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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허탄한 자랑을 말라! (약 4: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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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정근두 목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 명절 잘 보내셨습니까? 저는 지난 주말부터 들이닥친 아들 식구들 덕분에 명절 분위기에 빨리 접어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공휴일답게 한번 명절을 보내보기로 마음먹었지요. 십년 만에 명절답게 일 엮지 말고 한번 쉬어 보자고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서 두 팀이나 내려와서 휴일 내내 사람들 틈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아직 처갓집도 못가고 전화라도 드려야 할 곳도 다 못 챙겼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명절 분위기에 젖어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우리는 신정도 쇠고 구정도 쇠고 이래서 잘못하면 두 달을 그냥 명절 분위기에 지나가 버리면 안 되거든요. 빨리 사람 사는 세상으로 돌아가서 할 일을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오늘 참석하신 여러분들을 보니까 벌써 징검다리 연휴 이런 것 무시해 버리고 다 나오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한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이 기록된 시대상이 물씬 풍겨 나고 있습니다. 13절을 읽어보면 당시 유대인의 모습을, 그들의 생활상을 쉽게 연상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를 처음 읽던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그들의 생활 속에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처음 독자들은 본문 속에서 그들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유대인하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주 인정받는 분야들이 있습니다. 요즘에도 그렇다고 그러지요. 아주 노벨상을 거의 휩쓰는 제일 많은 퍼센트 사람들이 유대인들이라고 하지요. 지금도 세계 경제를 주름잡고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이라고 합니다. 이천년 전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도 벌써 그들의 뛰어난 사업수완은 알려져 있었습니다. 당시는 로마가 온 천하를 통일해서 소위 로마의 평화라고 하는 팍스 로마가 외쳐지던 시대였고 곳곳에 큰 도시들이 건설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상술을 발휘할 절호의 귀회를 누렸습니다.

새 도시가 건설되면 그 도시에 와서 살 사람들을 영입했는데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시민권을 제공해 가면서 환영했습니다. 유대인이 몰려오면 상업이 활발해지고 온갖 재화가 몰려들기 때문입니다. 도시의 번영은 유대인의 이주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마 이런 부류의 상인들처럼 보입니다. 한 장의 지도를 펴놓고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 도시에 가서 한탕 해야겠어, 한 일 년 머물면  괜찮은 저택 한 채쯤 떨어질 거야”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이천년 전 유대인을 지배하던 상업심리와 오늘 한국인의 마음속에서 굼틀거리는 투기욕망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구정 명절을 전후해서 판교 신도시의 로또 아파트 이야기로 세상은 시끌벅적합니다.

소형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로 인해서 당첨만 되면 가만히 앉아서 일, 이억의 시세차액을 얻는다고 내다보고 있습니다. 주택공급을 늘려서 집값을 안정시키고 서민들을 위해 소형 아파트 분양가를 낮춘다는 것이 로또 아파트로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그때는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기려 들었지만 요즈음은 땅이나 아파트에 투기해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양자 다 지도를 펴놓고 설치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대단한 자만심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앞부분에는 준행해야 할 율법마저 우습게 여기고 마치 율법의 심판자나 재판 자가 되는 듯이 설치는 대단한 사람들을 보여 주고 나서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섭리조차 인정치 않는 스스로 인생의 주인인 양 설치는 부류의 인간들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지도를 펴놓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금세 부자가 된 것 같습니다. 그들의 계획 속에는 하나님이란 전혀 자리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장사를 하고 이익을 남기려 드는 것은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사업을 계획을 하고 준비하는 것 그것은 잘못 될 것이 없습니다.

