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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년아 일어나라 (눅 7: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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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문기태 목사

(눅 7:11)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다> 조금 뒤에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성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과 큰 무리가 예수와 동행하였다.
(눅 7:12)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상여가 나오고 있었는데,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런데 그 동네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상여를 뒤따르고 있었다.
(눅 7:13) 주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시며 울지 말라고 하셨다.
(눅 7:14) 그리고 앞에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 하셨다.
(눅 7:15)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그의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몇 주전에 어떤 교인이 VCD 한장을 한 번 보라고 아내를 통해 전해주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요즘 책으로도, VCD로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잘 알려진 다큐멘터리였습니다. 좀체로 시간을 내지 못하고 미루다가 엊그제 보고서 참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은 최춘선할아버지인데 8순의 나이에 사계절 맨발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을 전한다기 보다는 선지자처럼 온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춘선 할아버지는 젊은이만 보면 Miss korea! 유관순! 진짜 유관순, 가짜 아니고 진짜. Why tow korea? 하고 외칩니다. 또는 Mr korea! 안중근! 진짜 안중근! Why tow korea? 하고 외칩니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진짜 안중근이나 유관순같은 정신을 가지고 살면 왜 나라가 두 개로 갈라져 있고 통일이 되지 못하고 있겠느냐?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남북 통일이 될 때까지 신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니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를 가장 절망하게 하는 것은 이 땅의 청년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이 땅에서의 청년들의 죽음은 몇가지 현상으로 집약될수 있습니다. 첫째는 청년 자살율의 급속한 증가(경찰청 통계/1일-36명/그중 20명이 20-40대)요, 둘째는 청년 실업률의 증가(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고, 셋째는 청년들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무관심이야말로 죽음의 징후인 것입니다. 죽은자는 더 이상 아무일에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과연 이땅의 젊은이들이 살아나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이 앞섭니다.

이 시대 죽어가는 젊은이들이 다시 살아나 일어서는 길은 복음의 능력뿐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운 보혈의 권능이 그 심장에 닿아야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의 쾌락과 죄의 권세에 붙잡혀 깊이 잠든 이 땅의 젊은이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의 권세에 붙잡혀 살아나는 그 날이 속히 오기를 함께 우리 모두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보혈의 강물이 흘러가고 구원의 능력이 임하여 저들이 일어나 사명과 비전을 품고 뜨거운 가슴으로 민족과 열방을 위해 젊음을 쏟아붓는 그날이 속히 오기를 쉬지 말고 기도합시다.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죽어버린 한 청년을 다시 살리시는 기적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어떤 한 과부의 독자였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과부의 외아들의 죽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들이 유일한 소망이었던 이 외로운 어머니에게 이 외아들의 죽음은 문자 그대로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죽어 나가던 상여행렬은 문자 그대로 절망의 행진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한 순간 이 절망의 행진이 멈추고 이 행진은 희망의 행진으로 바뀝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께서 이 청년을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무엇이 그를 다시 일어서게 하신 것일까요? 이 시대 이 땅에 죽어있고 깊이 잠들은 젊은이들을 예수님께서 다시 일어서게 하시기 위해 무엇을 사용하시고자 하실까요?

1. 사랑의 마음입니다.(13)

