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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천하지 않은 선행 (약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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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정근두 목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복된 자리로 나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꽃샘추위가 본격적으로 기승을 부리는 날에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오신 여러분들에게 복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격언처럼 들리는 한 구절의 성경말씀을 살피려고 합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4:17)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가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보아야겠습니다.

죄는 법을 어기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며 법을 어기는 그것이 곧 죄가 됩니다.”(요일3:4) 라고 사도 요한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법을 어기는 것이 모두 죄이지만 모든 죄가 성격상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 자체가 성격상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라”는 명령이 있는가 하면 “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하나님의 법, 십계명을 예로 들어 봅시다. 십계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주류를 이루는 명령은 “하지 말라”입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등 “하지 말라”는 명령이 주조를 이룹니다.

다만 제 4, 5계명은 예외입니다. ‘하라’는 명령으로 두 계명은 이루어져 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도 죄입니다.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도 죄입니다. ‘하지 말라’는 일을 하면 죄가 됩니다. ‘하라’는 일은 하지 안이하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렇든지 저렇든지 하나님 명령을 말씀하시는 그 부분에 명령을 어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 죄가 더 큰 것 같습니까? ‘하지 말라’는 명령하고 ‘하라’는 명령을 어기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큰 죄라고 생각합니까?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거짓말을 하는 것하고 부모를 순종하라고 했는데 순종하지 않는 것 하고 어느 것이 큰 죄라고 생각합니까?

이런 경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명령을 알고 있는데 어떤 집사님이 집에 들어가 보니 뭔가를 차려 두었어요. 거기에 빌고 있어요.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했습니까? “도적질 하지 말라” 는 계명은 익히 아는데 습관적으로 도적질하는 이가 여러분 구역에 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신자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살인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떤 형제가 홧김에 누구를 죽였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사람이 바로 여러분 옆에 앉아 있다고 하면 어떤 기분이 들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지 말라”는 명을 어기면 굉장한 죄로 여깁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을 듣고도 여차하면 예배에 빠지고 급한 자기 일에 몰두하는 분들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라는 제 4계명을 어긴 것을 보고 여러분은 하지 말라는 제 7계명을 어긴 사람처럼 간주합니까? ‘바빠서 지난 주일에 못 왔나?’ 이러고 말 겁니다. 그러나 만약에 간음하지 말라는 제 7계명을 어긴 직분 자가 있다면 당회가 아마 다루려고 할지 모릅니다. 당회가 자정능력을 갖추고 있는 당회라면 ‘치리하자’고 나올 겁니다.

그러나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제4계명을 어긴 사람은 심각하게 다루질 않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것이 중요한 계명입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을 듣고도 부모를 순종하지 않는 것이 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것 같이 죄로서 생각하고 있습니까? 어떤 명령이든지 순종하지 않으면 그건 죄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본질상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금한 행동을 하므로 범하는 죄나, 명한 행동을 하지 않으므로 범하는 죄나 동일한 죄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명을 여겼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전자의 죄를 Sins of commission 후자의 죄를 Sins of ommission 으로 구분합니다. 범하던지 떼어먹던지 생략하던지 다 죄라는 겁니다.

