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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에 기록된 기쁨 (눅 10: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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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 교 자 : 오창우 목사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오늘도 큰 사랑으로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순절이 시작이 됐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우리를 돌아보는 계절입니다. 여러분 뭘 생각하시겠습니까?
어떤 묘비에 이런 글이 써있었다고 합니다.
세문장이 있는데 첫째는 나도 당신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어요. 묘비에 그 글이 써있으니까 읽지 않겠어요? 그 글을 보고 웃었습니다. 두 번째 문장에는 뭐라고 써 있었냐면 나도 전에는 그곳에서 당신처럼 웃고 있었어요.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하시오.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세요?
잘 죽어야 한다는 말은 잘 살아야 한다는 말 아니겠어요? 잘 사는게 뭡니까? 일 많이 하는 겁니까? 아니면 성품이 좋은 겁니까? 예수믿는 사람중에서 말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서 해야 될 관심 또 우리 삶 어떤 것이냐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는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셨습니다. 칠십 명을 두 명씩 짝지어서 전도하러 보냈어요. 전도는 성경이 우리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전도해야 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보고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보고하는 내용이여 이겁니다. 제자들이 전도할 때 귀신이 주의 이름으로 항복하는 것을 보고 기뻤습니다. 귀신이 예수의 이름으로 항복하는 것을 보더니 너무나 기쁘다는 거에요. 여러분 귀신이 항복했다는 거 대단한 일이죠? 귀신이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요?

혹시 무당 굿하는데 가보셨습니까? 이 귀신이 귀신같이 알아보는 게 뭐냐면 예수 믿는 사람을 알아봐요. 얼마나 기가 막히게 아는지 예수쟁이 왔다고 빨리 가라고 말이야. 예수쟁이 때문에 신이 안 내린다고 해요. 여러분 예수믿는 어린아이 하나만 있어도 벌벌 떨어요. 왜? 신 안내린다고요. 귀신 별거 아니에요.
전에 부목사로 섬기던 교회에 한 여집사님이 무당귀신이 들었어요. 그런데 귀신들려서 못살겠다는 거에요. 왜 못살겠냐고? 그러면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형편을 보게 된다는 거에요. 지금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런데 보는 것은 좋은 것이 보이는 게 아니라 나쁜 것만 보인다는 거에요. 남편을 봐도 나쁜 것만 보이고... 이 귀신이여, 악한 영, 분열의 영입니다. 싸움의 영이거든요. 그러니까 사람의 나쁜 것만 보게 되고 비판하게 되고 정죄하게 되고 그래서 자기 때문에 분란이 일어나 가지고 깨진 가정이 몇몇 있다는 거에요. 사람이 살 다 보면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 있잖아요. 그래서 괴로운 거에요. 그럼 자기 자신을 보면 어떠냐. 자기 자신은 안보여요. 남만 보이는 거에요. 남만... 그래가지고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워서 ‘이거 안되겠다’ 해가지고 큰 무당을 찾아가봤더니 큰무당이 하는 말이
“예수귀신 믿으면 돼”
그러더래요. 그래가지고 예수 믿어가지고 귀신 쫓아내고 믿음생활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몰라요. 쌀장사하셨는데 봉사 참 많이 하셨어요.
귀신! 이런 귀신이 예수이름으로 하니까 항복하는 거에요. 근데 귀신 쫓아내는 것이 예수믿는 사람들에게 있는 능력이에요. 오늘 성경에 그거에 대해 말씀하고 있거든요. 본문을 보면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면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켤코 없으리라.” 아멘

제자들도 그러했으니까 우리도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귀신이 항복하는 기쁨보다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셨어요. 여러분 20절 말씀에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아멘
말씀을 좀 정리해 보면 우리에게는 두가지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귀신을 항복시킨 기쁨입니다. 제자들의 기쁨이에요. 내가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미쳐 몰랐거든요. ‘내 능력으로 귀신을 쫓았다.’ 초점이 나에게 있어요. 내가 대단한 사람이구나! 대단한 사람이다. 근데 예수님이 “귀신이 항복한 걸로 기뻐하지 말고” 라고 그랬는데요. 나에게 초점을 맞춘 기쁨은, 나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쁨은 세상적이기 때문이에요. 필요해요. 그러나 세상적이라는 거에요.

