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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달려갈 길 (행 20:17 ~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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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나의 달려갈 길
성경본문 : 행 20 : 17 ~ 27

미주 성산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일년에 한번 엘에이에서 국제 마라톤 대회를 하는데 그때마다 교회주변에는 자동차 길이 완전히 막힙니다. 그날도 막혔습니다. 여기저기에 줄을 치고, 칸을 막아서 평소에 오던 길이 막혔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보통 가던 길이 막힐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되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망설이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성경 가운데서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바울의 신앙 간증입니다. 바울의 간절한 마음이 너무도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에게 큰 감명을 줍니다. 저도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눈물의 감동을 받습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나의 달려갈 길’이란 제목으로 우리 개개인의 달려갈 길을 점검해보면서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칭찬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달려 갈 길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합니다만 다 달려갈 길이 있습니다. 자기의 달려갈 길을 아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사실 ‘달린다’는 것은 힘이 듭니다. 고통이 따릅니다. 여러분 마라톤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제가 다녔던 수안보 초등학교는 봄과 가을에 두번씩 운동회를 하였고 그때마다 마라톤 대회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상으로 연필과 노트만 주면되니까 비용도 적게 들기 때문에 마라톤은 단골 메뉴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일등을 하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제일 먼데서 다니는 미륵리의 학생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약 30리쯤 되는 먼 거리 학생들인데 이들은 항상 지각을 하지 않으려고 뛰어다녔습니다. 그래서 마라톤 대회의 상은 항상 이들이 차지했습니다. 평소에는 힘이 들고 멀었지만 훈련이 된 이들에게는 달리기 하면 항상 일등을 했습니다. 이 아침에 저와 여러분들도 일생을 다리는 사람들이란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400미터 계주를 보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네 사람이 한 팀이 되어 각자가 다 자기의 달려갈 길을 달려야 하고 그것을 합계해서 승리자가 결정되기 때문에 아주 스릴이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일생동안 달려온 길을 합산해서 상급이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달려가는 길은 방향이 바로 된 것입니까? 우리의 속도는 조절하지 않아도 됩니까?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달려갈 길을 점검해보는 기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주님을 섬길 때의 바울의 자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 19절에 “모든 겸손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겸손으로 주님을 섬겼다는 말입니다. 사실 섬기는 자의 첫 번째 자세는 겸손이어야 합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담는 보석 상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세입니다. 무엇이 겸손입니까? 사람들은 겸손을 자기에게 공손하게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 겸손은 ‘하나님의 주되심, 왕 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를 ‘의뢰’하는 자세입니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믿고, 그에게 ‘매여 달려 기도’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을 높이고, 의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쓰십니다. 사울 왕의 경우를 보아도 그가 겸손하였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셨고 쓰셨습니다. 그러나 교만하여 졌을 때에는 하나님은 버리셨습니다.

(2) 같은 19절에 “눈물이며”

바울의 눈물은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의 눈물’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주신 것을 감사하는 눈물이며 항상 기도를 통해서 주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의 눈물’입니다. 기도하면서 흘리는 ‘회개하는 눈물’입니다. 저는 평소에는 냉정하다고 할 만큼 눈 하나 깜짝하지 않지만 기도할 때에는 잘 웁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울보’입니다. 은혜가 너무도 고맙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바울의 눈물은 ‘사랑의 눈물’입니다. 영혼들을 볼 때 그냥 볼 수 없는 눈물이 바울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의 눈물이 없는 사람은 결단코 전도를 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수고의 눈물’입니다. 어떤 일군이든지 일군은 수고할 때 흘리는 눈물이 많습니다. 힘이 들어 울고, 시험 중에 승리해서 감사해서 울고, 그래서 울면서 시작하여 울면서 마치는 것이 목회인 것 같습니다.

넷째는 ‘보람의 눈물’입니다. 저도 지나온 발자취를 살펴볼 때에 보람을 느끼면서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눈물이 메말라 있는데 이것이 우리의 문제점입니다. 다시 그 눈물을 회복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회개의 눈물을 회복하시고, 사랑의 눈물을 회복하시고, 수고와 보람의 눈물을 회복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3) 같은 19절에 “시험을 참고”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만 시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게도 시험은 있었고, 심지어 주님에게도 시험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시험이 올 때에 우리들은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고전 10장 13절의 말씀처럼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대부분의 질병이 자연 치유되듯이 대부분의 시험도 시간만 지나면 해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간이 해결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해결한다고 긁어 부스럼 만드는 식으로 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때까지 참으시기를 축원합니다.