활터로 모시고 가서 한번 설명을 해보지요. 활터로 가면 1번 2번 3번 4번 쭉 사수들이 서야할 자리들이 있습니다. 1번사수가 활을 당겼습니다. 당겨서 과격을 향해서 놓았습니다. 그런데 화살이 가다가 과녁에 못 미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득점이 없습니다. 그렇지요? 두 번째 사수도 화살을 당겼는데 옆에 사람이 보니까 못 미쳐 떨어졌으니까 힘껏 잡아서 놓았습니다. 그런데 과녁을 넘어 가 버렸습니다. 그러면 점수가 나옵니까? 점수가 안 나온 겁니다. 못 미쳤던지 넘어갔던지 과녁을 맞히지 못한 화살은 점수를 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과녁이라고 하면 과녁을 지나쳐도 못 미쳐도 꼭 같은 죄입니다. 생각해 보면 꼭 같은 죄인데 불구하고 “하지 말라” 는 명령을 어긴 것보다 “하라”는 명령에 못 미치면 서로서로 관대하게 여기고 죄책감도 덜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죄는 우리의 기분에 따라서 우리의 느낌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죄라도 자주 되풀이해서 짓다 보면 무감각해 지잖아요. 처음 잘못을 했을 때는 가슴이 뛰었는데 날이면 날마다 같은 일을 하고 나면 나중에는 못하는 네가 잘못이지 그렇게 나옵니다. 여러분의 양심이 무디어져서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죄로 성립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지어서 가슴이 떨릴 때나 열 번지어서 아무 감각이 없을 때나 죄는 죄입니다. 자전거를 탈 때에 우리의 기분에 따라서 죄가 결정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판단에 따라서 죄가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에 따라 죄는 결정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이렇게 어기나 저렇게 어기는 것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왼쪽으로 넘어져도 넘어지는 것이고 오른쪽으로 넘어져도 넘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잘못을 해도 잘못하는 것은 꼭 같습니다. 악행을 저지르는 것만큼이나 선행을 하지 않는 것도 죄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후자의 경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4:17) 반대로 말하면 이런거지요. ‘이러므로 사람이 악을 행해서는 안 될 줄 알고도 행하면 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악을 행할 줄 안 된다는 것을 알고도 행하면 죕니다. 마찬가지로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죄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 야고보 선생의 이 가르침은 주님의 가르침과 그 강조점이 매우 일치합니다. 주님도 여러 비유를 들어서 누누이 이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선한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주님께서도 노력하셨습니다.

커다란 잘못을 범하는 죄보다 오히려 사소한 선행을 하지 않는 죄를 더 자주 심각하게 주님은 다루고 있습니다. 주님은 악한 행동을 했다고 정죄하는 것보다 선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준엄한 선고를 내리고 있습니다. 바깥 어두운 데로 던져라. 여기에 신앙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기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기대하시는 신앙공동체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세상 사람들은 ‘나는 70평생 살면서 크게 잘한 일 없어도 누구에게든지 큰 잘못은 행하지 않고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갑니다. ‘대가’없이, 큰 잘못 저지르지 않고 지내온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수준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기대하신 수준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흩어진 신앙 공동체를 향해서 그들이 도달해야 되는 삶의 수준을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한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악한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은 이 같은 예배의 자리에 나올리가 없습니다. 오늘처럼 추운 날 뭐하려고 예배의 자리까지 나오겠습니까? 습관적으로 도적질하는 사람이, 습관적으로 나쁜 짓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몰려들기는 만무합니다.

이천년 전에 주님의 말씀을 듣던 청중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잘못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은 주님 앞에 나와서 들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 나오면 편한 걸, 무엇 때문에 나와서 들으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 때나 지금이나 주님 앞에 나오는 자들은 최소한 악행을 일삼는 자들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가 범하는 대부분의 죄는 악행을 하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선행을 하지 못한 죄가 주종을 이룰 것입니다. ‘내가 무슨 큰 죄를 저질렀나?’하고 이렇게 나오기 시작하면  여러분은 항상 옳습니다. 맞습니다. 저지른 것도 없고 그렇게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심각하게 다루어야 하는 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선한 일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나와 예배하면서 도적질하고 간음하는 사람들처럼 나쁜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만족해서는 착각입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공동체의 수준은 악행을 그만 둔 상태가 아닙니다.

주님은 자기 피로 사신 신앙 공동체가 세상에서 선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도록 원하시는 그 일을 하기를 선한 일을 행하기를 하나님께서는 기대하십니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고 역설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산위에 있는 동네와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슨 죄를 지어도 큰 시비 붙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보고는 우리가 조금만 잘못해도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그러느냐고 당장 말합니다.

