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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회자와 함께 하라 / 빌 2: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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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와 함께 하라
빌립보서 2:25-30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빌립보서2:25)

오늘은 은급주일입니다. 은급주일은 일생 목회사역에 최선을 다하시고 은퇴하신 목사님들을 기억하고 그 목사님들을 섬기고자 교회가 책임을 다하는 주일입니다. 현재 한국감리교회는 2004년을 맞이하여 5386교회로, 신자는 145만 명의 성도를 가진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감리교회가 있게 된 역사는 앞서가신 원로목사님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민족의 구원과 복음화를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일생을 바쳐온 은퇴하신 원로 교역자들의 고난과 수고를 기억하고 뜨거운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은급사업에 참여하는 의의는 무엇일까? 어떠한 믿음으로 은급주일에 참여할 것인가? 하고 질문해 보면서, 성도들이 목회자와 어떤 관계를 어떤 믿음으로 유지할 것인지를 깨닫고자 합니다.

교회는 세 가지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서이고, 세상을 위해서이고, 교회자체를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하나님을 위한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세계를 창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 인격적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세상을 위한 목적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최고의 방법은 복음을 전하여 뭇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일에서부터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교회가 세상을 향해 가지는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라는 교회에 주신 명령의 말씀은 절대적이고 분명한 것입니다

교회의 교회자체를 위한 목적은 성도들을 은혜 중에 돌보고 양육하고 훈련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고 하셨습니다. 제자를 삼는 것, 세례를 주는 것, 가르쳐 지키는 것은 돌봄과 양육과 훈련에서입니다. 이 돌봄과 양육과 훈련은 세상 끝 날까지 교회에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이 세 가지는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이 세 가지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종합적인 것입니다. 예배만 치중한 교회라든지, 세상을 향한 복음전파에만 치중한다든지, 교회자체를 위한 일에만 치중한다든지 하는 것은 교회를 불균형하게 만듭니다. 그 불균형이 심할 때는 오히려 교회로 기형전인 모습을 드러내게 합니다. 교회는 이 세 가지 모든 목적을 균형 되게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을 위한 예배의 목적을 다하기 위해서는 제사장 적인 사역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을 향한 복음전파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도 적인 사역이 있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교회 자체를 위한 양육과 훈련의 목적을 위해서는 목자 적인 사역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세 가지 사역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이 세 가지 사역을 다하기 위해 특별히 위임 전문적으로 위임된 목회자의 사역이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사역은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와 함께 하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러한 목회사역과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목회자와의 건강하고 은혜로운 관계에서 신앙생활은 더욱 풍성해 집니다. 그러나 목회자와의 관계가 잘못되고 상처를 입을 때는 신앙의 삶이 병들게됩니다. 그러므로 목회사역을 존경하고 귀히 여기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은급주일을 맞이해서 목회사역과 함께 하는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바울을 향한 에바브로디도의 모습을 보고자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매력적인''란 뜻의 이름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의 이름대로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매력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의 자랑스런 인물이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로마에 있는 바울을 위해 빌립보교회가 보내는 헌금을 전달하고 바울을 돕도록 빌립보 교회로부터 파송된 인물입니다. 그는 로마에서 바울을 열심히 도왔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빌립보 교인들을 권면 하기 위해 기록한 빌립보서를 전달하는 사명을 맡았던 사람입니다.
그럼 이 에바브로디도에게서 본 받아야 할 믿음은 무엇입니까?

목회자와 함께 하는 믿음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나의 형제,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라고 했습니다. 에바브로디는 언제나 항상 바울과 함께 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친형제처럼 함께 했고, 수고함에도 함께 했고, 복음을 위한 영적 전투에서도 함께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2장 2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함께 했습니다. 같은 마음과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는 함께 하는 신앙 생활을 한 것입니다.

은혜로운 신앙생활이 되기 위해서는 목회자와 함께 하는 생활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함께 사랑하고 즐거워하며 기뻐하고, 함께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수고하는 함께 하는 생활이 되는데서 풍성한 영적 생활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개미떼들은 행진할 때에 그 행진대열의 길이가 10여리나 된다고 합니다. 모든 짐승들은 이 개미떼들의 움직임을 보고는 무서워 떨며 달아납니다. 코끼리와 같이 덩치 큰 동물부터 사나운 맹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 개미떼를 두려워합니다. 그것은 일사불란한 함께 하는 하나된 이 개미떼들의 공격을 받으면 아무리 크고 사나운 동물일지라도 보잘 것 없는 적고 약한 개미의 밥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역사는 세속적으로 볼 때에 약하고 보잘것없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하나되고 성령과 함께 하는 신앙은 이 세상에서 가장강한 능력입니다. 바로 이 신앙의 역사는 목회사역과 하나되는 은혜로운 삶에서 구체화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와 함께 하는 신앙의 삶을 사십시오 그러므로 은혜가 충만한 신앙의 삶으로 그리스도 안에 게신 충만한 세계와 함께 하는 풍성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믿음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사랑하고 바울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바울에게 뿐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대상을 사랑할 뿐 아니라, 그 대상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필요하고 소중한 사람으로 헌신하며 살아가고, 사랑을 받을 줄 아는데서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복음을 전하다가 죄수의 몸이 되어 로마에서 고생하는 바울을 돕기 위해 헌금을 해서 보내도록 했습니다. 이 헌금을 전하고 바울을 돌보아줄 사람으로 에바브로디도를 택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의 바울을 향한 마음을 가장 잘 전할 수 있고, 헌금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여 자신을 돌 볼 틈 없이 바울을 돌보고 섬기다가 죽을병이 들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은 그의 건강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가 회생되자 바울은 염려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쁨을 주고자 자신의 서신과 함께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로 돌려보냈습니다. 바울은 이때의 심정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게 하려 함이니 이러므로 너희가 주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28-29절)