(4) 19절 마지막에 “주를 섬긴 것과”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일생은 주님을 섬긴 ‘섬김의 역사’입니다. 바울은 지금 제가 받는 대접만큼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섬겼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찬 양)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남을 위하여 당신들의 온 몸을 온전히 버리셨던 것처럼

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랑

값없이 그저 주는 사랑

그러나 나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 더욱 좋아하니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 하나

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복음송, 325장)

(5) 20절에는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데 꺼림이 없었습니다. 유대인에게도 꺼림이 없었고, 로마 사람들에게도 꺼림이 없었고, 우상숭배자들에게도 꺼림이 없었습니다.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고전 9장 22절에 보면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는 ‘복음의 토착화’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제목으로 저의 박사 학위 논문을 썼습니다. 우리가 선교를 하려면 그 선교지역의 사람들의 옷을 입어야 하고, 그 나라의 음식을 먹어야 하고, 그 나라의 말을 해야 합니다. ‘눈 높이 교육’이란 말을 많이 씁니다만 우리들은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들의 문화 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눈높이에 따라서 함께 생활하여야 합니다.

(6) 22절에서 ‘고난을 기꺼이 받으려는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심지어 24절에서는 바울의 가장 위대한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것이 과연 우리들에게 가능합니까? 자기의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칠 수 있습니까? 저는 바울과 비교할 때마다 나는 아직 멀었다하는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고난을 받기는 하지만 기꺼이 받는 자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1) 주님께 받은 ‘사명을 귀하게 여겨야’합니다(24절).

미주성산교회에서 놀라운 일이 설교 후에 일어났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름을 밝히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밝힐 수는 없지만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 이상 러시아를 위한 선교헌금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 무명의 분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분들은 하나님의 사명을 귀중히 여기시는 분들입니다. 내가 직접 복음을 전하지는 못하지만 위해서 기도하고, 위해서 물질을 바치리라. 바로 선교에 동참하시는 분들입니다. 너무도 감사합니다. 저는 그분들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교통순경 노릇을 잘 할 것입니다.

(2) 다음은 우리의 ‘생명을 주님께 바쳐야’합니다(24절).

한문으로 생명이란 말의 뜻은 ‘생은 명령이다’라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고, 살고 싶어서 사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사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괴로워도 자살할 수 없는 것은 생은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명은 주인이신 하나님께 다시 바쳐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3) 다음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해야’합니다(26절).

참 이상하지요? 왜 이런 말이 여기에 갑자기 나올까요?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는 말은 에스겔서 3장 18-19절의 배경 속에 이해하여야 합니다. 17절에 보면 우리들을 파수꾼으로 세웠다고 했습니다. 18-19절에서는 파수꾼의 사명은 적이 쳐들어 올 때에 잠자는 사람들을 깨우쳐야 하고,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때에 입을 다물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피 값을 파수군의 손에서 찾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깨든가 잠자든가는 개인이 책임을 지지만 그러나 파수꾼은 깨우고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는 말은 지옥의 심판에 대해서 선하고, 깨우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때에 안 받아들일 때에는 파수꾼에게는 책임이 없고, 본인이 책임을 지지만 만약 파수꾼이 입을 다물고 있을 때에는 파수꾼이 그 피 값을 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는 피에 대하여 깨끗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4) 마지막으로 히 12장 1-2절에는 아주 중요한 비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먼저 ‘벗어라’는 것입니다. 경주하는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지고 뛸 수는 없습니다. 몸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너무도 많은 짐이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짐’, ‘의무의 짐’, ‘직장에서의 짐’, ‘죄악의 짐’, 심지어 교회에서의 ‘직분자로서의 짐’으로 인해서 무거워서 주체할 수가 없고, 따라서 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짐을 다 주님께 맡길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은 ‘인내심’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인생과 신앙생활은 단거리의 경주가 결코 아닙니다. 일생을 뛰어야 하는 마라톤 경주입니다. 따라서 끝까지 참는 사람이 이깁니다. 인내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끝으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고 했습니다. 문제는 세상을 보고, 물결을 보고 그래서 마태복음 14장에 나오는 베드로처럼 물에 가라앉는 불행이 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위로 걸어갈 때에 처음에는 주님만 보고 믿음으로 잘 갔습니다. 그러다가 30절에 보니까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라고 했습니다. 물결소리, 파도의 널름거림을 보면서 두려움이 생겼고, 의심이 생기면서 물에 “빠져 가는지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서 눈을 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맺는 말]

저나 여러분들이나 다 달려갈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주님께서 예정하셨고,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들은 각자 주님이 준비하신 길로 달려가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길로 가면 안 됩니다. 우리의 사명은 바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달려갈 길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기쁨과 행복과 보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이 달려갈 길로 가는데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파수꾼의 사명’입니다. 따라서 피에 대해서 깨끗해야 합니다. 또 중요한 것은 주님에게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생명을 주님께 맡기고,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합소서” 이런 자세를 가지고, 갈 때에 우리는 주님 앞에서 잘했다 칭찬을 받는 사명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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