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또 다른 삶 (고후 5:1-4)

  • 잡초 잡초
  • 492
  • 0

첨부 1



또 다른 삶
(고린도후서 5:1-4)

인생목적을 바로 알고 살면 인생처럼 신나는 것도 없습니다.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하여!’ 라는 표어를 내걸고 주를 향하여 전진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은 삶의 목적을 바로 아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기에 거치는 것들은 잘라내고 단순하고 산뜻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얻었다가 쓰레기통에나 던질 것들을 위해 살지 않고 영원히 가져갈 영생을 위해 살게 됩니다. 이생을 마감하는 날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성도는 세계관부터 올바로 잡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세계관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것으로 끝인 세상이 아닙니다. 또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는 것은 그 세계를 준비하는 전 단계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웃기는 이야기라고 할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사람이 정말 불쌍하고 웃기는 사람입니다. [고전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루살이의 일생을 아십니까? 하루밖에 못 산다고 하루살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알로 1-2주를 지내다가, 다시 애벌레로 가장 긴 1-3년을 지내는데 이 기간 동안 50번 정도 탈피 과정을 거치고 생식능력이 없는 아성충이 됩니다. 성충으로는 1-4일 동안 삽니다. 성충의 생애를 보고 그것이 하루살이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닙니다. 이와 비슷한 세계가 우리 인생에도 있습니다. 오늘은 성경이 제시하는 참된 세계관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끝나는 세계

성경에는 두 가지 세계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생과 내생입니다. 먼저 이생에 대하여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것을 ‘장막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장막 집은 무너질 집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길어야 100년 정도 살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시90:10]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이게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삶입니다.

본문도 같은 말을 합니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2)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끊임없이 전개되는 세계입니다. 짧게 살아도 길게 살아도 뒤돌아보면 힘들고 버거운 게 삶입니다. 그래서 야곱도 요셉의 안내로 애굽의 바로 왕 앞에 서서 나이를 묻는 그에게 이리 대답합니다. [창47:9]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자신만 힘든 삶을 사는 것 같지만 다 그런 삶을 삽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 힘든 것이 이생의 삶입니다.

세상에서 누릴 것은 다 누려 본 솔로몬 왕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2:22,2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가지고 살아도 못 가지고 살아도, 알고 살아도 모르고 살아도, 얻고 살아도 못 얻고 살아도,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이 세상의 삶은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우리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육체가 지구와 결별을 고할 날이 누구에게나 옵니다. 장막 집이 무너질 때 누구도 거스를 수 없습니다. 누구나 죽음으로 끝나는 세계, 이게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삶입니다.

영원한 세계

죽음으로 인하여 완전히 종지부를 찍는 게 아닙니다.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썩어버리는 육신의 장막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영원한 집이 있습니다. 이생이 끝이 있는 세계인데 반해, 내생은 영원한 세계입니다. 이생은 한정성의 옷을 입고 있고, 내생은 영원성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끝나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영원한 세계를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경험하지 못한 것을 제대로 전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매미를 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굼벵이를 보고 매미가 되리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머리로는 천국의 위대함과 불가사의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마치 돼지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을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세계는 듣고 보고 만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2: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그렇습니다. 다만 믿음으로만 다가갈 수 있습니다.

C.S. 루이스는 영생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야기의 끝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것은 진정한 이야기의 시작일 뿐이다. 이 땅에서 그들의 삶은 모두 표지와 제목에 불과했다. 이제 드디어 그들은 위대한 이야기의 제1장을 시작한다. 이 땅에서는 그 이야기를 읽은 자가 아무도 없다. 이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고 새로 쓰이는 장이 그 전장보다 항상 나을 것이다.”

영원한 곳입니다. 끝이 없는 곳입니다.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는 곳입니다. 성경은 천국이 수고와 슬픔이 다시는 없는 곳이고, 질병이나 다툼이 없는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자에게 그렇다는 말이 아닙니다. 준비한 자에게만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영원한 천국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마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여러분 모두 이 세계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훈련시간

끝나는 세계는 영원한 세계를 준비하는 연습시간입니다. 훈련시간입니다. 한 편의 연극을 위해 배우들이 부단히 연습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구에 산다는 것은 영원한 삶을 위한 예비학교, 연습장입니다. 지금의 삶이 다음의 삶을 결정합니다. 열심히 공부한 학생에게 시험은 쉽습니다.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은 배우에게 연극무대는 끼를 맘껏 펼칠 수 있는 장입니다. 영원에 비교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눈 깜짝할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삶의 흔적이 남기는 결과는 실로 엄청납니다. 천국을 살 것이지, 지옥을 살 것이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끝나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말입니다. 아주 작아 보이지만 세상의 삶이 영원한 세계의 삶을 결정합니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2) 준비된 이는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영원한 처소를 기다립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4) 생명에게 삼킴을 당하는 죽음, 얼마나 멋들어진 상황입니까? 아무나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이생에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느냐에 따라 어디서 영생을 보낼 것인지 결정됩니다.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코가 '북국일기'에서 한 말입니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고 있다고는 해도, 죽음은 최악이 아니다. 나에게 최악이란 신앙을 잃는 것이다. 신앙을 잃어버리면 영원한 생명도 부활도 없다. 죽음을 마지막으로 진짜 암흑에 묻히고 만다. 죽임이 오히려 우리의 한 가지 희망일 수 있음은 신앙에 의해 가능한 일이다” 그렇습니다. 죽음이 차라리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천국의 삶이 준비된 사람에게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루살이에게 성충의 며칠의 삶만이 아닌 훨씬 긴 알과 애벌레와 아성충의 생애가 있듯, 사람에게는 짧은 이생만이 아닌, 천국과 지옥의 영원한 내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생을 결정하는 것은 이생입니다. 그러기에 이생의 목적이 확실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한 목적을 향하여 달려감으로, 이 초청에서 제외되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