 내어 놓으면 더 수치심에 사로잡힐 은밀한 부분까지 내어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만 내어 놓아도 좋은 것은 하나님께만 내어 놓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중풍병자나 38년된 병자를 용서해 주실 때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시지만 그들의 죄를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쓸데 없이 여기 저기에서 자신의 수치심을 드러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참 자유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올무가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용서해야 합니다. 자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이 수치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다 용서할 수 있어도 자신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한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받아 주고 하나님께서 용서해주고 하나님이 기억하지 말라고 말하는데 뭐 내가 더 의롭다고 그것을 끝까지 용납하지 못하고 정죄합니까?
"예수앞에 나오면 모든죄사하고 주의품에 안기어 편히쉬리라 우리주만 믿으면 모두구원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205장 1절)
예수앞에 나와서 은총을 받으며 맘에기쁨 넘치어 감사하리라 우리주만 믿으면 모두구원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205장 2절)
예수앞에 설때에 흰옷을 입으며 밝고빛난 내집에 길이살리라 우리주만 믿으면 모두구원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205장 3절)"

3. 우리는 수치심의 조건을 도피의 수단으로 삼지말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계기로 삼아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께 수치심의 조건이 창조적으로 쓰임받아야 합니다. /수치심의 활용
모든 감정의 힘이 있습니다. 수치심도 에너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파괴적인 힘으로 발산될 수도 있고 창조적인 힘으로 발산될 수 있습니다. 수치심은 도피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피하는 것은 수치심을 파괴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도피하면 도피처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도피처가 중독의 온상이 되는 것입니다. 중독이 되면 잠깐 수치를 잃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를 갖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취를 수치심의 도피처로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높은 지위에 오르고 사업에 성공하면 수치심으로 해방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중에서 일중독에 걸립니다. 수치심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은 자신은 무가치한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존재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면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니까 그것을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합니다. 그런 바탕에서 살기 위해서는 돈과 명예와 권력을 가져 한다고 생각하며 본질적 자아는 잃어 버리고 껍데기 인생 형식적 인생, 역할적 대화만 하며 세상에 집착합니다. 일중독에 빠져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알코올을 수치심의 도피처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술에 의존해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잃기 위해 술에 의존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알코올로 인해 순간적인 망각과 기쁨, 이익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잠깐의 취함은 의존성을 만들어 줍니다. 알코올에 의존해야 수치심을 잃게 해 줍니다. 모든 중독 물질이 그렇지만 도파민 분출을 더 많이 하게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술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면 수치심을 해결하는데 술을 의존하게 되고 결국에는 내성이 생기고 금단증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편두통이 생기고, 혈압이나 맥박의 증가, 손 떨림이나 몸 떨림 일어나고, 식은땀 , 수면장애, 불안, 우울증, 혼돈 등의 증상이 나타납니다. 술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중독자들이 그런 것처럼 자신은 중독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업상, 누구 때문에, 기분이 나빠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맘만 먹으며 언제든지 끊을 수 있다"고 말을 하지만 결국 이 고리를 끊지 못하면 더욱 수치심은 심화되고 자식들에게까지 수치심의 고리를 만들어 줍니다.

어떤 사람은 관계를 수치심의 도피처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관계 중독에 걸리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4번이나 결혼하고 이혼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학대하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극한 수치심을 가지고 어릴 때부터 자랐습니다. 그 가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빨리 결혼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학대하는 남편을 만났습니다. 술만 먹으면 자신의 아버지와 똑같습니다. 도피하기 위해 해어졌습니다. 그런데 또 재혼을 합니다. 역시 아버지와 같은 학대하는 남자를 만나고 반복해서 4명을 만난 것입니다. 이런 것을 관계 중독이라고 합니다. 비이성적일 정도로 어떤 사람이나 관계에 끌리고 있는 것입니다. 관계를 통해 자기를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자처럼 통제력을 상실했고 관계라는 마약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수치심을 자녀를 통해 도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식 때문에 웃고 자식 때문에 우는 자식과 관계 중독에 걸립니다. 자식의 일이라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자식의 기쁨이 내 기쁨이고 자식의 슬픔이 내 슬픔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의 조그마한 손짓에도 나는 괴로워 했오"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수치심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증오합니다. 같은 교회에서 신앙 상담을 하는 것도 어는 정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치부를 다 드러내는 신앙 상담을 했을 경우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상대가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못 견디어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수치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도피하려고 합니다. 그 때 도피의 수단으로 상대를 비난하고 증오합니다. 자신의 부모를 비난하고 증오했듯이 자신의 수치를 알고 있는 사람을 똑같이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로 옮겨 가 버립니다.

