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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체치 않기 위하여 / 행 20:13 ~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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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지체치 않기 위하여
성경본문 : 행 20:13 ~ 16

먼저 구정연휴에도 불구하고, 주일 성수를 하시는 여러분들에게 감사하고, 진심으로 칭찬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두 가지를 경계해야 합니다.

첫째는 우리 민족의 약점인 ‘빨리 빨리 철학’도 경계해야 하지만 또 그 반대인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지체하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속히 할 것과 더디 할 것을 구별하여 권면했습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9). 오늘의 말씀 중에 ‘지체하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잃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우리는 지체하지 말아야 합니까? 합 2장 3절에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정한 때가 있고, 종말이 속이 이를 뿐 아니라 정녕 하나님의 뜻이 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바보는 항상 내일을 말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오늘을 말합니다. 사실 내일 내일 하면서 지체하는 사람은 결국 또 다른 내일로 인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인생을 허비하고 맙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그러므로 바로 지금 하시기 바랍니다.

1. 그런데 왜 사람들은 지체하는가?

(1) 먼저 ‘두렵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서 18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를 통하여 성지를 분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7 부족들이 두려워 지체했습니다. 그래서 3절을 보면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는 책망이 나옵니다. 왜 그들은 지체했을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 먼저 와서 자리 잡고 있는 7부족들이 두렵고, 전쟁이라도 했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것이 두렵고, 모든 것이 생소한 외지에 간다는 자체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게 될 때에는 모든 두려움이 다 살아집니다. 믿습니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2)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5장을 보면 바울이 재판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17절에 바울은 “내가 지체하지 아니하고”, 아니 바울은 재판을 받는데도 지체하지 않았고 오히려 바울을 고발하는 사람들이 지체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울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확신이 있었고, 유대인들은 악행을 함으로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왜 확신이 없습니까? 자신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능력의 하나님인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확신이 생기고 지체하지 않습니다.

(3)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익이 되는가 아닌가를 계산하는데는 시간이 걸리고, 비교해야하기 때문에 자꾸만 지체합니다. 그러므로 생각 없이 빨리만 하려고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자신의 이해관계만 따지고 계산하는 것도 큰 문제가 됩니다.

인간에게는 두 개의 뇌가 있습니다. 오른쪽 뇌와 왼쪽 뇌입니다. 오른쪽 뇌는 상상하는 일과 내적인 소리를 듣는 일을 합니다. 천재는 오른쪽 뇌가 발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최근에 오른쪽 뇌의 교육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으로 왼쪽 뇌는 언어와 지식을 저장하는 일을 합니다.

마치 플로피 디스켓과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왼쪽 뇌는 결함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무엇을 판단할 때 ‘효율적인 가 아닌가’만 따집니다. 그래서 우리들로 하여금 자기답게 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왼쪽 뇌의 결정에 따라 이해관계만 따지다가 선한 일을 지체하지 일이 없기를 축원합니다.

(4) ‘길을 모르고 게으르기 때문에’ 지체합니다.

저는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게으른 자여 내일을 말하지 말라. 그대는 결국 후회하리라. 그러므로 시간이 주어졌을 때에 그것을 활용하라. 활용된 시간만이 참 나의 시간이니라.”

저도 가끔 어디를 갈 때 갈 길을 모르면 돌기도 하고, 지체하게 됩니다. 또 게으를 때에도 지체하게 됩니다. 내일 공부하지. 내일 기도하지. 내일 봉사하지. 그래서 꼴깍하고 죽을 때 가서야 비로써 후회를 합니다.

2. 다음은 지체하다가 하나님의 축복을 상실한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1) 구약의 재미있는 경우는 롯의 아내의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킬 때에 천사들이 롯과 그의 가족들을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사위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사위들은 그냥 두고, 아내와 두 딸들을 데리고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 빨리 떠날 것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러나 19장 16절에 보면 “롯이 지체하매”라고 했습니다. 26절에는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롯의 아내처럼 과거에 얽매여 뒤를 보고 세상 것을 잊지 못해서 뒤를 보면서 지체하면 롯의 아내처럼 결국 소금 기둥이 됩니다.

(2) 구약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입니다.

신명기 1장 2절에 보면 호렙산에서 가데스바네아까지의 거리가 열 하룻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까지 들어가는데 40년이 걸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지체하였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3장을 보면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내었습니다. 그러나 10명의 다수의 보고는 부정적인 보고였습니다.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31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33절). 부정적인 보고만 한 것이 아니라 원망하면서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그러면서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14:3)고 노골적으로 심지어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14:4)고 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다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지체하면 죽습니다.