에릭프롬이 세상적인 가치 평가는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시장성, 돈이 되느냐
둘째는 적응성, 얼마나 관계를 잘 갖느냐
셋째는 경쟁성, 얼마나 남보다 뛰어나냐

세상적인 가치에요. 이런 가치가 우리교회 속에도, 예수님 제자들에게도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본문의 앞부분을 보게 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가 더 크냐고 다퉜어요. 그거에 대한 해답을 말씀하고 계신거에요. 그 해답이 오늘하고 11장하고 12장하고 계속 나오고 있는 거에요. 제자들에게도 세상적인 가치가 들어와서 누가 더 크냐 그런 얘기를 하는 거에요. 세상적인 가치죠. 예수님이 이런걸 경계 하라는 거에요. 일을 하지 말라는게 아니라 일은 하지만은 그 일이 나의 능력을 드러내고 나에게 초점을 맞춰지게 되면 안된다는 거죠? 예레미아 9장 23-24절에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내가 가진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자랑하지요? 기뻐하지요? 그랬더니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하시잖아요. 강도만난 사람이 있고 다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제사장은 보고 그냥 지나가요. 레위사람도 그냥 지나가요. 무슨 의미가 있냐 말입니다. 그렇게 대단한 직분 가졌으면서 정말 죽어가는 사람 한번 돌아보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그 직분 뭐 자랑 할게 뭐가 있습니까? 세상적으로는 자랑할 일이겠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그 후에 마리아와 마르다가 나옵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대접하는데 마리아가 안 돕거든요. 불평하잖아요. 예수님의 말씀이 뭐에요. 그렇게 불평하거든 일하지 말라. 일하고 불평하려면 뭐하러 하냔 말입니다.
우리는 귀신을 항복시킨 기쁨, 소유된 기쁨 아니에요? 대단하죠. 그러나 이것이 기쁨의 전부가 되어선 안된다는 말이에요.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일류대학에 나와서 고시 공부를 했는데 고시가 안됐어요. 초등학교 교사 시험을 봤어요. 학교 교사를 하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일류대학 나온 것이 언제나 자랑거리고 자부심이 대단했죠. 고시에 떨어진 생각은 안했죠. 그러니까 아이들은 늘 100점을 맞아야 한다는 거에요. 90점을 맞아도 안되고 99점을 맞아도 매로 때리는 거에요. 왜? 나는 어려서 100점을 맞았다는 거에요. 옆에서 애들 엄마가 말렸어요. 90점 맞으면 때리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나는 당신이 삼류대학 나와 가지고 일류대학 나온 친구들한테 소개하지 못하는게 얼마나 챙피한 줄 아느냐구.”
그러면서 면박을 줬어요. 부인이 얼마나 미안하겠어요. 말 못하고 그냥 부엌으로 가서 일을 했어요. 애들을 또 때리는 거에요.
“너희들 엄마처럼 될라고 그러냐?”
그러면서 또 때린 거에요. 듣고 있던 부인이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 그래서 한마디 했다고 해요.
“그래 100점 맞아서 일류대학 나온 넌 잘된 게 뭐가 있냐.”
그러더래요. 그러면서 싸웠다고 하더라구요.

여러분 이 세상의 원하는 가치라는 것이 제대로 된 게 아니에요. 이번 한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는데 회계사, 변호사 이분들이 많이 안됐다고 하잖아요. 인천공단에 잘되는 중소기업이 있는데 이력서를 가지고 성적증명서를 가지고 뽑는데 기준이 뭐냐 F학점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거에요. F학점이 없는 사람은 안뽑는다는 거에요. 왜? F학점이 없고 올 A를 맞은 사람들은 데려다 놓으면 금방 딴 회사 간다는 거에요. 좋은 거 찾아서요. 감사할 줄 모르니까 그런 거에요. 자기는 F학점을 하나라도 있는 사람을 데려다가 쓴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충성한다고 그러더라구요.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은 대기업에 끝까지 남아있는 사람은 공부 조금 덜 한 사람이라고 하더라구요.
잘났어요. 너무 잘 났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 속에서도 어울리지 못해요. 하나님의 백성을 오죽하겠어요. 그러지 말라는 거에요. 일은 중요해요. 그러나 그 초점이 자기한테 가면 안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는 기쁨이 무엇이냐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기쁨을 말하고 있어요. 귀신을 항복시킨 기쁨은 소유의 기쁨이면 이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기쁨은 깨닫는 기쁨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은혜 가운데 가장 큰 은혜가 무엇이냐 깨닫는 은혜에요. 깨닫는 은혜요. 그러면 깨닫는 기쁨, 깨닫는 은혜는 무엇이냐?