다만 그 생각 속에 하나님을 전혀 고려치 않은 오만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연간 사업 계획 속에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이 자기의 생각대로 될 것처럼 떠드는 인간의 오만함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당시 열국의 흩어진 유대인의 심성이나 오늘 우리 마음속에 자리한 욕망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마치 미래가 우리의 수중에 있는 것처럼 장기계획 단기계획을 세우고 무한한 자기신뢰를 하고 있는 그 점을 지금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남보다 먼저 상황을 분석하고 명석한 판단에 기초한 투자는 반드시 성공으로 연결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여러분은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런 확신에 가득한 인간의 마음속에 오만을 지적합니다. 14절을 보면 그들의 잘못이 여실히 폭로되고 있습니다. 이런 인생들의 치명적인 실수가 무엇인지를 14절은 들추고 있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내일 일조차 알지 못하는 인생에 불과하면서 일 년 동안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얻겠다고요? 그들의 치명적인 실수는 자신들이 다만 인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단 오 분 후에 일어날 사건조차 정확히 예측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한해를 자기 뜻대로 될 것처럼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들에게 가장 확실하고 공통적인 사실은 그들의 미래란 불확실하며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업 계획을 수립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중장기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미래는 여러분의 수중에 있지 않습니다. 불확실하며 예측할 수 없습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13절에 등장하는 인물의 호언장담 속에는 또 하나의 엄청난 진리가 망각되고 있습니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 뿐 아니라 인생의 연약함과 유한함을 잊고 있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쉬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며 덧없는 것이 인생인지를 인식하기에 실패하는 죄악을 범하고 있습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지난 주일날 오랜만에 성도를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인사를 나눈 분 가운데서는 황순창이라는 아저씨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아실지 몰라요 가끔은 술이 되어서 교회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자기가 좋아하는 김은중 목사님이 사회를 본다싶으면 저 뒤에 앉아서 “힘내라” 고함치기도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명절에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도 없이 세상을 떠났더라고요. 장례는 치렀지만 아무도 관여할 사람이 없이 그렇게 떠난 것을 생각하니 이제 다시는 이 땅에서 만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깊이 명심하십시오. 늦가을 이른 아침에 산책을 나가보십시오. 여러분의 앞길에 안개가 시야를 가릴 때마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모습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18년만에 옛날 살던 동네를 찾아가서 만나보니까 처음에 서너 집 오후에 찾았는데 그다음에 도무지 더 갈 용기가 생기질 않더라고요. 집집마다 어려운 일들이 있는데, 병들어 있고 치매에 걸려있고 아들이 자살을 했고 이런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얼마나 마음이 무거운지 모릅니다.

삶이란 그렇게 즐거운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인생의 모든 결론을 내릴 때 수고와 슬픔밖에 없습니다. 라고 모세가 고백한 것이 결코 헛말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린 시야를 잠깐 가리는 안개와 같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면 곧 사라질 것입니다. 동남풍이 불어도 서북풍이 몰아쳐도 독야청청 할 것처럼 자기를 과신하지 마십시오. 메뚜기도 오뉴월이 한 철입니다. 나이 40-50이면 한 인생이 도달할 수 있는 정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대개는 그때 인생의 절정을 이룹니다만 석양이 비췰 때를 미리 기억하고 살아야 지혜로운 자입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안개니라 잠깐 보이다가 없어질 뿐이니라.”

인생에 대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람은 조만간 죽음으로 끝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삶에 대해서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진리는 우리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고 만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필연성을 직면하기 거절하는 것은 교만한 인생의 모습입니다. 예기치 않는 시간에, 미리 내어다 보지 못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종말이 닥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사는 인생은 교만한 자입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생존기간이 불확실한 것이 인생입니다. 일 년을 장담할 보장할 인생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시대 역시 불확실한 시대입니다.

불확실성의 시대를 사는 불확실한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될 대로 되라고 자포자기하다 살아야 합니까? 내일 죽을지 모르니 오늘 먹고 마시자고 소리쳐야 합니까?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노래를 노래해야 합니까?

