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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 호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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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말씀: 호 1:2-9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속에 하나님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속에 하나님의 소원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나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배우자도 그 누구도 이해해 주지 않는 내 마음을 주님이 아신다 싶으면 여기에 눈물이 있고 감격이 있곤 합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으로 양을 치던 사람 목동 다윗을 선택하는 과정 중에 있어진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렇다면 다윗을 중심, 다윗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이 계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심, 하나님의 소원이 중심을 보실 하나님이 감동하실 만큼 가득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이론이나 단순한 생각이 아닙니다. 가슴속에 있는 것이 표현되지요. 사울의 위기 앞에서 그 모진 시련 속에서도 다윗에게는 늘 하나님의 원하심이 중요했고 하나님의 원하심이 표현되어졌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위기 앞에서 원수 시므이의 멸시 앞에서도 다윗은 자신의 감정이 표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심이 표현되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어서도 하나님 중심 국가라 생각해서 70년 동안 방치되었던 언약궤를 찾아다 놓았습니다. 다윗이 말년에 가장 하고싶은 것이 성전을 지어 봉헌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하나님의 원하심이 아님을 알고 조용히 마음을 접습니다.

이런 다윗을 삶은 결코 다윗만의 삶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품은 삶이었고 하나님의 소원을 품고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삶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의 삶에 개입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아브라함의 삶은 아브라함만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삶이 하나님의 삶이어야 했고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삶이어야 했습니다. 뱃속에서 선택을 받았던 야곱이 왜 그렇게 곤고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까? 그것은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느냐가 중요한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내가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나를 내어 맡기기가 그렇게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은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심이 중요한 삶이요 하나님을 가슴에 품은 삶이었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던 바울, 세 번 태장으로 맞아서 수없이 죽어 내던져졌던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나만의 삶이 아니라 내 소원만 이루기 위한 삶이 아니라 예수를 목적으로 하는 삶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의 가슴에는 바울의 중심에는 보혈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바울의 가슴을 열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예수님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죽을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에 가게되는 절대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교와 모든 종교는 그가 아무리 열심을 내도 결국 원하는 것은 자신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닙니다.

기독교의 밑바탕은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느냐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구분해볼 수 있으니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서 3장 3절에서는 이렇게 구분합니다. 첫째로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하나님이 없는 사람의 삶입니다. 이들에게는 오직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가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진리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육신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기는 믿지만 구원도, 천국도 알지만 여전히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가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가끔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가 생각은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저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원하심이 외면을 당하고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에 메이게 됩니다. 그러나 신령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가슴에 품은 하나님의 원하심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원하심이 중요한 사람들로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슴에 하나님이 계십니까? 하나님의 소원을 내 가슴에 보듬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하나님의 목적을 가슴에 끌어안고 있냐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입은 저와 여러분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가슴에 품고 산다는 말은 단순히 주일을 지키며 하나님을 믿으면서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사업장이 나만의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만의 목적, 우리들만의 목적을 이루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보며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원하심을 발견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들 목적을 이루는 것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60-70년대 기독교가 왕성하게 달려갔을 때 그 때에는 하나님의 원하는 것이 나왔었어요. 지금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놀랍게 하나님은 믿지만 왜 역동적이지 못하냐면 그 속에 하나님이 목적이 하나님의 소원이 사라져 버렸어요. 내가 이루고 싶은 것, 내가 가고싶은 것, 내가 추구하는 것 거기에 하나님만 도와달라고 목소리만 높이지 자기문제에서 결국은 허덕입니다. 삼손이 그렇게 엄청난 능력을 가졌지만 결국은 자기 문제에 허덕이고 말아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삶이라면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을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에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가 방법이 아니라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삶이라면 우리의 인생에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사업장에 하나님의 가슴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하심, 하나님의 소원을 말입니다. 어렵다고 어려움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방법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방법이 송두리째 바뀌는 것입니다.

