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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상수훈(5) / 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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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5) - 마 5:7

산상수훈의 다섯 번째 복을 보겠습니다.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 긍휼이 뭐냐? 긍휼히 여기는 자를 뜻하는 헬라어가 있는데 그 단어는 자비라는
단어에서 파생한 말입니다. 여기서 긍휼은 자비로운 마음을 뜻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을 대할 때 인색한 마음이나 강팍한 마음을 가지지 말고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남을 그렇게 긍휼이 여기면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함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 심판 받지 않을려면 남을 대할 때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사랑을 받았다면 그 은혜와 사랑을 베풀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와 사랑을 받은 우리가 남을 심판하고 산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그런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가 우리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마18:21-35

여기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교회는 기본적으로 죄인의 공동체입니다. 다 허물이 있는 자들이 모여 있는 것이고 또 다 성화를 마친 자들이 아니라 그 과정 중에 있는 자들이니 부족한 점들이 보일 때가 많습니다
초대교회 안에도 이런 모습이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형제의 잘못을 보고 주님께 얼마나 더 참아야 합니까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상담을 하다보면 이런 유형의 질문을 받곤 합니다. 주님께서는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490번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끝까지 용서하라고 하시면서 한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한 임금이 있었는데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게 그 빚을 갚으라 하니 “나를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엎드려 절하니 불쌍히 여겨서 그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그 탕감 받은 사람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의 목을 붙잡고 갚으라고 합니다. 그 사람도 이 탕감 받은 사람이 그랬던 것 처럼 “나를 참으소서 갚으리이다”라고 했는데 이 사람은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좀 실감나게 느끼기 위해서 지금의 돈으로 좀 환산을 하면 1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이고 1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이었으니 한 5만원 계산하면 백 데나리온은 500만원 정도 빚을 진 것인데 그런데 이 사람은 얼마를 탕감 받았냐면 1만 달란트 그러니까 약 3조에요. 3조를 탕감 받은 사람이 그 빚을 탕감받고 나와서는 5백만원 빚진 자의 목을 잡고 갚으라고 하고 또 옥에다 가뒀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 우리 안에 없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그까짓 3조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형제와 싸우고 삐지고 하는 것들은 사실 어떻습니까? 지난 번에도 이야기 했지만 지구의 평화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놓고 의견 대립을 해서 싸우는 것입니까? 결국 따지고 보면 내가 밤에 먹을려고 아이스크림을 냉장고에 넣어놯는데 그걸 왜 너가 먹냐? 왜 나만 빼고 떡볶이 먹으러 갔냐?
오늘 나한테 말하는 말투가 뭐 그러냐 기분 나쁘다. 너만 예쁘냐 나도 예쁘다.
하여간 따지고 보면 시시콜콜한 것 가지고 싸우고 삐지고 그럽니다. 500만원은 커녕 500원 가지고도 삐져서 미워하고 눈 흘기고 쌀쌀맞게 대하고 그런 모습도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이 바로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의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아니 알고 보면 더 하다는 겁니다.
마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마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마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우리 안에 이런 모습이 진정 없습니까? 이 시간 돌아보길 원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마음은 남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따뜻하게 위로해 주고 위로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마음입니다. 

남에 대해서 남 못살게 굴지 말고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들의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남을 울려놓고 마음이 편안한 사람 있습니까?
속담에도 맞은 놈은 펴고 자고 때린 놈은 오그리고 잔다. 라는 한국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산상수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마음가짐과 삶의 자세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따뜻한 마음, 자비를 베푸는 마음, 긍휼을 베푸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구약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 이삭이 있었습니다. 그 이삭의 신부감을 구하는 이야기가 성경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며느리를 구할 때 종을 시켜서 구하게 합니다.
그 종이 한 것을 보면 그는 매우 훌륭한 종이었습니다. 그 종이 우물가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 드립니다. 뭐라고 기도하냐면 “제일 먼저 나온 여인이 물을 깃고 나에게 물을 주고 낙타에게 까지 물을 주면 바로 그 여인이 하나님께서 주신 여인인줄 알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딱 끝내자마자 한 여인이 나왔는데 그 여인의 이름이 리브가였습니다.
리브가가 물을 길렀는데 그 종이 리브가에게 물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나라는 물 한잔이 너무나 귀한 나라였고 또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굉장히 어렵게 구한 귀한 물을 달라고 하는데 그렇게 쉽게 준다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손이 없어요? 떠 드세요. 쌀쌀맞은 사람이라면 이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리브가가 바로 물을 줍니다. 그리고 사람한테 물주는 것도 힘든데, 시키지도 않았는데 낙타에게도 줍니다. 항아리를 내려놓고 물을 먹입니다. 낙타 입을 생각해보세요 그게 물을 조금 먹을 입이 아닙니다. 항아리를 주면 다 마셨을 그런 낙타인데 그것도 10마리나 됩니다. 얼마나 후덕한 여인입니까? 이야기의 결론은 결국 이 여인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됩니다. 이 여인이 가진 마음이 이게 바로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섬기는 마음이고 후덕한 마음이고 따뜻한 마음입니다. 낙타의 목마름까지 생각하는 자비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러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긍휼의 마음을 가지길 원하십니다.