에바브로디도는 사랑의 대상으로 믿을 수 있고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소중하고 존귀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받을 줄 아는 사람일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할 수 없다는 것처럼 불행한 것은 없습니다. 당연히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큰 불행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로부터 또는 자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녀나 부모는 불행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연인은 불행한 것입니다. 하물며 목회자를 사랑할 수 없고 목회자라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교인이 된다면 이것 또한 불행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만남에는 세 가지 만남이 있다고 합니다. 생선 같은 만남, 꽃과 같은 만남, 손수건 같은 만남입니다.
생선 같은 만남이란 만지기만 하면 비린내가 나는 만남을 말합니다. 만나면 서로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원한을 남기는 것입니다. 이런 만남은 오래갈수록 더욱 부패한 냄새를 풍기는 것입니다.
꽃과 같은 만남은 만나면 향기가 나고 좋아 어쩔 줄 모르는 만남입니다. 그러나 금새 시드는 만남을 말합니다. 풀은 쉬 마르고 꽃은 10일을 넘지 못합니다. 꽃과 같은 풋사랑의 만남입니다.

손수건 같은 만남이 잇습니다. 상대가 슬플 때에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인 양 축하하고 힘들 때는 땀도 닦아주며 언제나 함께 하는 만남을 말합니다. 부부의 만남이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의 만남은 이런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와 성도의 만남도 이런 손수건의 만남이 되어야 합니다. 함께 땀과 눈물을 닦아주며 사랑하는 만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목회자와의 관계는 목회자를 사랑할 중 알고 목회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건강하고 은혜로운 신앙의 삶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목회자를 사랑할 수 있고 목회자의 사랑을 받는 믿음의 삶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목회자를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돕는 믿음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30절)

에바브로디도의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목숨을 돌보지 않는 사랑과 헌신이 바울의 사역을 위해 돌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과 함께 바울의 복음과 목회사역을 위해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도왔습니다. 바울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목회사역에 부족함이 없도록 적극적인 바울을 도운 것입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은 사랑과 헌신의 대상을 가지고 살 때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과 헌신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삶이 목회사역을 위하여 드러나는 것이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에서 목회사역을 돕고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신앙생활이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장 40-42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자를 영접하느니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자가 되고 예수님이 보내신 예수님의 목회를 행하는 자를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그리스도의 목회를 대행하는 목회자를 영접하는 신앙은 목회자의 상을 타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되지 않았을지라도 목회사역을 돕는 것이 목회자의 상을 타는 것입니다. 42절의 번역은 난해함으로 새번역 성경을 인용합니다. "내간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세상적으로 볼 때에 작은 사람 같은 그리스도의 목회 사역자들에게 냉수 한 그릇을 베푼 그것이 상급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헌신이 이웃사랑과 함께 목회자의 사역에서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6:6)고 했습니다. 구약의 레위기서에서 보면, 하나님은 그의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에게 제공되는 것을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지극히 거룩한 제물과 같이 여기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목회자의 사역을 위해 기쁨으로 돕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과 같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은급주일에 임해야 합니다.

니체는 "목사란, 미워하기보다는 욕하기가 더 쉬운, 보다 미묘한 동물중의 으뜸가는 꼴이다"고 했습니다. 목회자의 특성이 항상 공격과 비판의 대상이 되기 쉬운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이런 목회자의 사역을 보호하고 돌보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목회자와 함께 하는 은혜로운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R. W. 데일''은 "당신이 목사가 효과적으로 일을 해야 한다면, 당신은 그 주간에 목사를 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목사의 성공은 당신의 관심에 달려있습니다. 목사가 회중들이 양심과 영적 생활에 미치는 힘이 있는 것처럼 보여지는 설교를 했다면, 그것은 그 주간 동안 목사를 위해서 교인들이 특별히 기도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목사가 어 떠한 성공을 했든지 간에 그것은 목사의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교인들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주간 동안에 당신이 목사의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설교를 결코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의 사역을 이해하며 돕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목회자의 목회사역을 이해하며 참여하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또 목회사역에 대한 관계가 은혜롭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믿음의 삶을 가지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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