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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을 살리는 언어 (약 3:1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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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사람을 살리는 언어 
본 문 : 야고보서 3 : 1 - 12절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랍비가 하인에게 시장 가서 가장 맛있는 것을 사오라고 했더니 소 혀를 사왔습니다. 며칠 지난 후에 가장 싼 것을 사오라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소 혀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랍비가 하인에게 질문합니다. “어떻게 너는 똑같은 것을 사왔느냐?” 그때 하인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혀는 아주 좋으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혀가 나쁘면 그 값어치 없고 나쁜 것이 그것만큼 또 나쁜 것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의 혀에서 나오는 그 말이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그 반대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하는 비유를 이렇게 한 것입니다.

  잠언서 15장 28절에 보면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구약에 외경서인 집회서에 보면 이런 말이 더 실감이 납니다. “매에 맞아 죽으면 매 자국이 날 뿐이지만 혀에 맞아죽으면 뼈가 부러진다. 칼에 맞아 죽은 사람도 있지만 혀에 맞아 죽은 사람이 더 많다.” 다 공감이 되십니까?

  혀는 뼈도 없고 아주 약하고 부드럽고 작으나 그것이 한번 사람을 찌르면 상처 나고 사람을 죽이게 만듭니다. 그 혀 안에 분노와 한 맺힌 설움이 들어가면 더욱더 그 상처가 커지는 것입니다. 이 혀의 말이 지도자가 될 때에는 그 지도자의 영향력만큼 강력하게 됩니다.

  야고보서 3장 1절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무슨 뜻입니까? 선생이 된다고 하는 것은 지도자가 된다고 하는 뜻입니다. 지도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생각과 언어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을 뜻합니다. 지도자가 되려면 생각에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지도자가 되려면 생각에 훈련을 받아야 되고 우리에 언어에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한 치 혀에서 나오는 말이 사람과 공동체를 살릴 수가 있고 사람과 공동체를 파괴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앤드류 로버츠 라고 하는 사람이 ‘CEO 히틀러와 처칠, 리더십에 비밀’ 이라는 책에서 히틀러와 처칠을 이렇게 비교합니다. 특별히 웅변술이라고 하는 항목에서 그 특징이 이렇게 나타납니다. 히틀러는 연설을 통해서 독일 국민의 마음을 휘어잡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연설은 늘 이기적인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기적인 연설을 성취하기 위해서 반드시 때려 부셔야 할 적대자들을 상종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유대인이었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만일 유태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말로 이렇게 표현이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적을 만들어 내야 한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적을 가져야 한다.’ 한 지도자의 혀, 한 독재자의 혀에 모든 국민의 마음이 현혹되고 마비되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동원된 나치에 의해서 유태인 육백만 명이라는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인류에 희망을 저버리는 한 독재자의 언어, 한 독재자의 혀가 참담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반면에 쳐칠, 그는 탁월한 웅변가는 아니었으나 피나는 연습과 노력으로 연설을 해나갑니다. 그가 정치적인 위험을 무릅쓰고 총리가 되고 나서 3일 후에 하원연설에서 그 유명한, 우리도 알고 있는 연설을 합니다. 그때 그는 “내가 드릴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패배주의에 놓여져 있었던 영국 백성들에게 다시금 소망을 심어 줍니다. 그래서 또 다른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불굴의 용기만이 우리의 유일한 방패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단결해야 합니다.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면서 영국 국민에게 다시 희망을 불러 일으켜 주면서 제 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끌게 됩니다. 한 지도자의 말을 통해서 한민족이 파멸에 이르고 한 민족이 다시금 소생하게 되는 역사의 현장이 나타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혀를 통제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여 작은 키가 큰 배를 통제 할 만큼 영향력이 크다는 것입니다.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울 수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그 혀, 그 작은 것을 통제해야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몸의 지체 가운데 그토록 다스리기 힘든 혀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머지 다른 것도 제어할 수 있는 성숙한 인격에 소유자라고 이야기해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토마스 왓슨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개의 귀와 한 개의 입을 주셨다. 이는 듣는 대는 신속하고 말하는 대는 천천히 하기 위함이다.’ 여기 까지는 우리가 많이 듣던 이야기입니다. 그리곤 한마디 더합니다. ‘우리의 혀로 남을 함부로 공격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우리 혀 앞에 두 개의 방어 벽을 두었다. 그게 뭔가 하면 하나는 혀 앞에 이빨을 두었고 이빨 앞에 입술까지 두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게 하셨다.’