야고보 선생은 왜 인생의 유한함과 미약함을 상기시켜 줍니까? 생명은 우리 수중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인생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전능자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5절의 권면에 귀를 기울입시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주의 뜻이라야-우리가 살기도 하며 이것저것 하리라 할 것이거늘 . . .” 예,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살면서 성취하는 것도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일이 성사가 되는 것도 주님께 달렸고, 성사되도록 산다는 보장도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인생은 전적으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생각 속에, 여러분의 계획 속에, 여러분의 대화 속에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벗어나서는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는 인생임을 기억하십시오. 불확실한 미래, 예측할 수 없는 인생길로 인해 불안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여러분의 계획은 승산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불확실한 미래, 예측할 수 없는 인생길에서 영광스런 확신을 갖고 살아갑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위탁된 미래만큼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전능자의 장중에 위탁된 계획만큼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전능하신 하늘 아버지께 위탁할 일들은 없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생명입니까? 사랑하는 분들의 생명입니까? 이처럼 혼란한 세대 속에 어린 것들의 미래입니까? 여러분이 꿈꾸고 있는 내일의 계획입니까? ‘예, 주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할 것입니다. 예, 그분 뜻이면 이것저것을 할 것입니다.’

주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긴 확신에 찬 성도들의 고백을 읽어보십시오. “내 시대가 주의 장중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시31:15) 이 말씀은 2005년 교회의 표어를 밑받침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밝은 미래를 열어가는 해로서 한해를 정할 때 우리는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기로 마음먹고 있습니다.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주님의 손에 우리의 날들이 있습니다. 신약사도의 확신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

부끄러워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는 것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그가 나의 의탁한 모든 것을 그날까지 능히 지키실 것을 이루어 가실 것을 믿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성도가 온갖 어려움 속에서 누리는 놀라운 위로입니다. 신앙이 좋다고 해서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에는 오히려 온갖 어려움들을 당하면서도 굿굿이 서있는 성도들의 모습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욥으로 떠 올릴 수 있습니다. 1장에서 펼쳐지는 욥에 대한 소개는 대한합니다, 그는 동방에서 가장 부유한 자였고 그는 온 세상에서 당대에 모든 세상에서 가장 하나님이 내어 놓을 수 있는 자랑할 만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의 삶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리려고 하는 시련의 바람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아내가 욕하면서 떠나갔을까요?

여러분 신앙이 있다고 해서 헌신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다 보장되리라고 생각하면 우린 정말 로또보다 더한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는 액수에 비해서 헌신하는 그 시간에 비해서 여러분이 보장받는 것이 그렇게 많다고 하면 믿음에 의해서도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겪습니다. 거기에서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걸리는 질병에도 걸릴 수 있습니다. 실패해도 심지어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까지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쩜 신앙이 좋고 나쁨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기 전에도 세상은 있었고 우리가 떠난 뒤에도 세상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헌신하기 전에도 울산교회는 있었고 여러분이 없다고 해도 울산교회는 되어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헌신을 하지만 그대로 안 된다고 해서 짜증을 낸다던지 사람들을 피곤하게 한다던지 그렇게 까지 할 것은 없습니다. 열심을 가지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쳐서 짜증날 만큼 헌신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맡겨진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 자리에 없어서도 우린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일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편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는 자들에게 잠을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 우리는 읽어 보았습니다. 왜? 잠들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편안히 잘 수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삶을 붙들고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당회를 하면서 보고를 들었는데 우리 1월에 2300명이상 평균출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에는 2370명이상 왔습니다. 약 2년전 우리가 제3 울산교회를 개척하면서 4~50명 나갔습니다. 그해 말에 보니까 200명이 늘었더라고요. 이번에 또 평균출석률에서 200명 더 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이 앉아있는 자리에 더 앉을 곳이 없어서 여러분들이 지금 이렇게 저렇게 앉아계십니다.

