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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께서 나를 아실까요? (마 7: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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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오주철 목사

어느 날 군에 간 아들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제가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어머님 전상서. 어머니, 저 영철이에요. 그 동안 안녕하셨죠? 전 어머니 염려 덕분에 몸 건강히 지내고 있습니다.
근데 어머니, 저 돈이 급히 좀 필요하게 됐어요. 이번에 야전훈련 나갔다가 박격포를 잃어버렸거든요. 20만원이거든요. 박격포탄 1개값 3만원 포함해서 23만원이에요. 빨리 좀 보내주세요. 안 그러면 저 거의 죽음이에요.
저는 그래도 나은 편이에요. 같은 소대의 어떤 놈은 이번에 탱크를 잃어버렸대요. 야전훈련 나갔다가 담배가게 앞에 세워놓고 잠시 전화를 하러 가게에 들어간 사이 누가 훔쳐서 끌고갔대요. 걔네는 거의 집 팔아야 할 거예요. 어머니는 군생활 안 해보셔서 잘 모르시죠?

군생활이 은근히 돈이 많이 들어요. 저는 무척 절약하는 편인데도 의복값, 식대, 숙식비, 의료비 등 돈들어 가는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거든요. 제가 야간 근무수당 등으로 근근이 버텨 나가고는 있지만 좀 힘이 드네요.
어머니, 이제 제대까지 1년반 정도 남았네요. 이제 천만원 정도만 있으면 군생활도 무사히 끝날 수 있을 거 같네요. 그럼 다시 뵙는 날까지 안녕히 계세요.
ps. 참, 제 계좌번호는 알고 계시죠?"

아들의 편지를 본 어머니가 군에 있는 아들에게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RE: 영철이 보거라. 니 형 영팔이가 해병대 갔다온 걸 모르고 있구나. 너 휴가 나오면 반 정도 죽일 거라고 벼르고 있더구나. 나도 니 에미지만…. 이번 형의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단다. 그럼 휴가 때 보자꾸나."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사람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발견되면 가차없이 붙들어 사용하십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필요한 사람의 조건이라고 하는 것은 시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환경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대상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래서 상대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시는 조건은 언제나 절대적입니다.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해도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조건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쓰실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앞에 쓰임 받기를 간구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령의 주권을 믿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갈망하는 사람을 들어서 쓰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은 사건의 연속입니다.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나고, 어렵고 미묘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됩니다. 오직 여호와의 신이신 성령으로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지명을 느끼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때마다 시간마다 당나귀를 지명하여 쓰듯이 우리를 지명하십니다. 그 지명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런 일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 앞에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내 삶도 지명하시옵소서. 마른 막대기를 지명하여 홍해를 가르셨던 하나님, 오늘 나를 지명하여 주의 역사를 보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지명을 받고, 쓰임 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람의 일생은 분기점에서 결정된다"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는 어떤 극적인 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행위에서 선택의 도전을 받고 있는 인간은 절대로 이 선택을 기피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이것이든, 혹은 저것이든 좌우간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성경에서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반드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존재임을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령, 신명기 30장 15절 이하를 보면, 모세는 이 세상에 있을 자기의 마지막 날이 가까워 오자 백성들을 불러모아 놓고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그러므로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여호수아 24장 15절에서 여호수아는 임종을 앞두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예레미야도 21장 8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다. "너는 또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하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

오늘 봉독한 본문의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분명한 선택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좁은 문이며, 좁은 길임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주를 따르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좁은 문이란, 어디까지나 좁다는 것이지 그곳으로는 아무도 못 들어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문을 통과하기가 어렵다는 말이지 전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좁다는 것은 그래도 들어갈 수는 있는 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러나 실상, 오늘날 세상은 우리들에게 넓음에 대하여 대단히 강조를 합니다.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걸어갈 수 있는 넓고 평탄한 길을 만들려고 합니다. 좀더 편하게 살고, 좀더 쉽게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넓디넓은 길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한다지만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주일 저녁 예배에 참석하고, 수요일 예배에 참석하고, 그리고 새벽 기도회와 교회의 여러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면서도 지금 내가 걷고 있는 넓고 편안한 이 길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이끌려진다고 생각들을 합니다. 그리고 이 길로 걸어가도 궁극적으로는 잘 될 것이라는, 종말론적으로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주장을 갖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은 문이요,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좁기 때문에 그 길을 걷는 자도 적다고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넓은 길로 우글우글 한다고 하십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좁은 길은 힘들고 매력이 없습니다. 이 길은 험난하기 때문에 택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그래서 외롭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은 수의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길로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가는 자가 많다고 했습니다. 그리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좁은 길이란 어떤 길을 말합니까? 좁은 길이란,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께서 가신 길입니다. 주님의 길은 고독의 길이었습니다. 배반당한 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충분히 피할 길이 있었습니다. 그 길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왜 그 길로 가야만 했을까요?