그러고 보니까 주님도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있는 기대도 높지만 세상도 우리를 향해서 높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가 봅니다. 자기들 수준으로 우리가 놀면 그래 가지고 예수 믿으나 마나라고 핀잔을 줍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수준은 높습니다. ‘악행을 멈추라’는 수준이 아닙니다. 선행을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선을 행하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죄다.’라고 말씀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한 행위를 중단한 사실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선한 행위를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불쌍한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을 먹은 사실이 여러분을 선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가끔 그렇게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자기는 불쌍한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그런 착한사람이라고 착각하더라고요. 도우려고 했다는 사실은 도울 마음을 먹었다는 사실은 잘 생각해보면 ‘돕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돕고 싶었는데’라는 말은 돕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어떤 상황을 들었을 때 보았을 때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여가지고 ‘도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주셨는데 불구하고 여러분은 그 주신 마음을 짓눌려 버렸다는 말 외에는 되지 않습니다.

‘내가 도우려고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 결코 심판 날 여러분에게 도움 되는 판정을 내리도록 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 이상 도우려고 했다는 것  가지고 만족하지 마십시오. 내가 그때 돕고 싶었다고,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그때 돕지 않았다는 것을 뜻할 뿐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아시지요?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 되지 못한 것은 제사장, 레위 인이 무슨 악행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강도만난 자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도움의 손을 내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쓰러져 있는 사람을 짓밟고 지나간 것이 아닙니다. 다만 멀리 피해 갔을 뿐입니다. 조용히 자기 길을 계속 갔을 뿐입니다. 피 흘리고 쓰려져 있는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기 보다는 빨리 가서 내일을 해야지 하고 레위인도 생각했고 제사장도 난 빨리 가서 제사에 수종을 들어야지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교회 일에 너무 바빠서 고통 중에 있는 이웃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했을 뿐입니다. 교회에 가는 일에 열심을 낸다고 이웃에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볼 여가가 없었을 뿐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강도질한 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 악행을 그만 두라고 권면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지금부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면 나 같은 처지에서는 남을 도울 수 없을 줄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보다 잘 사는 사람들만 바라보고 살면 가난한 사람들이 눈에 안 들어옵니다. 언제나 교회를 와도 자기보다 잘 입은 사람들, 자기보다 큰 차타고 오는 사람들만 눈에 들어오겠지요. 새 차 바꾼 사람들만 눈에 들어옵니다. 아직도 버스타고 걸어오는 사람들은 안 보이잖아요. 자기보다 잘 사는 사람만 바라보면 나도 언제 저렇게 되어서 여유롭게 한번 도와보지 그렇게 생각하면 기회가 잘 오질 않습니다. 조그만 방 한 칸에 다섯 식구들이 살고 있는 것을 만나보십시오. 그러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제가 귀국을 했을 때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4~5학년이었습니다. 방이 좀 길게 되어있는 방이긴 했지만 가운데 미닫이문을 떼어놓고 있으니까 한 방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저희는 1.8미터 되는 방에서 두 사람이 살았고 개척교회를 했으니까 한 평이었습니다. 한 평이지만 누워보면 그래도 문갑 놓고 누울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그런데 할머니는 저에게 빨리 불을 끄기를 원합니다. 그렇지요?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불평을 하더라고요. 주거 환경에 대해서 어느 날 큰 아들이 자기 친구 집에 갔다 오더니 친구 집에서 보았던 것이 굉장히 충격이었던가 봐요. 그 집에는 가니까 방이 하나밖에 없고 작은 방에 온 식구가 다 살고 있는 거예요. 그다음부터는 불평하지 않더라고요,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라고 분부하십니다. ‘너도  그와 같이 하라.’ 삶의 여정을 다 걷고 난 다음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물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마지막 판단하실 때 악한 일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여부로 판단하질 않습니다. 그날 마지막 심판 때에는 어떤 선한 일을 했는지 물어 오실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살펴보십시오. 무덤 저편의 세계에서 고통 중에 부자가 있는 것은 그가 부자로 살았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부자로서 흔히 받는 유혹에 넘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부를 바로 사용하기를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진 부로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돕는 대신에 자기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 부를 가지고 칸막이를 설치한 것입니다. 담을 높이 올리고 육중한 대문을 달고 거기에 무서운 개를 풀어서 자기의 잔치 상에 감히 가까이 나사로가 나오는 일에 원천봉쇄 했던 것입니다.