저는 40일 훈련을 통해서 여러분들 스스로가 영적으로 새로워 졌고 그 결과로 구역들이 또 세분화 되었고 많은 분들이 틀림없이 오늘도 아직 등록을 안했지만 나오신 분들도 있을 것 같아요. 지난주에 3부 예배에 들어오면서 느낌이 전하고는 사람이 다르구나! 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10시에도 그리고 8시에도 예배가 있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모든 계획마다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것을 아는 성도는 불안대신 확신을 가지고 이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모범을 바울의 언행에서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 .” (고전 4:19).... 붙진 말이 아니라 바울은 주님이 허락하셔야 그들이 고린도에 갈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이제는 지나는 길에 너희 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 (고전 16:7) 가는 것뿐만 아니라 가서 머무는 것도 주님이 허락하셔야 된다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믿고 살면 얼마나 마음의 평안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이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의 뜻에 따라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짜증낼 권리는 여러분에게 없습니다. 불평할 이유가 여러분에게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기쁨, 기도, 감사, 의 삶을 살아가면 나머지는 주께서 하실 것입니다.

바울만큼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맡긴 사람은 드뭅니다. 에베소 성도들을 작별하며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행 8:21) 디모데를 속히 빌립보로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라며 자신도 속히 방문하기를 “주안에서” 확신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뜻이면(D. V.)”하는 표현이 서구 기독교 사회는 관습이 되고 말았지만 아직도 우리 한국성도들에게 크게 부족한 것은 절대자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맡기는 삶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이쪽 길을 보여주는데 자기가 원하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짜증낸다고 일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인도하는 대로 바라보고 살아요.

저는 지난 연말에 아프리카를 오랜만에 가야하는데 갈 것 생각하는데 갑자기 잊어버리고 살았지만 남아프리카 교인들을 생각하니 그분들을 위해 설교를 준비해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시간이 나야지요. 일주일에 한편씩 설교를 준비하던 사람이 두편, 세편을 해야 되니 도무지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기껏 할 수 있었던 것은 본문을 어디로 할 것인지만 을 생각하고 자료들만 가지고 혹시 가서 기회가 있으면 아프리카에서 설교를 하려고 마음먹었지요. 가서 한달 있으면서 깨달았어요. 그렇게 설쳐대지 마라 너에게는 이번에는 기회가 없다는 겁니다.

저는 아프리카에서 설교를 할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다만 영어로 어떤 신학교 개강예배를 설교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안달하면서 그렇게 할 것 없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주께 맡기고 가면 “아, 그래서 나에게 시간이 없었구나!” 알고 편안하잖아요. 우리 생각 속에 절대 의존심을 가꾸어 갑시다. 우리 언어 속에 절대 의존 감을 나타냅시다.

말만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그러나 말조차 하지 않는 것은 절대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오만한 삶입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니라.” 가끔 사람들 중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언제나 만나서 들어보면 곧! 곧! 곧 성공 할 것 같더라고요.

그러나 최근에 들었던 또 하나의 소식은 그 성공은 사라지고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자기가 발명한 그 제품이 곧 늘 20년에 만났을 때부터 조금만 더 가면 뭔가 보일 것처럼 늘 그렇게 이야기하더라고요.

앞날이 자신에게 달린 듯이 자랑을 하는 것은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한계를 넘어서서 내일을 논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엄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살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살아 성취하게 하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우리 계획 속에 하나님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습니까?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고도, 성공과 실패가 그의 손에 있음을 수긍하면서도 실제 삶에서 그렇게 살지 않으면 그것은 죄입니다. 이론으로 수긍하면서 실제로 무시하고 사는 것이 바로 죄라고 말합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일반적인 모든 경우에도 통할 수 있는 진리이지만 본문의 문맥상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치 않고 스스로 잘난 듯이 건방진 말을 하고 사는 것은 죄입니다.

무심코 내뱉는 여러분의 말 속에 하나님의 주권이 들어나고 있습니까? 구정을 맞이해서 또 한 번 새해계획을 할 수 있지만 언제나 주의 뜻이면 이라는 단서 속에 계획을 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뜻 안에서” 성사되기를 소원하십시오. 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입니다.

미가의 호소를 끝으로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구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의롭게 인자, 겸손히 살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건이 어떠해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건이 어떤 처지 어떤 상황에서도 공의를 구할 수 있습니다.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주의 뜻을 여러분의 생각에, 올 한해 계획에 넣는 겸손한 신앙인이 되기 바랍니다. 일마다, 때마다 “그 분의 뜻이”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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