두 가지 말씀드리려고 해요.

첫째는 감사하는 기쁨이에요.
따라하실까요? 감사하는 기쁨.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기쁨이에요.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한 장애인 부부가 아기를 갖기를 원했는데요. 쉽지가 않았어요. 아내도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두 번이나 아아를 가졌다가 자연유산을 했어요. 드디어 세 번째 아이를 가졌으니 얼마나 기뻤겠어요.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통증이 왔대요. 그래서 유산인가보다 하고 병원에 가보았더니 의사의 말이
“아닙니다. 생명이 살아있습니다.”
그러는거에요. 얼마나 기뻐요. 그런데 의사가 하는 그 다음 말이
“그러데 정밀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이
“아이는 세상에 태어 날수 있지만 태어나면 호흡 장애를 일을 켜서 15분도 못살고 죽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를 유산 시켜야 합니다.”
그러는 거에요. 뭐 무슨 내용인가 그랬더니 두뇌에 있는 뇌가 쑥 빠져나와서 머리 옆에 뇌를 담은 주머니가 있다는 거에요. 지난번에 우리나라에서도 뉴스를 잠깐 보니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아이가 있더라구요. 얘는 뇌가 튀어 나왔어요. 그래서 자꾸 주변에서 뭐라고 권고했냐면 이 아이가 태어나서 받은 상처를 생각하면 지금 해결을 해야지 받을 상처도 작을 테니까 포기하는게 어떻겠느냐고들 그랬어요.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떻게 해야됩니까? 그런데 이 부부는 포기할 수 없다는 거에요. 그리고 아이를 집으로 와서 아이 이름을 루카스라고 지었어요. 루카스가 무슨 특별한 뜻이 있나 해서 사전을 찾아 봤더니 별 뜻은 없고 그냥 ‘남자아이의 이름’이라고 하더라구요. 루카스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았는데 왜?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니까 위해서 그냥 기도해주고 찬양해주고 함께 대화를 하고 뱃속에 있는 아이니까 볼 수 도 없고 만질 수는 없었지만 느낄 수는 있기 때문에 꿈틀거리는 살아있는 느낌을 받을 때 마다 살아있는 것으로도 감격하고 감사했습니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렸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요, 선물이라고 그리고 감사와 감격으로 아이를 보았을 때 부부에게 이아는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이뻤다는 거에요. 아니나 아이의 뒤에는 다를까 뒤에는 뇌가 빠져나오는 주머니가 있었다는 거에요. 조심스럽게 의사가 넘겨주는 아이를 가슴에 안고 엄마는 조금이라도 부모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어린 핏덩이를 배위에 올려놓고 보물처럼 껴안아 주었어요.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어요. 아기 루카스를 집으로 데리고 온 부부는 아이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주었습니다. 서둘러서 목사님을 통해서 세례를 받게 해주고 위해서 기도를 해주고 조심스럽게 닦아주고 매일 같이 선물을 주고 이웃들을 불러서 작은 파티를 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루카스를 보면서 기뻐하며 사랑의 말 위로의 말을 던지면서 서로 위로했습니다. 루카스는 그렇게 딱 17일 살았습니다. 아기의 장례식이 진행되는 날 루카스의 아버지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루카스와 함께 했던 지난 9개월은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루카스와 얼마나 많은 대화와 사랑을 나눴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우리는 루카스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루카스로 인해서 비로서 아버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를 아버지로 만든 내 아들 루카스에게 감사합니다. 또한 루카스는 사랑하는 아들의 고통과 죽음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여러분 루카스 부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리석습니까? 경제적인 논리로는 어리석습니다. 투자는 많이 했는데 남는 게 없잖아요. 이게 뭡니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세상의 모든 것들을 경제적인 원리로 보고 있습니다. 얼마나 남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제 결혼한 가정이 있는데 이 새 가정이 경제적인 논리로 살면 되겠습니까? 이 사람 때문에 손해야, ‘이익이야’ 하고 따지면 되겠습니까? 학교에서 선생님과 제자가 이익을 따지고 교회에서 교인과 교인들과 목사와 교인이 이익을 따진다면 과연 이런 경제적인 논리를 따지는 이것이 진정 하나님의 뜻이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경제적인 논리로 우리 사람들을 대하셨다면 우리 중에 구원 받을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느냐 그 말입니까? 저 아무개를 구원시켜서 얼마나 이익이 될까? 하나님이 죄인을 위해 투자한 것이 아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나와 맞바꾸셨어요. 경제적인 논리로 보면 가당치도 않는 원리입니다. 사랑으로 보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루카스는 경제적으로 보면 아무런 가치를 찾을 수가 없어요. 아니 손해라구요. 그러나 사랑의 논리에서는 그 가치가 무한한 것입니다. 아니 돈으로 따질 수도 없어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구원을 위해 투자를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그 사랑이 살게 된 인생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라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깨닫고 감사하십시오. 감사감사..