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유대인의 격언을 보면 말이 입안에 있을 때는 내 자신이 나를 지배할 수 있지만 말이 한번 입밖에 나가면 이제는 말이 나를 지배한다고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내 안에 말이 있을 때 나의 생각을 통제해야 합니다. 이 말이 사람을 살리는 언어인가? 사람을 죽이는 언어인가? 사람을 격려하는 언어인가? 사람을 좌절시키는 언어인가?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언어인가? 사람을 처절하게 실망시키는 언어인가를 구분하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입 밖으로 나아가면 폭발적인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힘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외경 집회서 20장에 보면 “실언하기보다는 길에서 넘어지는 편이 더 낫다”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한 젊은이가 웅변술을 배우기 위해서 소크라테스를 찾았습니다. 자기 이름을 소개하고 가만히 침묵하면 될텐데 그냥 계속해서 떠들어댔습니다. 이것을 한참 듣던 소크라테스가 그 젊은이에게 이야기합니다. “자네 수강료는 두 배일세.” 이 젊은이가 “아니, 왜 내게는 수강료를 두 배나 받습니까?” “자네는 두 가지를 가르쳐야 하겠네. 하나는 혀를 제어하는 그런 방법과 혀를 제어하는 방법이 터득이 되면 그 다음에 말을 하는 법을 가르치겠네.” 여러분, 어떤 게 더 어려울까요? 혀를 제어하는 그 능력을 갖는 게 훨씬 어려운 것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의 집이다.’ 그렇게 어려운 말을 합니다. 인간은 말로써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언어를 사용해서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이고 언어를 만들어내고 있고 그 언어를 만들어낸 그 언어 때문에 영향을 받는 존재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 언어를 듣고 그 말이 나를 기쁘게도 하고 나를 기분 나쁘게도 합니다.

  요사이 기업마다 그래서 특별히 친절 교육을 굉장히 중요한 교육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구둣방 주인이 종업원에게 이런 말은 쓰면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아가씨, 당신 발이 너무 커서 이 구두가 맞지 않는데요?” 이것은 무례한 언어라고 합니다. 이것을 이렇게 바꿔서 이야기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기씨 죄송하지만, 이 신발이 아가씨의 발에는 너무 적군요.” 표준이 구두가 아니고 표준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잠언서 15장 23절에는 사람은 그 입에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여러분, 말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 적 말 때문에 도무지 답답해서 그 말이 나를 모독하는 말로 들어본 적 누구에게나 있으실 것입니다. 부주의로 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합니다. 쓰디쓴 말 한마디가 증오의 씨를 뿌리고 무례한 말 한마디가 사랑의 불을 끕니다. 은혜로운 말 한마디가 길을 평탄케 하고 즐거운 말 한마디가 하루를 빛나게 합니다. 때에 맞는 말 한마디가 긴장을 풀어주고 사랑의 말 한마디가 축복을 줍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녀들을 키우면서 자녀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자녀들의 기를 꺾는 가장 결정적인 말이 무엇일까요? 이런 말입니다. “네가 제대로 하는 것이 도대체 뭐가 있냐? 너 때문에 지겨워 못살겠다.” 만약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하면 만약 자녀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얘야, 네가 가장 소중하단다. 아빠 엄마는 네가 너무나 자랑스러워 너를 사랑한단다.” 그 말을 들은 자녀들은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면 어떤 말을 들으면 우리 부모님들이 고통스럽게 좌절하게 될까요? “도대체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어요? 엄마, 아빠 때문에 창피해 죽겠어요!” 여러분, 이런 말을 부모님으로부터 들으시면 청천벽력과 같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세상에 누구보다 엄마, 아빠를 존중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이말 한마디가 우리의 사람을, 부모 된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흡족하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계속 잠언서는 15장에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과격한 말은 너를 격동케 해도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 잠언서 12장 18절에는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도 같다”고 우리들에게 말을 합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날까요? 사람이 쓰는 말에는 그 사람의 생각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맺힌 분노의 말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파괴하는 이유가 그 안에 분노가 전달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말속에 사랑이 담겨진 말, 말속에 꿈과 비전이 담겨 진 말, 말속에 이 세상을 사는 이유와 사명이 담겨진 그 말을 들으면 용기가 솟는 것입니다. 나도 해보고 싶은 것입니다.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 새롭게 내 인생을 출발하고자 하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 우리의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도대체 누가 이런 마음을 갖고 사람들에게 살리는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우리가 사람을 격려하는 말을 쉽게 쉽게 할 수가 있을까요? 인간적으로 보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끊임없는 분노와 미움이 나를 붙잡고 있기 때문에 자학과 탄식이 우리의 삶을 막 스쳐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열등감 때문에 내가 좌절되고 있는 내 모습을 위로하고 누구에게 살리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기껏해야 우리는 힘 있는 자 앞에서는 아첨을 하게 되고 힘없는 자를 만나게 되면 허세를 부리고 그를 모욕하고 그를 멸시하고 오만해지려는 습성이 우리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그 마음속에 살리는 말에 위로를 받지 못하면 남을 살리는 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재작년에 동화책으로써 큰 방향을 일으켰던 맥스 루카도의 ‘너는 특별하단다. You are special.’ 