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는 자의 영광 (고전 1:1-3)

  • 잡초 잡초
  • 238
  • 0

첨부 1



믿는 자의 영광(고린도전서 1: 1-3) 

고린도전서 1장 1절에서 3절까지 말씀을 가지고 '믿는 자의 영광'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믿는 자라 할 때에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정확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믿는 자는 예수님을 영접한 자, 즉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검시며 그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을 믿는 자라 하는데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아들 딸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들 딸 되는 권세가 참 귀합니다. 아들 딸을 키워 보아서 아시겠지만 언제 가기가 돈 벌었다고 실컷 뛰어 놀다 들어와서 내 밥 내놓으라고 큰소리 칩니까? 아버지의 것이지 어떻게 자기의 것입니까? 그래도 내 밥 내놓으라고 하고, 옷이 떨어지면 벗어버리고 옷을 사 내라고 야단합니다. 등록금 통지서가 나오면 걱정 안하고 당연히 무조건 내 줘야 되는 것으로 여기고 삽니다. 아버지의 것이 다 지기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것이 소위 아들딸의 권세입니다. 그러나 아들딸의 권세를 여러분 돈주고 샀습니까? 내가 공로를 세워 권세를 얻었습니까? 그러니까 전부 공짜로 받은 것 아닙니까?

아들 딸의 권세를 돈을 주고 샀습니까? 무슨 공로를 세워 얻었습니까? 아닙니다. 거저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 되는 것은 누구의 아들 딸 되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귀한 영광인데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 우리가 돈을 주고 사자하면 평생 벌었다 한들 살 수 있겠습니까? 내가 공로를 세워 아들 딸 된다 하면 언제 될 것입니까? 그런데 믿는 자에게는 이런 권세가 있습니다. 여러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는 자의 영광'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I. 소명의 영광(1절)


1. 하나님의 부르심(1상반절)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데 큰 영광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석가모니나 공자가 우리를 불러 준다면 영광 될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사랑하다가 너무 좋아서 결혼한 불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날 불러 보십시오. 별로 달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은근히 불러 주기를 바라고, 불러 주면 영광으로 생각하고, 기뻐하고 그 날 밤 잠 못 이루는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신다는 것이 큰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벌써 나를 택해 놓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다음 우리가 모태에서 태어납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의 불러내기를 시작합니다. 부모가 예수를 믿으면 부모를 통해서 내가 자연스럽게 부름을 받습니다. 부모가 예수 안 믿으면 학교 다닐 때 학교 친구를 통해서 부름을 받습니다. 학교 친구가 교회에 가자고 합니다. 학교 친구를 통해서 안 나오면 그 다음에는 결혼해서 아내를 통해 부름을 받습니다. 교회에 가자고 하면 그 전에는 들은 척도 아니하던 사람이 결혼한 후에는 아내를 따라 잘 나옵니다. 그러다가 아내는 저리가라 할 만큼 앞장서서 믿은 생활을 잘 합니다. 아내를 통한 부름에도 나오지 아니하면 직장의 동료를 통해 부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택함 받은 자를 부르시는데 빨리 나올수록 좋습니다. 부르심을 받고 주 앞으로 나오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맺어져서 부자지간이 되는 것입니다. 부름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성령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에게는 큰 영광인 줄 믿습니다.


2. 일꾼으로 부르심(1중반절)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아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도 즉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꾼으로 세움을 받은 영광입니다. 아들이라고 해서 모두 일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들이 되는 것은 아무 공로 없이 되어지지만 일꾼은 저절로 되는 법이 없습니다. 꾸준한 노력으로 실력을 키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갓난아이가 아들임에는 틀림없지만 아직 일꾼은 못됩니다. 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밤을 지새우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을 졸업하게 되면 실력을 갖추게 됩니다. 실력을 갖추어 놓으면 무슨 일을 맡겨도 감당할 일꾼이 됩니다.