(3) 신약 시대에 지체한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켜 행하게 하라고 분부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을 받았지만 그들은 선교를 지체했습니다. 그래서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8장 2절에 보면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했습니다. 아니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선교해야 하는데 안 하니까 하나님께서 핍박을 통해서 이들을 흩으셨고, 4절에 보면 그 핍박으로 인한 흩으심의 결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체하는 제자들에게 핍박을 이용하여 선교를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3. 무엇을 우리는 지체하지 말아야 하는가?

(1) ‘회개’할 것을 지체하지 말아야 합니다.

회개의 반대는 ‘자기 고집’입니다. 그러나 마 16장 24절에서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는데 이 자기 부인이 바로 회개입니다.

(예 화) 길을 가다가 길을 잃었을 때에 헤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가장 빠른 것은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가서 자기가 잘 알고 있는 길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차를 일단 세울 수 있는 곳에 세우고, 지도를 보거나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던 길의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회복의 원리’라고 말합니다. 우리 개개인은 물론 교회도 회복의 원리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요한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라고(계 2:5) 했습니다. 우리의 떨어진 곳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살길은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지체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회개해야 할 때 회개하지 않으면 그 다음은 멸망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2) ‘화목’하는 일은 지체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산상 수훈에 보면 23절과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서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예물을 제단에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그것보다 선행할 것은 화목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동안 서로가 서로를 미워했던 것도 회개하고, 오해했던 것도 회개하고 서로 화목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3)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의 계명과 주의 일’에는 지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119편 60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

에스라 6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라고 하면서 조서에서 유다의 장로들에게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신속히 주어 저희로 지체치 않게 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성전 건축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욥바에 있는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병들어 죽었을 때에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왜 그랬을까요? 생명을 구하는 일도 다 순서가 있고, 지체해서는 않되기 때문입니다.

4. 우리가 지체하지 않으려면?

(1) 먼저 ‘하나님의 때’와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시간이란 단어가 여러 가지로 사용되고 있는 데 가장 중요한 단어는 크로노스란 단어와 카이로스란 단어입니다. 크로노스란 단어에서 영어의 크로노로지(역대기)와 같은 단어가 나왔습니다. 인간의 시간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크로노스란 단어는 ‘기회 혹은 하나님의 시간’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흔히 [때]란 말로 번역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시간은 경우에 따라 연기할 수도 있고, 취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절대로 지체하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인간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을 깨닫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안목에서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체하지 않습니다. 또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거룩한 땅이란 말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란 말입니다.

(2)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명을 잊을 때에 우리는 지체하게 됩니다. 사명감이란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의식을 말합니다. 이 사명자는 지체할 시간도 없고,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주어진 목표를 향해서 끝없이 달려갈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는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이 있습니다. 사명에는 지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사명을 수행함에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3)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예 화) 광야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경우, 출 13장 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막 10장 32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 앞서서 가시는데”라고 했습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언제가 주님이 앞서 가시고, 우리가 뒤 딸아 가면 우리에게는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4) ‘우리의 시간은 지금뿐’임을 깨닫고, 세월을 아끼면서 지금 은혜 받고, 지금 기도하고, 지금 충성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또 성경은 말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

(예 화) 여러 해 전의 일입니다. 언제인가 말씀드린 적이 있는 일입니다. 대전에서 목회를 할 때인데 수십 군데 지점을 가지고 사진사를 하고 있는 거부가 있었습니다. 제가 전도를 하여 믿겠다고 하면서도 자꾸만 연기를 했습니다. 지체했습니다. 그러다가 병이 들었고, 의사가 그의 생명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마지막 통보를 했습니다. 마침내 믿기로 하고 제게 병상 세례를 받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저의 사진을 찍어 주어 지금 저의 집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체해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택함을 받은 사람이기에 구원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제 앞에서 자신의 입으로 회개하면서 주님을 영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안타까운 것은 왜 그 많은 부를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체 죽어야만 했던가 입니다. 결국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을 뿐 면류관이 없는 인생을 마감했다는 점입니다.

맺는 말

우리는 정말 지체해야 할 것은 지체하지 않고, 빨리빨리 처리합니다. 그러나 지체치 말아야 할 것은 지체하면서 하지 않고 그냥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회개할 것은 지체하지 말아야 합니다. 화목하는 일은 지체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주의 계명과 주의 일에는 지체하지 말아야 합니다.

히 10장 37절에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한다구요? 지체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자신의 고집만 부리면서 지체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일들을 잘 감당하다가 주님 앞에 서시기를 축원합니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단 한번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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