수치심은 인터넷 중독, 쇼핑 중독, 알콜 중독, 일 중독, 약물 중독, 도박 중독, 식(食)중독, 텔레비전 중독, 관계(섹스)중독, 운동 중독, 인정 중독 등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독에 걸리면 모든 것을 잊게 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중독에 걸리면 자신에게 부정적인 결과나 고통스런 결과를 가져다 주는데도 불구하고 그 행동을 되풀이합니다. 자신에게 해로움을 주어 조절하고 싶은데도 조절하기가 어렵습니다. 통제력을 상실합니다. 정상적인 생활의 균형을 깨뜨릴 정도로 과도하게 빠져 버립니다. 원치 않은 결과로 인하여 행동을 중단하고 싶지만 그 행동을 중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중독에 걸린 사람은 강박적이고 충동적으로 되풀이하며 서서히 나올 수 없는 늪으로 빠져 들어가 버립니다.

우리는 수치심을 주는 조건을 하나님께 나아가 수치심을 주는 조건이 창조적 에너지로 활용되게 하여야 합니다. 수치심이 있으면 그 수치심 다른 것을 도피처로 삼아 그것에 중독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하나님께 나아가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풍요롭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세요. 수치심을 씻어 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더 수치스럽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7절을 읽어 보십시오. 잠시 훈련의 과정을 통과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을 버렸다는 것은 바로 바벨론 포로를 통해 훈련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메시야 나라를 이루는 도구로 삼아주겠다는 말입니다. 바벨론 포로가 된 포로생활의 수치가 도구가 되어 메시야 나라를 이루는데 쓰임받습니다. 그러나 작은 고난에 비해 큰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불쌍히 여겨 주신다는 말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죄 때문에 넘치는 진노로 징계하였지만 영원한 자비로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수치심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수치심의 조건 때문에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주님을 만나 창조적으로 쓰임받는 것을 봅니다. 죽을 때까지 수치심으로 얼굴을 들지 못하고 부정하다고 외치며 살아가는 문둥병 환자는 그것 때문에 주님을 만나 고침받고 주님을 전하는데 쓰임 받았습니다. 남편 다섯이나 두어 그 수치심으로 사람들 앞에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여인은 그 수치심 때문에 예수님 만나 수치심에서 해방시켜 온 동네에 돌아 다니며 메시아를 전하는 사람으로 쓰임받았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으며 수치심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군중 속에서 남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은 수치심을 주는 그 질병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 질이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지고 가셨을 때 우리의 수치도 함께 지고 가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히브리서 12:2). 우리의 수치를 십자가 상에서 다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삽니다.
수치심은 얼마든지 창조적 에너지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링컨과 톨스토이 부인이 참 수치심을 줄 만한 사람들이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창조적으로 쓰임받아 위대한 정치가 작가가 되었습니다.

수치심에는 파괴적인 수치심이 있고 창조적인 수치심이 있습니다. 나쁜 수치심은 파괴적으로 사용됩니다. 도피하게 합니다. 은폐하게 합니다. 우울하게 합니다. 중독되게 합니다. 무기력하게 합니다. 비난하게 합니다. 자신을 공격하고 자기 존중감을 사라지게 하고 쉽게 분노를 촉발하며 자신을 스스로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좋은 수치심, 건강한 수치심은 자동차의 브레이크와 같은 것입니다. 자신을 통제하게 하고, 통찰력을 주고 자기 발전을 도모케 하며, 가치관을 넓혀 주고, 남들에게 더욱 민감해지며, 자신 주변의 문화의 질을 높이도록 만듭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여 수치심이 올무가 아니라 수치심이 성령에 붙들여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도록 합니다. 우리는 수치심을 주는 조건을 창조적인 힘으로 활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수치를 모르는 백성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아담이 죄가 없을 때는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후에는 부끄러워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면 참 수치스러운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말미암아 주님 앞에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긍휼에 무한하신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시 34:5)"
오늘 성경 4절을 읽을 때 네라는 말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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