마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12: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원하신다고 하십니다. 제사보다 더 큰 것이 긍휼이라고 하셨는데 그 긍휼이 뭔가? 이웃에 대한 사랑 이것이 제사보다 더 큰 것이라고 하십니다.
산 제사를 드려라 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어떠한 제물보다 보다 큰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가져야 하는 마음입니다.
이 사랑의 마음,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라. 그럴 때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교회에 와서 이전의 살았던 삶의 방식으로 서로 싸우고 그러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 살았던 모습을 가지고 와서 그 방식으로 사람들을 상처 낸 적은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면 안 됩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몸 얼마나 귀하게 여깁니까?
몸에 좋다는 것 골라 먹고 예쁘게 화장하고, 어떤 분은 거의 변장까지 하고 하여간 자기 몸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전 차를 타고 시골을 지나다가 기와지붕을 보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시골에 가면 옛날에는 다 집이 초가지붕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초가지붕이
다 사라지고 기와 지붕으로 바뀌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무슨 정부 지원금을 받아서
고친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한번 전국에 굼뱅이가 몸에 좋다라는 소문이 난 적이 있었는데
그랬더니 사람들이 다 굼뱅이만 찾으러 다니는데 이 굼뱅이가 어디에 많이 사냐면
시골 초가 지붕 안에 많이 살았습니다. 이 지붕을 뜯으면 그 안에 굼뱅이가 정말 많습니다.
그랬더니 서울 사람들이 막 다 시골로 몰려가서 내가 지붕을 기와 지붕으로 바꿔줄 테니
저 초가지붕을 달라고 했습니다. 시골 사람들이야 당연히 마치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께
새집 다오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정말로 실감났을 겁니다. 두꺼비처럼 욕심쟁이처럼
생긴 사람들이 와서 새 지붕 준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다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그 전국에 있는 초가 지붕이란 지붕은 다 다니면서 그걸 다 기와로 고쳐주었습니다.
시골 사람들 지붕을 공짜로 고쳐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생각나는게 아닙니다. 그게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굼뱅이를 먹을려고 자기 몸을 위해서 그렇게 시골을 다니면서 초가 지붕을 뜯어 굼뱅이를 잡아 먹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기 몸을 위해서라면 정말 뜨겁다는 겁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너 몸을 사랑하듯이 네 이웃을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그렇게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형제 자매를 볼 때 이 굼뱅이를 기억해보세요. 굼뱅이를 잡아 주고 싶다 라는 마음으로 형제와 자매를 대하시길 바랍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을 베푸는 자들아 그러면 너희가 더 큰 사랑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입니다.
마25:31-46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있을 심판에 대한 비유입니다.
마지막 때에 목자가 와서 양과 염소를 나누는데 오른 쪽에는 양을 놓고 왼쪽에는 염소를 놓는 다고 3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을 보면 오늘쪽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시는데
다 같이 볼까요?
마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25: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러니까 그 우편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여기가 중요합니다. 40절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다음에 왼쪽에 있는 사람보고는 반대로 너는 내가 배고플 때 먹을 것도 안주고 목마를 때 물도 안주고 추울 때 옷도 안 줬다. 이렇게 말씀하시니 왼편에 있던 자들이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마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지금 옆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에게 좋은 것을 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한 것이고 그에게 차갑게 대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차갑게 대하는 것입니다.
예배 끝나고 말씀 다시 묵상하면서 잘 못 한 것을 다 회개하고 이제 정말 새로운 모습으로 형제를 대할 때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사시길 바랍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형제사랑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긍휼의 마음을 가지는 것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아무리 거룩하고 화려한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형제들에게
사랑을 베풀지 아니한다면 거짓된 것입니다.
어디서 읽었는데 무슨 찬양예배에 참석했는데 찬양 중에 화장실을 가려고 나가다가 발을 밟았나 그랬는데 그 사람이 인상을 쓰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게 상처가 되었다고, 주여 이러다가 발을 밟으니까 인상쓰면서 아이~ 똑바로 보고 다녀야죠. 아버지~ 이런 모습이 거짓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사랑을 원하십니다.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마5: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마5: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祝 빌 축이라는 한자를 어떻게 씁니까? 보일 示 시에 맏 兄 형 자를 붙여 씁니다.
뭔가를 빌 때 형제를 보이라는 겁니다. 그 형제의 얼굴이 어떤지 보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으면 진정한 제사를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긍휼의 마음은, 이 사랑의 마음은 깨닫는 데에서 끝나선 안 됩니다.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강도에게 당한 사람을 보고 측은하게 여겨서 그를 싸매고 음식과 숙소를 제공합니다. 강도에 당한 사람이 누워있을 때 바라보면서 아 불쌍하다 안 됬다 측은하구나 하면서 지나가는 것은 진정한 긍휼이 아닙니다.
그의 상처를 싸매고 그에게 먹을 것을 주고 그가 쉬고 잘 곳을 주는 것이 긍휼입니다.

우리가 다쳤을 때 우리를 싸매시고 우리가 주렸을 때 우리를 먹이시고 우리가 지쳤을 때 우리에게 쉴 곳을 주신 분이 계십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 이 사랑의 마음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자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주님 귀한 말씀을 저희에게 허락하심에 진실로 감사드립니다.
주께서 저희에게 베푸신 그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은 진정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음을 고백드립니다.
우리가 죄 된 모습으로 쓰러져 있을 때 우리를 위로하시며 일으키시고
세상 가운데 상처받아 울고 있을 때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셨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그 긍휼의 마음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돌보시는 주님 우리가 진정 주님의 마음을 닮길 원합니다.
그 크신 은혜를 받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모습은 마치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고 백 데나리온 빚 진 자를 감옥에 가두는 것과 같을 모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진정 먼저는 주님의 그 크신 은혜를 온전히 깨닫고 그 사랑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 형제 내 이웃을 사랑하는 그런 천국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귀한 은혜의 시간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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