귀신이 항복하는 것 보다 하나님 앞에 감사 할 수 있는 기쁨이 더 큽니다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는 거에요.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에 우리 모두에게 이런 사랑이 감격과 감사가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자들은 귀신이 항복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지만은 예수님은 귀신이 항복하는 것을 모습을 보고 기뻐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아 귀신들린 사람, 세상에서는 다 버림 받은 사람이지만은 그 사람까지도 하나님은 사랑하셨어요. 문둥병 걸린 사람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나한테는 손도 못 대게하고 가라고가라고하고 우리하고는 살 수 없다고 경리 시켜달라고 한 그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나가서 참 전도하고 선포할 때에 병이 나고 하나님은 문둥병자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일하실 때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일할 때에도 귀신을 쫓겨났어요. 귀신 들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정상적인 사람이 되었어요.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들이 나아가서 병든 사람을 치료할 때에 그 능력 나타나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을 증명하셨어요.

여러분!! 우리가 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우리들이 기뻐하는 게 뭐겠어요? 여러분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이렇게 하나님의 큰 사랑을 나타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이 왔다구요. 가정에서도 그래요.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내 남편이 힘을 얻고 내 아내가 힘을 얻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힘을 얻습니다. 할렐루야!! 이런 감사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하늘에 기록된 기쁨은 하나님의 사랑을 주는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기쁨입니다. 따라하실까요? 사랑하는 기쁨!! 사랑하는 기쁨!
죄송합니다. 나이가 들면서 부모님의 마음을 많이 헤아리게 되더라구요. 지난번에 우리딸 시집 보면서 옆에서 애쓰는 엄마가 있으면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많이 해줄까 해줄 수 없음이 너무 안타까워요. 아이가 병원에 입원 했을 때는 정말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더라구요.

한 친구를 만났는데 그러더라구요 조금 아팠다고 하더라구요. 자기 초등학교 5학년때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졌다고 그래요. 아버지를 얼마나 원망을 했는지 ‘저 아버지 때문에 내가 이렇게 인생을 망쳤다’고 그랬데요. 근데 내가 아파서 한달동안 병원에 누어 있어보니까 정말 아이들 보기에 미안하더랍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에 어떤 마음이 들었냐면 하는 말이 저 아이들이 이 아버지를 이 엄마를 얼마나 원망할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마음이 안타까운 것은 내가 저애들에게 보탬이 되는 것보다 짐이 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너무나 눈물이 나더래요. 그때 아버지의 마음을 알겠더라는 겁니다. 나는 아버지를 원망만했는데 그 아버지가 누어만 있어가지고 내가 저 애들한테 힘이 되지 못하고 짐이 되는 생각만 드니까 그때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울더라구요. 그때 내가 그랬구나. 이제서야 내가 알겠구나...

여러분 사랑을 줄 수 있는 기회, 이것은 부모가 되 봐야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 안에도 이게 있어요. 120여년 외국의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왔습니다. 우리가 와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오지 말래도 왔습니다. 우리나라사람들 선교사들을 보고 얼마나 놀렸어요. 핍박했잖아요. 외국사람이 남의 나라와서 사는게 얼마나 힘이 드는데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기후, 날씨, 언어, 사는 환경,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어요. 어느 선교사는 오자마자 풍토병으로 죽었어요. 이렇게 어려운 곳에 왜 선교사들이 찾아와서 아픈사람 고쳐주고 배고픈 사람 먹을 거 주고 배우지 못한 사람 가르쳐서 새사람 만들었어요. 여러분 왜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어서 그래요. 주고 싶은 마음, 그런 아버지의 마음이 그 안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문을 제가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에 우리나라에 왔던 선교사입니다. 초창기에 왔어요. 자 어떤 마음으로 선교를 했는지 기도문을 한번 보겠습니다. 그 마음을 헤아려보세요.

