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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년아 일어나라 (눅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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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아 일어나라
누가복음7:11-17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눅 7:14)

최근 우리시대를 어둡게 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우리를 가장 절망케 하는 것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이 땅에서 청년들의 죽음은 다음 몇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1) 청년층 자살율의 급증입니다. 최근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하루에 36명이 자살을 하는데 그 중에 청년층(20-40대) 들이라고 합니다. 2) 청년 실업율의 계속된 증가입니다.(이태백)
3) 청년층의 이민선호율 증가입니다. 4) 청년들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역사에 대한 무관심이야말로 청년의 죽음의 징후입니다. 왜요, 죽은 자는 더 이상 아무 일에도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땅의 청년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우리가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일하기 힘든 노인 인구는 급속도로 늘어가는 반면 젊은이들은 일자리가 없습니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윤리도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한 죽어버린 한 청년을 살리시는 기적의 사건,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나인성의 한 과부의 독자였습니다. 그는 한 과부의 유일한 소망이 였습니다. 그런데 그 독자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공동묘지로 가고 있습니다.

나인성이란 ‘아름답다’, ‘즐겁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인성의 모습은 아름답기는커녕 즐겁기는커녕 글자 그대로 절망과 슬픔의 죽음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 이 죽음과 절망의 행진이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의 행진이요, 생명의 행진이요 희망의 행진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나인성이 나인성으로 회복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1. 주님이 오셔서 불쌍히 여기심으로 가능케 되였습니다(13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 7:13)
미움은 사람을 죽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사람을 살립니다. 사랑은 죄인을 살리고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동기입니다(요3:16,롬5:8, 딛3:15). 사도요한은 형제를 미워함은 곧 형제를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이런 유머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다가 ‘여러분 미워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 있으면 한번 손을 들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도 손을 안 들기에 목사님은 이해가 안 된 줄 알고 다시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할아버지께서 손을 높이 드시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할아버지 정말 미워하는 사람이 없습니까?’ 할아버지 대답이 이렀습니다. “옛날에 많았는데 그들이 다 죽었어요.”

이 유머의 중요한 교훈은 이 할아버지는 미움으로 이웃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미움은 이웃을 죽일 뿐 아니라 자신을 동시에 죽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움과 시기는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毒임에 틀림없습니다. 독이 몸 안에 퍼지기 시작하면 몸 안에 모든 신경체계를 파괴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사랑은 살리는 것입니다. 이 청년을 살릴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두개의 화분에 화초를 심고 각각 이름을 붙였답니다. 하나는 사랑하는 요한, 또 하나는 배신자 유다라고 그리고 물을 줄때마다 그 이름을 부르며 하나는 사랑의 시선으로, 또 하나는 미움의 시선으로 물을 주었는데 유다라는 나무는 끝내 죽고 말았답니다.

여러분, 이 땅에 청년들을 어떻게 살려 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긍휼 주님의 사랑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대답입니다. 사랑만이 구원의 동기요, 유일한 희망입니다.


2. 주님이 오셔서 말씀하심으로  가능케 되였습니다(14절).

이 청년이 일어날 수 있는 결정적인 역사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눅 7:14) 그랬더니 죽었던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말씀은 단순한 어떤 논리나 이론이 아닙니다. 주님의 능력 있는 말씀이 그 처방이고 대답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으로 천지와 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죄로 죽었던 우리를 바로 이 말씀으로 다시 살리셨습니다.
에스겔 해골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일어났습니다.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예수님은 요한복음 5:25절에서 선포하셨습니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한복음 11장에 주님은 무덤에 있는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나오라”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향하여 ‘달리다굼’ 하였습니다.

청년도 일어났습니다. 장년도 일어났습니다. 소녀도 일어났습니다. 남자도 일어났습니다.
여자도 일어났습니다. 방금 죽은 소녀도, 무덤으로 가는 청년도, 이미 장사된 장년도 다 살리셨습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다 살리셨습니다. 오늘도 사람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청년의 강한 신앙은 말씀이 그 속에 거할 때입니다(요일2:14).


3. 주님이 오셔서 손을 대심으로 가능케 되였습니다(14절).

이 청년을 살려내는 데는 주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눅 7:14상)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당시 유대인들이 절대로 손을 대어서는 안 되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문둥병자요 또 하나는 시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유대인의 결례를 사실상 파괴하시고 만지셨습니다. 주님이 문둥병자를 만지셨을 때 깨끗하여졌습니다. 주님이 죽은 자를 만지셨을 때 일어났습니다. 그의 손길은 살리는 손길입니다.

어느 날 교황이 한 고아원을 방문했답니다. 많은 아이들이 “교황이여, 만수무강하소서!” 그런데 한 아이만이 움직이지 않고 싸늘한 눈초리로 교황에 대한 적대감을 나타내고 있었답니다. 그때 교황은 그에게 가까이 가서 그를 품에 안았다고 합니다. 빠져나가려고 저항하다가 하다가 그만 그 품안에서 눈물을 흘리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밝은 미소를 보이더랍니다. 이 아이는 변화되었답니다. 이 아이는 교황의 손에서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낀 것입니다. 이 아이를 변화시킨 것은 주님의 손길입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 젊은이들을 만져 주심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주음의 행진을 정지시켰습니다. 희망의 행진으로 바꿨습니다.
주님의 손길은 이시대의 죽어가는 젊은이들에게 아직도 희망입니다. 생명입니다.

지금은 청년이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지금 무덤으로 가는 죽음과 슬픔과 절망의 행진을 멈추시고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노라! 청년들아 일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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