사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방법이 이었지만 저들이 사도행전에 넘어가서는 예수가 방법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 버립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는 방법인가, 목적인가? 무엇 때문에 기도하는가? 무엇 때문에 몸부림치는가? 예수가 목적으로 바뀐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죽는데까지라도 달려갑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가슴에 품고 있지요. 여기 젊은이들이 멀리 선교사로 달려가는 거 아닙니까? 하나님의 색깔은 칠하지만 결국은 나만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이요’ 이렇게 주님은 책망한 것입니다. 결국은 내가 이루고 싶었던 것을 마지못해 예수 믿으면서 예수님 도와주세요 이게 아니라 진정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면 송두리째 바뀌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소원이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들 가슴속에서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 사업장을 통해서 당신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며 당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소원과 내 소원이 하나가 되어서 뜻을 이루게 해주세요’ 우리들 가슴에는 하나님의 색깔만 칠했지 내 소원만 있는 것이 아닌가?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목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자녀를 보면서 단순히 부모의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심이 느껴지고 보여지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본문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여러분 이 말씀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바닥에 떨어진 이스라엘을 향하여 여로보암 2세 왕성한 그 세대를 향하여 완전히 무너진 저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호세아의 삶을 통하여 호세아의 아픔을 통하여 말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호세아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호세아는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호세아는 선택이 아니라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이사야와 동시대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신학을 함께 하고 목사가 같이 되었는데 이사야는 왕궁을 왔다갔다하며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는데 자기는 겨우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말을 듣는다면 가족들은 이해했을까요? 누가 이런 삶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이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신학교에 학생들이 많이 밀려오지만 원래 그 목적을 안다면 오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거죠. 호세아의 삶을 세상으로 보면 철저하게 망가진 삶입니다. 음란한 자식을 낳고 키우는 시간은 참으로 긴 시간입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이 몇 년인가? 그 기간동안 호세아는 참고 견뎌야 했습니다. 세상으로 보면 공부 할 만큼 한사람이 철저하게 망가졌고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크고 대단해졌다해도 하나님의 원하심이 외면당하고 자신만 있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을 보면 망가지고 바보 같은 삶을 살았어도 울면서 삶을 산다해도 그의 삶에 하나님의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소원을 품을 것인가? 우리가 다음주에 임직식이 있습니다. ‘내가 이 정도 충성했으니 내가 이 정도는 돼야지’ 이런 차원이라면 의미가 없지요. 하나님의 원하심 앞에 나는 반응을 보이는가? 결국은 우리가 바닥에서 헤매는 신앙이 아닌가? 우리의 삶이 가치가 있는 건 우리의 삶이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나를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라고 우리가 노래하는 만큼 던져지는가?

이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원하심은 무엇일까요? 이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여호와께서 비로소 호세아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은 호세아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호세아의 몸을 통해 호세아의 삶을 통해 말씀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통해 증명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자녀를 통해 말씀이 말씀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거룩한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는 고백이 있어야 됩니다.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나만의 목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지난 14년 동안 교회가 얽혔을 때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제가 납작 엎드려 제일 붙잡았던 것은 내가 무엇을 원하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엇을 원하느냐를 붙잡은 것입니다. 여기에 때로는 성도들이 이해를 못해주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때로는 가슴이 아파서 터질 것 같은 적도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느껴지고 말씀하실 때 내 눈으로 하나님을 본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하옵소서 라고 하나님의 원하심이 내 가슴속에 있고 내 안에 하나님의 소원이 있어 이것이 마주칠 때 역동적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가정에서도 아무 일 없이 평안함만이 목적이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가슴에 품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하심을 품어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소원을 가져야 됩니다. 이것이 있을 때 우리는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가서 왜 왔냐고 물으면 ‘뭐든지 하는 일마다 안돼요 그래서 하나님이 부르나봐요’ 저는 이거 반댑니다. 주님은 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에게 그냥 고기 잡으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오른편 왼편 그물을 던지라고 말합니다. 결국 내가 헤매이다 끝난다면 신학교를 10년 다닌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여러분, 한평생 거지로 살아도 그의 삶이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배시간마다 고백하지요. ‘우리는 빛들로 나타나 생명의 말씀을 밝혀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는 성도로 훈련되어 작은 예수로의 사명을 다하며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드리는 선교공동체로서의 사명을 다할 것이다’ 바로 우리의 교회가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달려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의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얽혔을 때 해결되는 것만이 목적이어서는 안됩니다.

한나라고하는 여인은 아이를 낳지 못해서 기도합니다. 단순히 아이를 못 낳아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가 붙든 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내가 이 아이를 하나님 앞에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가슴에 보듬었을 때 그의 기도는 강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붙들고 기도하면 작은 것이 큰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모든 삶을 통하여 말씀이 말씀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원하심이 중요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내 가정 내 사업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소원이 있어야됩니다. 제 개인적으로 목사가 되면서 복 받은 게 있다면 목사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라도 하나님의 원하심과 붙들고 씨름한다는 거 제 개인적으로 복입니다. 누구를 만날 때도 얽혔을 때도 하나님은 무엇을 원할까?

여러분에게 무엇인가 얽혀있다면 풀리는 것만이 목적이어서는 안됩니다. 그 삶 속에서 나는 하나님의 원하심이 중요한가? 하나님의 원하심을 보듬고 달려가 봅니다. 여러분의 가슴속에 하나님의 소원 때문에 울고 하나님이 아파하는 것 때문에 울고... 우리들 중심에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원하심, 하나님의 소원이 있습니까? 이것을 품을 때 우리의 삶에 진정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 말씀하고 싶어합니다. 그저 목사를 통해서 설교가 뒷전에 울리는 그런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통해 보여지기를 원하며 들려지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통해 들려지기를 원하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이 남다른 은혜를 입었다면 남다른 하나님의 소원이 있어서 어려운 중에도 다 놓아두고 하나님의 소원을 가슴에 안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축복아닌가? 내 모든 문제를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소원만을 붙들고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내 문제까지도 해결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하여 말씀하고 싶어합니다. ‘내가 너를 통하여 말하기를 원하고 들려지기를 원하며 내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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