어느 교회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성도들에게 미워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셨답니다. 나이 많은 한 할아버지가 혼자 손을 드시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다시 "아니 할아버지는 정말 미워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셨습니까?"했더니 할아버지 왈 "아니 옛날에 많았는데, 다들 죽었지"
사람들은 대부분 미운 사람, 보기 싫은 사람, 복수하고 싶은 원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미움, 증오, 분노가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런 부정적 감정이 표출되어 사람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힙니다. 그렇게 상처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좌절과 낙심,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립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미움이라면 사람을 살리는 것은 사랑입니다. 주님은 형제를 미워함이 곧 살인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미움은 이웃을 죽일뿐 아니라 자신을 동시에 죽인다는 사실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미움으로 자신과 이웃들을 파괴해 왔는지요? 미움은 독입니다. 미움의 독이 우리안에 퍼지기 시작하면 우리의 신경체계를 파괴해 버립니다. 우리 육체뿐 아니라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기도를 방해하고 하나님과의 장벽을 만들어 응답의 장애물이 됩니다.
무엇이 죽은 이 청년을 살려 냈습니까?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과부를 보시던 그 눈은 어떤 눈이셨습니까? 사랑의 눈, 긍휼의 눈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심리학자가 두 개의 화분에 같은 종류의 화초를 놓아두고 같은 조건에서 하나에게는 사랑의 눈길을 주고, 또 하나에게는 미움의 눈길을 주면서 변화를 관찰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랑의 눈길을 받은 화초는 그렇지 않은 화초보다 시간적으로 네배나 더 긴 시간동안 생명을 지속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무엇이 오늘날 죽어가는 이 땅의 청년들을 다시 살려 낼까요? 예수님의 사랑뿐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가족, 자녀, 이웃들을 살려 낼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뿐입니다. 그 사랑만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라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사랑이 바로 해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으로 직접 그 사랑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죽어가는 모든 젊은이들로 예수님의 참 사랑을 우리의 수고 그리고 희생과 헌신을 통해 알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서두에서 최춘선할아버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최춘선 할아버지가 전도를 하려고 버스에 올라탔는데 미치광이라고 운전기사가 밀어버려 차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럼에도 목발을 짚고 나와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기자가 묻습니다. "할아버지, 그 운전기사가 밉지 않으세요?" "나는 아무도 미운 사람이 없어. 다만 불쌍하게 생각될뿐이야"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면 원수도 불쌍하게 보입니다. 스데반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주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하는 기도를 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죽은 사람을 살리는 삶을 살려면 미운 마음을 사랑하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마음이 죽은 젊은이와 죽어가는 젊은이들을 향해 부어지면 그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꾸고 우리의 눈길을 사랑이 가득한 눈길로 바꾸어 이 땅에서 살리는 역사를 일으키도록 하십시다.

2. 사랑의 손길입니다.(14)

이 청년을 살려내는 일에 주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라고 기록합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라면 두가지 절대로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문둥병자이고, 또 하나는 시체였습니다. 유대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율법의 절대 금기사항입니다. 지도자인 랍비의 책임가운데 하나는 이 두가지를 사람들이 만지지 못하도록 격리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유대인의 랍비로서 이 두가지 규칙을 다 깨트리고 만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들을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죽은자의 시체를, 관을 만지신 것입니다. 그러자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얻고 일어섭니다. 죽은자가 새 생명을 얻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의 손길의 만지심이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 만지심의 기적이야 말로 사랑의 기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곧 만지심이기 때문입니다.

카톨릭 사상 가장 선한 목자요 평화의 사도로 평가받는 요한 23세의 일대기에 보면 이런 에피소드가 소개됩니다. 그가 한 고아원에 방문했을 때 훈련받은 대로 "교황이여 만수무강하소서"라고 소리치는 아이들속에 전혀 움직이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 차라리 그 눈에 적대감이 가득차 있는 한 아이를 발견합니다. 사실 아 아이는 모든 방법을 다해도 수녀 선생님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었던 말썽꾸러기 아이였습니다. 수녀들은 당황하고 있었지만 교황은 조용히 다가가서 아이를 두팔에 안고 오래 동안 꼭 껴안습니다. 처음에 다소 저항하는 듯 하다가 아이의 뺨에는 잠시후 눈물이 흐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주변 사람들이 한번도 본일이 없었던 밝은 미소가 그의 볼에 번집니다. 그러더니 아이는 교황을 바라보며 "교황님 만수무강하소서"라고 인사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후 이 아이는 완전히 변했다고 합니다. 교황이 고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황의 손길을 통해 아 아이에게 다가선 예수님의 손길, 예수님의 터치가 이 아이의 상처를 치유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3월 1일날 진해교회당을 빌려 알파 수양회를 하였습니다. 마지막 순서에 세족식을 하였습니다. 운영자가 목사님은 사람들이 부담스럽게 생각하니까 오늘은 빠지라고 해서 아쉬웠지만 구경만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많은 사람들이 세족식을 통해 발씻김을 받으며 울었습니다. 게스트의 발을 붙잡고 씻겨주는 이들도 울었습니다. 단순히 눈에 눈물이 흐르는 정도가 아니라 마구 흐느끼는 것이었습니다. 다 큰 남자들이 우는 것을 보셨습니까?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모두 울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옆에서 세족식을 하며 발가락 사이의 때까지 꼼꼼하게 닦아주는 것을 보며 웃다가 자기의 발을 씻기는 손길이 닿자 웃음이 갑자기 울음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왜 울었을까요? 모두가 비슷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섬김이의 손을 통해서 예수님의 손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품고 발을 만질 때 전에 없던 감동과 감격이 밀려왔던 것입니다.