“뵈지 않는 조선의 마음 - 언더우드 -”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고 있지 않은 메마른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님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 사람들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 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릅니다. 고통이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사람들의 속샘이, 조선남자들의 속샘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신들이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주여!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할 일이 영영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에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날을 믿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에 증거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앞날을 볼 수 있기를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에 한 백성 한 자녀임을 믿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들일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 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렇게 기도를 했어요. 120년전 우리 한국땅의 모습이었어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메마르고 가난한 절망의 땅이에요. 어둠과 가난과 인습과 고통,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니까 고통이 고통인줄도 몰라요 의심부터 하고 멸시했단 사람이 화부터 냅니다. 사랑 받을 자격 없잖아요. 그런데 사랑받아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됐잖아요. 우리는 그분들의 사랑을 보면서 하나님을 봤어요. 하나님이 이렇게 사랑하시는 분이구나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았지요. 그리고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자랑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경제적인 논리, 법적인 논리로 묶어 놓겠어요? 한국 교인 숫자가 몇 명이냐, 교회가 몇 개냐, 얼마만큼 크냐... 대단하죠. 그러나 사람이 한거에요? 하나님이 하신거죠. 우리가 진정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감사할 수 있는 기쁨이 뭐에요? 하나님의 사랑이외에는 없어요. 하나님의 사랑 받은 은혜 감사합니다.

내가 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사랑을 줄 수 있는 기쁨이에요. 사도바울이 전도하고 싶었다고요? 개인적으로는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어요.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우니까 그러나 부득불 마지못해 할 수 없이 했어요. 왜?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니까. 여러분 뭘 자랑하시겠어요. 뭐가 그리 대단합니까?
신촌에 가면 세브란스 병원이 있잖아요. 원래는 서울역 앞에 있었는데 그 자리에 광혜원이라고 한국 최초의 현대식 병원 아닙니까? 그러나 시설이나 의료진이 형편이 없어요. 한국에 왔던 올리버 애븐슨 선교사가 이 사실을 캐나다 미국을 오가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렸어요. “천삼백만명이 사는 조선이라는 땅에 제대로 된 병원하나 없어 병원 세울 수 있게 도와주세요.” 사람들은 아마 미쳤다고 그랬을거에요. ‘그걸 왜 우리가 하냐고 그 사람들이 복 받아서 할 일이지’이렇게 했을지 몰라요. 여러분 우리가 누가 도와 달라고 하면 우리는 그 도움에 ‘아이쿠 왜 그러니 열심히 일해야 살지’
만약에 선교사들이 와서 우리에게 그런 마음을 가졌었다면 선교사가 오지도 않았고 우리의 한국의 모습은 이런 모습을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주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요

죄송합니다. 저는 나이가 들면서 인생 70-80 살아온 분들이 대단합니다. 어떻게 그 인생을 살아오셨는지. 인터넷 신문을 보니까 줄기세포가 연고되게면 사람은 1000살까지 산다고 하더라구요. 그 보면서 1000살을 살면서 뭐하고 살지. 뭐하고 사시겠어요? 오늘 우리 예수 믿었잖아요. 그랬더니 천삼백만명이 사는 이 조선땅에서 내가, 내가 희생을 하겠습니다. 와서 본 일도 없고 내가 부탁한 일도 대접받은 일도 없는데 루이스 세브란스라는 분이 만불을 기부하셨어요. 우리는 그 세브란스 병원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어요.
여러분 나를 보면서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길 원하세요. 축복받았네. 돈 벌어서 축복았다. 세상사람들도 얼마든지 그런 걸로 축복받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하늘에 기록된 기쁨입니다. 야!!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구나 누구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귀신이 항복한 것을 보고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러나 그 보다 더 귀한 기쁨은 하늘에 내 이름이 기록된 기쁨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 지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겁니다. 그 사랑이 나를 움직여서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 백이는 그런 기쁨, 그래서 나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서 예수 믿어야지 하는 그런 좋은 인격자들이 되 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507장에 보면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자 그맘에 평강이 찾아옴은
험학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주모습 내눈에 안보이며 그 음성 내귀에 안들려도
내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을 늘 배우도다

가는길 거칠고 험하여도 내맘에 불평이 없어짐은
십자가 고난을 이겨내신 주님의 마음 본 받음이라

주예수 세상에 다시 오실 그 날엔 뭇성도 변화하여
주님의 빛나는 그 형상을 다 함께 보며 주 찬양하리

(후렴) 주님의 마음 본 받아 살면서 그 거룩하심 나도 이루리

예수 믿으면서 평강을 찾을 수 있는 게 따로 없어요.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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