그 길은 좁고도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비록 그 길이 모든 사람들이 찾는 아름답고 평탄한 길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좁은 길로 가야만 합니다. 찬란한 영광이 없는 초라한 오솔길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왕되신 주님께서 가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에 가야만 합니다.

제가 옛날에 영덕에 있을 때에 안동으로 해서 서울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녁에 국도를 이용해서 서울 방향으로 가다가 수안보에서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잠시 잠을 청했습니다. 1시간 정도 잠을 자고 난 후에 운전을 하려고 하는데 짙은 안개 때문에 한치 앞도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있을 수도 없고 해서 비상등을 켜고 운전을 했습니다. 수안보에서 약간만 가다보면 7갈래길이 나옵니다. 제 딴에는 아주 신경을 이정표를 보고 서울 쪽인 장호원 방향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1시간 가까이 운전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이 길이 아니라는 겁니다. 뭔가 이상한 방향으로 차를 운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지금쯤이면 장호원을 지나서 이천으로 가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유소에 들러서 물었더니 서울과는 정반대 방향인 청주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를 다시 돌려서 오던 길을 되돌아서 서울로 가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평생을 달려왔던 그 길이 잘못된 길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그래도 살아있을 때에 깨달아서 돌이킬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입니다. 죽은 후에 내가 지나온 길이 잘못된 길임을 알게 되면 그 때는 너무 늦습니다. 지금 우리는 내가 선택한 그 길이, 혹은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이 올바른 길인지를 되돌아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후에, 곧 이어서 아주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21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봉독한 본문의 마태복음에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후에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면서 그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는 비유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후에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3장 24절 이하를 보게 되면, 여기에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을 하신 후에 곧 바로 이어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두 복음서의 차이를 말하자면, 마태복음은 저자가 마태입니다. 마태는 직업이 세리였습니다. 그는 그 직업의 특성을 살려서 예수님의 행적을 시간별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에서는 예수님께서 산에서 말씀하셨던 산상 복음이라는 주제로 모아져 있고, 13장에서는 천국에 관한 비유들로 모아져 있습니다. 그리고 24장에서는 종말에 되어질 여러 가지 사건들이 모아져 있습니다. 마태는 이렇게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주제별로 모아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은 직업이 의사였던 누가가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의사였던 자기 직업의 특성을 살려서 예수님의 행적을 시간별로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령, 마태복음에서는 산상 복음이 5장부터 7장에 기록되고 있는데 반하여, 누가복음에서는 여러 곳에 시간별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행적을 시간대로 이해하려면 누가복음을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십시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은 좁고 험해서 찾는 사람이 적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여기에서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구원받는데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분은 누가복음 6장 46절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여기에서 우리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문제는 우리가 '주'를 그저 예수님의 이름 정도로 끝나는데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성은 '주'씨요, 이름은 '예수',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분을 지칭하는 아명 정도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 뒤에 쉼표(,)를 써넣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라는 어휘가 이름이 아니라 나와 그분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칭호이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노예요, 종입니다.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에 나의 삶 전체를 주관할 권리가 있으십니다. 그분이 나에게 어떤 일을 명령하시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왜요?"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분의 말씀 앞에서 "예"라고 순종해야 할뿐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분의 종이며 그분은 나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면서도 그분의 말씀에 거역하는 생활을 계속한다면 이것은 위선적이요, 일관성이 없는 고백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옳은 말을 하는 것만으로는 천국에 들어가기에 충분히 합당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음을 기억하십시오. 어쩌면,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수십 억의 사람들도 우리들보다 훨씬 더 고상하고 아름다운 말들을 합니다. 어쩌면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믿는 우리들보다 훨씬 훌륭하고 옳은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이라서 죄인된 우리가 감히 거론할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아무리 훌륭하고 올바른 말을 한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옳은 말을 하며 하나님과 교제를 갖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어둠 속을 걷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4:20)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시간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그렇다면 본문에서 "주여, 주여"라고 하면서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켜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본문 23절에서는 그들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15절 이하를 보면 "주여, 주여"라고 하면서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거짓 선지자들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1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성경에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스가랴 13장 2절 말씀에 보면,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라고 했고, 요한계시록 20장 10절에서는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거짓 선지자들은 예수님 당시에나 지금이나 독버섯처럼 우리들의 삶 속에 존재하면서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거짓 선지자들을 멀리하십시오. 우리를 미혹하는 어둠의 세력들을 분별하는 영적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영적 분별력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거짓 선지자들을 주의하라는 경고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도무지 늑대같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거짓 선지자라는 표식이 없습니다. 오히려 양의 옷을 입기 때문에 더 양같이 보입니다. 더 아름답고, 더 선하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거짓 선지자들을 알아낼 수 있습니까? 본문 16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16절과 17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거짓 선지자들을 알아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의 열매를 보아서 알 수가 있습니다.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못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들의 말로써 거짓 선지자들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지식을 보고서 분별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또 알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의 열매를 통해서 알아야만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위험 가운데 하나는 그 시대의 대다수가 받아들이는 진리를 역설한다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만약에 거짓 선지자가 웃기지도 않고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를 한다면 거기에는 위험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가 그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거짓 선지자들은 모든 진리로 위장을 하기 때문에 이 시대의 참 선지자처럼 보입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진리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미혹되어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그런데 본문 22절을 보게 되면 이들도 참으로 많은 일들을 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본문 22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보십시오. 이들은 예수를 주라고 불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참으로 여러 가지 훌륭한 일들을 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이 일들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알아달라고 애원하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들은 분명히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일들을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주님으로부터 기억된 바 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들은 분명히 주님의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과의 진정한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면서도 그분께 온전히, 전적으로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면서도 그분의 계명에 따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보면 이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일들을 행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은이를 알 수 없는 시 가운데 이런 시가 있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나니,
너희는 날 스승이라 하면서도 순종하지 않고
너희는 날 빛이라 하면서도 바라보지 않고
너희는 날 길이라 하면서도 걷지 않고
너희는 날 생명이라 하면서도 바라지 않고
너희는 날 지혜라 하면서도 따르지 않고
너희는 날 아름답다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고
너희는 날 부하다 하면서도 구하지 않고
너희는 날 영생이라 하면서도 찾지 않고
너희는 날 은혜라 하면서도 섬기지 않고
너희는 날 강하다 하면서도 우러르지 않고
너희는 날 공의라 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런즉, 내가 너희를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라.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가장 고독하고 슬프게 만드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도 몰라요"하는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10년, 20년, 혹은 50년 후에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이 땅의 사람들은 아무도 우리를 모릅니다. 이것이 인생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인생이 이것으로 끝납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엄청난 절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복음이 있습니다. 그 복음이 무엇입니까?