아픈 사람의 손을 잡고 기도할 때 사랑으로 가득한 손길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낙심자, 슬픔을 만난자, 새 신자, 연약한 자를 만날 때 의무적이고 형식적인 손을 내밀지 말고 사랑으로 가득한 손길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손을 내미는 순간 여러분의 뻣뻣한 손이 예수님의 못자국난 손으로 바뀌게 되고 그 순간 능력이 나타나고 치료의 역사가 일어나며 위로의 역사가 일어나 그 손을 통해 기적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무관심의 손길이 아닌 사랑의 손길로 죽어가는 것들을 만지시기를 바랍니다.

3. 사랑의 말씀입니다.(14하)

본문에 의하면 결정적으로 이 청년이 일어난 것은 주님이 이 청년에게 말씀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살렸습니까? 말씀이었습니다. 단순한 설교나 도덕 강론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처방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이 살린 것입니다. 말씀이 처방이고 말씀이 해답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떤 분들은 도대체 말씀이 무엇이기에?라는 반문을 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이 가득한 예수님의 말씀은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사람을 정죄하기 보다는 용서의 확신을 갖게 하십니다. 좌절하게 하기보다는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요한복음 5:25에서 이 말씀이 죽은자들을 다시 살리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 요한복음 11장에서는 죽은 나사로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나사로는 무덤을 열고 살아 나왔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는 이제는 죽은 청년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리고 청년은 살아 일어났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이 죽었을 때 예수께서 그녀에게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말씀으로 장년도 청년도 소녀도 일어났습니다.

영적으로 죽은자가 다시 살아나는 사건도 육체의 부활이상의 사건이요 기적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채 하나님없이 살던 영혼들에게 말씀이 들려오는 순간 사람들이 예수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새인생의 길을 걷는것-이것이 바로 영혼의 소생이요, 영혼의 일어섬이 아니겠습니까? 영혼이 살면 육체가 삽니다. 육체적인 질병이 문제가 아닙니다. 직장이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심각해도 예수님이 사랑의 말씀으로 다시 살리면 간단합니다. 절대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것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문제는 사랑으로 가득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귀에 들려오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 말씀이 들려져야 합니다. 죽은 영에게 들려와야 합니다. 여러분 설교를 들을 때 예수님의 음성이 들립니까? 문목사의 음성만 들립니까? 예수님의 음성과 문목사의 음성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여러분에게만 말슴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있습니까? 강한 찔림이 있고 회개가 나옵니까? 말씀을 들으며 강한 감동이 오고 마음이 뜨거워지며 영적으로 살아나는 느낌이 생깁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그 말슴이 여러분을 죽음과 절망으로부터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 말씀을 주변의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여러분 주변의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살아나고 일어날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일어납니다. 한계를 극복하고 능력 있는 인생, 소망이 넘치는 승리의 인생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절망한 베드로는 옛생활로 돌아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오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사랑의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명을 잘 감당하여 초대교회의 위대한 지도자로 쓰임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음성이 들려지면 다시 살아납니다. 이 땅의 청년들이, 우리의 자녀들이 살아나려면 주님의 말씀이 들려져야 합니다. 그들에게 말씀이 임하도록 더욱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우리 주변에는 죽이는 눈길, 죽이는 손길, 죽이는 음성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들이 너무나 허무하게 죽어가고 잇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죽어가는 것들과 이미 죽은 것들을 향해 사랑의 눈길, 사랑의 손길, 사랑의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살려내셨습니다. 여러분도 살기를 원하시면 예수님의 사랑의 눈길과 사랑의 손길, 사랑의 말씀에 자신을 맡겨 생명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향해 예수님께 받은 사랑의 눈길과 사랑의 손길, 사랑의 음성으로 살리는 역사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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