이런 동화책이 우리말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이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앨리라고 하는 목수 아저씨가 나무 인형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특별한 사랑을 갖고 만들었는데 이 나무 인형들이 웹믹이라고 하는 마을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무 인형들이 하는 일은 서로 만날 때마다 자기 상자에 있는 두 가지, 하나는 빛난 별표, 하나는 회색빛 동그란 점표를 갖고 있다가 만나는 사람한테 ‘아~ 그 사람이 잘생겼군.’ 하면은 별표를 붙여주고 ‘난 네가 마음에 안 들어.’ 하면 회색 점표를 붙여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펀치넬로라고 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자기는 지나가다가 친구 나무 인형을 만나면 별표를 붙여 줬으면 좋겠는데 회색빛 점표를 갖다가 붙여줍니다. 얼굴에다가도 붙여주고 가슴에다가도 붙여주고 뒤에다가도 붙여주고 자꾸만 붙여주니까 ‘아, 나는 왜 이렇게 못 생겼는가? 나는 아무 것도 못하는가?’ 그러면서 자기 자신도 자기가 싫어집니다.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혼자 방구석에 박혀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을 나갔는데 루시아라고 하는 예쁜 소녀를 만납니다. 그런데 보니까 옷에 아무 것도 붙이지 않고 아주 깨끗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물어봅니다. “너는 어찌해서 별표도 없고 점표도 없느냐?” 그랬더니 그 소녀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를 만들어 주신 앨리 아저씨를 저는 매일 매일 찾아가거든요, 그래서 찾아만 가면 제게 막 붙어 있었던 별표와 점표가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간답니다.” 그 말을 듣고 이 펀치넬로는 자기도 앨리 아저씨를 찾아야 하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을 받아줄 수 있을까? 그는 염려하면서 언덕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때 펀치넬로를 본 앨리 아저씨가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의 이름을 불러 줬습니다. “펀치 넬로야! 나는 날마다 너를 기다렸단다. 남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너를 만든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주 중요하단다. 너는 네게 아주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란다. You are special for me.” 네게 아주 특별한 존재란다. 그 말을 듣고 ‘정말 저 말이 사실일까? 혹시 사실일는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자기의 몸에 붙었던 그렇게 떼어내려해도 떼어지니 않던 그 점표가 하나 툭 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펀치넬로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면 조금 우쭐해지고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면 우리 마음이 오그라듭니다. 이것이 쌓이면 교만해 지고 아니면 그 반대로 아주 위축이 되어 사람들 앞에 서기도 싫고 “스스로 나는 못생긴 사람이야” 탄식하는 경우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앞에 나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얘야! 너는 네게 특별한 존재란다. 내가 너를 위하여 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까지 너를 사랑하는 존재란다. 너의 이름을 부르면서 나를 향하여 너는 특별한 존재란다.” 라고 그 분이 네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에 내가 나를 용납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나의 귀한 점을 다시금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야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언어를 그때부터 배워 나갈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해주는 언어, 다른 사람들에게 격려하는 언어,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언어를 우리의 사랑하는 나를 만드신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이 “너는 특별한 존재야!” 라고 네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 이것이 가능해 진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우주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첫 번째 주신 것도 복이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이 땅을 다스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끌어 오실 때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내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에 근원이 될지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언어가 사람을 살리는 언어로 바뀌려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너는 특별한 존재였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것을 마음속에 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언어를 우리 주위에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고 그것을 함께 나눌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사랑하신다고 친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세워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과 은총을 먼저 경험하게 하시고 하나님에 사랑에 감격해서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도 사랑을 갖고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살리는 언어를 하는 믿음에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드리오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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