그 삶의 태도가 죽음다음에도 그를 파멸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나사로가 건너와서 나에게 혀끝에 물 한 방울로 서늘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부자와 나사로 사이는 엄청난 간격이 있었습니다. 건너갈 수 없습니다. 자기가 설치했던 그것이 자기를 도움 받지 못하는 수렁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생뿐 아니라 내세까지 자기가 만든 장벽으로 자신이 구원받을 기회마저 박탈당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최후의 심판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세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그중에 어느 것 하나 특별하게 악한 죄를 지어가지고 저주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깥 어두운 데 던져라 거기서 슬피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런 충고를 받은 사람들은 보면 한사람도 그렇게 악행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첫 비유가 뭐지요?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다섯 처녀는 지혜로워서 기름을 준비했고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문을 열어주소서!” 두드린 처녀들이 다섯 처녀가 무슨 특별한 악을 행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밤중에 도착하는 신랑을 맞이하는데 필요한 등불의 기름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슬기롭게 예비하지 못한 미련한 행동의 대가로서 영원한 파멸을 맞이한 것입니다. 첫 비유는 하나님께서 물으시는 첫째 질문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어두운 밤에 시간이 오래되어도 그 불을 밝힐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런 일을 돕기 위해서도 우리는 두 달에 한 번씩 주보에 늘 광고가 실리잖아요. “복 있는 사람”을 할인된 가격으로 사무실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보에도 실려 있지요? 주님과 여러분의 관계를 좀 원활히 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이번엔 또 특별히 성경통독 세미나를 준비했습니다. 내일 10시부터 시작하는 여섯 차례에 걸친 이 세미나는 여러분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은 한번 시간을 내십시오. 그렇다고 지난여름에 어떤 형제처럼 단기 선교여행 간다고 직장을 사표내고 갔다 와서 아직도 취직을 못해 있으면 담임 목사로서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심방보고를 받을 때 마다, 그러지 마시고 직장 그만두고 내일 10시에 참석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는지 그것이 첫 번째 질문입니다. 달란트 비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깥 어두운 데로 내 던져진 한 달란트 받은 종의 경우를 살펴보십시오. 그 종이 무슨 특별한 악을 행한 것은 없습니다. 그 한 달란트 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고 그런 적은 없습니다. 그걸 가지고 무슨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일을 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남의 이름으로 아파트청약을 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 적이 없습니다. 그렇잖아요. 우리가 얼굴을 모를 뿐이지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아파트청약을 두 개 세 개 하게 되면 그만큼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돌아간다니까요?  이 사람은 그 한 달란트 가지고 그런 잘못을 범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꽁꽁 묻어두었을 뿐입니다. 악용한 적은 전혀 없습니다. 생산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 한 달란트 가지고 이 처럼 어려운 세대에 뭔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장 시켜 놓은 것이 그의 잘못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향하여 충고 했습니다. ‘저 악하고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던지라’고.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면 이 사실이 더욱 분명해 집니다. 영광의 심판 보좌에 주님이 앉으실 때 세상 만민들이 나아올 것입니다. 그들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우선 특징은 악행을 안 사람들과 악행을 하지 않은 사람들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베푼 사람과 자비를 베풀기를 실패한 사람을 나눈다고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자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자기 생각대로 그냥 받아들이는 겁니다. 간음하면 큰일 날 죄, 직분을 박탈할 죄라고 생각하면서도 부모를 공경하라든지 예배일은 거룩히 지키라 는 말씀은 적당하게 넘어가도 괜찮을 것처럼 자기 기분대로 믿는 겁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주님이 바깥 어두운 곳에 던지라고 선언하셨던 것은 무슨 악행을 저지른 죄목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다만 선행을 행한 기록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사람을 봤을 때도 ‘열심히 일 안해서 그렇지’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을 보면  ‘요즈음 같이 입을 옷 많은 시절에’라고 내어 뱉습니다.