30년 후, 50년 후, 혹은 100년 후에, 아니면 수 천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이 땅의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렸다고 할지라도 나를 기억해 주실 분이 계십니다. 나를 알아주실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우리들의 중보자가 되시고, 장차 우리를 맞이하여 주실 분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훗날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사명을 다 마치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에 우리들의 신랑되신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기쁜 모습으로 맞이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주님께서 나를 아실까요? 내가 주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주님께서 나를 아실까요?"하는 질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훗날에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에 과연 주님께서 나를 아실까요? 천상에서 나팔 소리가 울려퍼지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주님께서 내 이름이라도 불러 주실까요?

만약에 내가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주님께서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사람아, 나에게서 물러가라"라고 하신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서 나를 그의 자녀로 알아 주실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 정말로 거듭난 사실이 있습니까? 주님과 사랑을 주고받은 영적 체험이 있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잊을 수 없는 사랑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까? 내 심장의 고동이 멎어도, 내 몸의 피가 식어도, 나를 알아주실 분이 계신다. 이 사실을 우리가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의 인생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나를 알아주실 주님 때문에 의미 있게, 보람되게 힘차게 살아 나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때문에 우리의 인생은 헛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아신다면 지금의 이 고통과 이 시련은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를 알아주시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날마다 소망 가운데서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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