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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역경의 열매] 조동진 <17> 美 유학 뒤 후암교회 부임, 버림받은 사람들 섬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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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56년 8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세계복음주의협의회 도움으로 필라델피아 제10장로교회에서 장학금을 받았다. 미네소타주의 베다니선교대학과 켄터키주 에즈베리신학교 대학원을 다녔다. 기독교 확장사와 선교학을 연구했다.

60년 7월 말 시카고에서 귀국 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뜻밖의 편지를 받았다.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있는 후암교회가 나를 담임목사로 청빙한다는 서신이었다. 교회가 나를 청빙하는 조건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장로교회가 두 갈래가 됐으니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을 선언해 달라는 것이었다. 둘째는 교회 건축에 주력해 달라고 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적합한 새 일터를 주신 것에 감사했다. 그해 9월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후암교회는 1946년 후암동의 이북 피난민들에 의해 시작됐다. 해방 후 후암동은 한국은행 사택과 일제가 남긴 고급 주택들이 있었던 반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가난한 군중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특히 서울역에서 남산을 향해 오르는 후암동 101번지와 400번지는 가난한 이들의 골짜기였다. 수도여고 뒤쪽엔 미군 병사를 대상으로 했던 양부인(윤락여성)들이 집단으로 세 들어 사는 집으로 꽉 차 있었다. 교회는 후암동 일대의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한 전도’에 나섰다.

나는 금요일마다 구역장과 권찰을 모아놓고 전도학교를 시작했다. 전도의 원리와 방법을 한 시간 강의하고 네 시간 동안 후암동 일대를 샅샅이 누비는 방문전도 실습을 했다. 후암동 도동 동자동 갈월동 용산동 남영동 일대가 실습장이었다. 나는 전도대원들이 돌아와 보고한 것을 듣고 주민들을 위해 기도했다. 이렇게 3년을 방문하면서 교회 신자도 늘어 150가구에서 600가구로 증가했다. 지독하게 가난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어느 날 101번지의 판잣집을 찾아갔다. 몇 차례 방문 전도대가 다녀갔었다고 했다. 얼굴이 창백한 30대 남성이 누워있었다. 그는 폐병 3기로 각혈이 심했다. 50대 어머니가 품팔이를 하면서 아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를 품에 안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했다. 그는 “나 같은 사람도 교회에 나갈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다음 주일 청년은 어머니 등에 업혀 교회에 나왔다. 나는 광고시간에 그를 소개했고 집에 데려다 주라고 집사님들에게 부탁했다. 그런데 그가 그날 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그가 후암교회 신자이기에 교회에서 장례를 정중히 치르자고 했다. 장례식에는 모든 장로 권사 집사들이 빠짐없이 참석했다.

장례식 날 아침 후암동 101번지 판자촌은 큰 소동이 일어났다. 폐병으로 죽은 가난한 청년의 장례에 검은 양복 차림의 남신도와 흰옷의 여신자들 100여명이 온 것이었다. 근처 105번지 군중도 구경을 했다. 이후 그 어머니와 함께 위로예배를 드리고 집을 나서는데 뒤에서 누군가 불렀다.

“여보 목사 양반.” “네” “당신 마음에 들었어. 오늘부터 101번지 사람들은 후암교회를 지지하기로 했소. 교회 문패, 있는 대로 다 주시오. 내가 집집마다 후암교회 문패를 붙여놓을 거요.”

나는 어처구니없었지만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에 굶주렸으면 그럴까 싶었다. 그 후 후암교회 교적부에는 101번지 사람이 많아졌다.

정리=신상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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