남의 처지에 한번 서 보십시오. 남의 신발 한번 신어 보십시오. 그렇게 좁은 방에 다섯 식구가 함께 살아 보십시오. 그러면 쉽게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다 자기 자식들은 잘해주고 싶고, 할 수만 있다면 딸에게 방하나 아들에게 방하나 주고 싶지요. 어느 부모가 그것을 원치 않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다만 형편이 안 될 뿐이지요.

승승장구하는 인생의 길에는 이해가 안 될지 모릅니다. 머리가 나빠서, 게을러서 그럴 거라 생각하지만 세상은 꼭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코너로 몰리기도 합니다. 마귀와 그 사자를 위해서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던져진 사람들은 죄목이 길어서가 아니라 선행을 한 목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나! 그렇게 강변하기 시작하면 여러분은 괜찮습니다. 압니다. 모두가 다 압니다. 여러분이 무슨 큰 악행한 사람이 여기에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 각 사람의 행위를 엄숙히 물어 보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과 생각 말과 행위를 드러낼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너는 세상을 살면서 너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어떻게 하고 살았느냐?’ ‘타인의 처지를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준적이 있느냐?’

겹겹이 자기 야망으로 싸여서 다른 사람의 형편에 대해서는 눈감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 주님, 언제 우리가 주님의 배고픈 것을 보았습니까? 주님이 언제 헐벗은 적이 있었습니까? 아픈 것을 보았습니까? 병든 것을 보았습니까? 감옥에 갇힌 것을 보았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있는 것을 보았다면 내가 절대 그냥 지나쳤을 리 만무한데요. 저는 교역자들을 섬기는 일에 늘 앞장을 섰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런 처지에 있는 것을 보고 제가 그냥 넘겼을 리 없습니다. 주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여정 곳곳에 주어진 선행의 기회를 붙잡았는지 물으실 것입니다. 실천하지 않은 선행은 죄임이 들어날 것입니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고 끝맺습니다. 실천하지 않은 선행은 무가치 합니다. 그날 여러분을 구할 수 없습니다. 실천하지 않는 선행은 죄악입니다. 그날 주님이 그렇게 선언하실 것입니다.

스스로를 신자로 여긴다면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은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악행을 그친 것으로 자부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신을 성도로 간주한다면 선행을 베푼 일이 있는지 살피십시오. 하나님이 내 인생 노정에 보내신 어려운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돌려보냈는지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동료 인생의 고달픈 처지를 보살핌으로서 주님의 제자 됨을 나타내십시오. 대개 신자들은 하지 않아야 할 악행을 저지르기보다는 마땅히 베풀어야 할 선행을 실천하기에 실패합니다.

꼭 명심하십시오. 모르고 악을 행한 것도 죄입니다. 그러나 알고 선을 행치 않은 것도 죄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한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은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으면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적극적으로 한번 생각해 볼까요? 여러분이 알고 있는 선한 일을 실천하면 세상이 어떻게 변할까요? 여러분 마음속에 성령께서 주신 부담에 따라서 선한 일에 여러분이 동참하게 되면 여러분의 주위가 어떻게 달라 질수 있을까요?

저는 우리 울산교회가 울산교회 성도들 때문에 100만 울산시민들이 위로를 받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무슨 TV에나 신문에 나오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여러분 때문에 정말 낙심된 처지에 있었던 사람들이 생사의 마지막 기로에서 고민하던 사람이 위로를 받고 빛을 발견하고 그럴 수 있으면 우리가 부르듯이 울산교회 좋은 교회로 자리할 것입니다,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하는 100만 시민들이 울산에 살게 된 것에 대해 울산교회 성도들이 이웃을 하고 산 것이 그들의 생애를 갈라놓는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눈에 눈물을 씻기고 그들의 입의 한숨을 잠재울 수 있는 그런 일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십일조를 내고 선교헌금을 내고 감사헌금을 내는 일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일예배를 참석하고 수요기도회에 금요기도회에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것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예배하러 가다말고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돕는 일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람들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칭송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산위에 있는 동네와 같습니다. 악행도 드러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특히 목사들의 잘못은 신문이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더라고요. 그러나 선행도 드러날 것입니다. 선행도 감춰질 수 없습니다. 마음먹고 주님 섬기는 마음으로 우리가 살아가면 우리의 선한 일도 언젠가는 밝혀 질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을 통해서 진리를 실천하는 빛이 비취기 시작하면 세상은 밝아질 것입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에 칭송이 돌아가게 만들 것입니다.

이제 울산교회는 그 일을 위해서 지난 년말에 밝은 미래 복지재단을 세웠습니다, 단순히 그 일이 좋겠다고 한번 생각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제 기억으로는 적어도 7~8년 전부터 당회에서는 자주 이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한때는 중구 노인 복지관을 위탁받아서 우리가 그 일에 참여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우리가 결정한 것이 년 1억을 우리가 그 일에 이웃 사람들을 보살피는데 쓰겠다고 당회에 결정한 것이 당회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수탁이 되지 않았습니다. 울산광역시 후진성 때문에 공정한 심사를 받지 못했습니다. 북구에서 종합사회 복지관 건립이 되었을 때도 월드비전과 더불어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객관적으로도 우리가 탁월하게 나은 대도 불구하고 역시 지역에 있는 한 단체에  돌아갔습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이번에 서울에 있는 어떤 복지계에 일하는 사람하고 이야기를 했더니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서울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울산은 버젓이 있습니다. 분명히 시장뿐 아니라 관계자를 만나고 구청장을 만나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라고 하며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 그럴 것 같으면 우리가 신청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결과는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수탁 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새로 만들자. 교회가 그동안에 하고 있는 모든 선한봉사 일들을 모두 결집시키고 이어서 체계 있게 잘 해 나가기 위해서 독립법인을 만들자 하고 당회에서 결정하고 공동의회에 붙여서 만장일치로 결정했습니다. 그렇지요? 우리가 이일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일을 할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기까지 밝은미래 복지재단을 영광의 주님이 이 땅에 오시는 날까지 할 것입니다.

등기가 누구의 이름으로 되어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대표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사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도 딴 마음먹고 할 사람 거기에는 없습니다. 교회는 악행을 멈춘 단계에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선행을 어떻게 하느냐? 어떻게 조직적으로 어떻게 효율적으로 할 것인지 그런 관점에서 복지재단을 우리가 새워서 하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 1~2년 사이에 지금 까지 교회가 했던 것 보다 더 훨씬 더 잘 하게 될 것입니다.

과정에 있어서 이런저런 문제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해결해 나가면 됩니다. 우리의 방향이 맞으면 우리의 방향이 옳았으면 과정이 좀 어렵더라도 같이 이해하고 참고 나가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똑똑하고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악한 사람들로 몰아가서는 안 됩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복지 재단에 어떤 이사들도 자기가 원해서 된 사람들은 없습니다. 교회가 맡아주기를 당회가 선정해서 되었습니다. 아무도 확신을 가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일들을 더 잘하게 될 때에 우리 하나님의 이름이 칭송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울산 교회는 울산교회는 지금 하나님께 감사해야 될 때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아서 분위기를 흐리는 일을 이 시간 이후로는 없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감사할 때이고 하나님께 찬송을 돌릴 때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그러나 주님은 적극적으로 말했습니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이 돌아가게 하라.” 그 일을 밝은 미래 복지재단을 통해서 우리는 협력해서 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울산에 특별히 이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이름이 칭송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시간의 여유가 있습니까? 그러면 감사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런 일들을 빨리 보여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복지재단으로 인하여 우리 울산교회 위상이 복음을 전하는데 훨씬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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