센키비츠의 단편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를 만들고 또 아가씨를 만들었습니다. 아가씨에게 좋은 거처를 만들어 주기로 약속을 하고 동굴 하나를 만들어 주면서 살도록 하였습니다. 아가씨는 어둡고 음침해서 싫다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늘 한 번 안지는 광야에 가서 살아보라고 하였더니 바람이 거세게 불면 몰래가 산을 이룰 정도로 거칠어서 못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호수 물 가운데 궁궐에서 살아 보라고 하였으나 악마들이 우굴거려 못살겠다고 역시 거절했습니다. 마침 그 때 키타를 치면서 시를 줄줄 읊고 지나가는 성스러운 시인을 보고 아가씨는 그 가슴속에 들어가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성스러워보이는 시인의 가슴속에는 동굴의 음침한 모습, 광야의 모래 바람같은 격정, 호수 속에서 우굴거리는 악마의 모습을 모두 지니고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가씨에게 음침한 곳에 가서 태양이 되고, 광야에 가서 한 떨기 백합화되어 사막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고, 악마들이 들 끓는 곳에서 선한 천사로 살아보도록 하라고 명하셨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환경을 타하지 말고 창조적 일꾼, 건설적인 일꾼, 희생적인 일꾼이 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이러한 일꾼으로 부르셨기에 큰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감격하여 오직 충성을 다 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3. 함께 부르심(1하반절)

바울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에 대해서 못되고 고약한 짓은 혼자 다 한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제딴에는 잘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 밖에서 혼자 못되게 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을 죽이는데 앞장섰으니 할 것 다 했지 뭘 더 하겠습니까. 그러다가 예수님 만나서 회개하고 돌이켰습니다. 그러나 소스테네는 어떤 사람입니까.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린도에 전도하러 갔는데 고린도에는 회당이 큰지라 회당장이 몇 명됩니다. 유대인의 회당에는 큰 곳은 회당장이 네 명까지 있었고 조그만 회당에는 한 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스데네는 그 회당장 중 하나인데, 고린도에서 바울은 고린도 사람에게 먼저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가서 유대인에게 전도했습니다. 전도하러 갔더니 회장당 소스데네가 예수 믿겠다고 나섰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의 심한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핍박으로 인하여 예수 안 믿을 줄 알았으나 오히려 회당을 떠나 바울을 따라 나서서, 복음을 듣고 배우고, 열심 있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먼 로마까지 가서 이 고린도서를 써서 보내는데 바울과 소스데네가 함께 보낸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바울과 소스데네는 함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목사님은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장로도 함께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즉 권사도 집사도 함께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소스데네는 예수 믿고 핍박을 먼저 받은 사람이요 바울은 오히려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함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한 뜻을 위하여 그네들은 함께 부름 받은 사람으로 협력을 잘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협력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함께 부름 받은 자'의 영광을 재인식하여 협력해서 주님의 뜻을 따르고 이루는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II. 성별의 영광(2절)

1.예수 안에서 성별(2상반절)

여기서 거룩하여진다는 말씀이 성별이고 거룩한 사람이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즉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거룩하다 하고, 예수밖에 있는 사람은 거룩하다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 믿으나 안 믿으나 육식을 가졌기 때문에 먹어야 되고 잠을 자야 합니다. 예수 안 믿던 사람이 예수 안에서 거룩해지고, 예수 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그 사람 겉모습이 달라집니까? 달라지는 것 없습니다. 그래도 예수 안에 들어와 예수 믿음을 고백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거룩하다 하십니다. 다른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나은 것이 없는데도 거룩하다 합니다. 거룩한 사람만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룩함을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들어와 신앙을 고백하면 하나님이 '거룩하다' 인정해 주는 것이므로 큰 영광이 됩니다. 석가모니 안에 들어가지 않고, 공자에 들어가지 않고 예수 안에 들어가 예수 믿고 거룩한 백성 되어 하늘 나라 백성 삼으시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 긍지를 가지고 자랑하며, 증거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2. 칭의의 성별

다음은 칭함 받은 성별입니다. 즉 성도라 부르심을 입었다는 영광을 가리킵니다. 본래 거룩이라고 하는 말은 사실 사람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말입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생각한 거룩은 정장을 하고 큰 성경을 들고뛰지도 않고 농담도 아니하고 웃지도 아니하며 신사처럼 행세하면 거룩한 것으로 착각을 하였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상고하면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원래는 하나님만이 거룩하고 사람에게는 거룩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혼자 거룩한 하나님이 왜 우리를 거룩한 사람이라 불러 주는가 하면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과 인견을 맺으면 거룩합니다. 가령 부족함 없이 온갖 것 다 갖추고 있는 아버지에게 아들이 있습니다. 아들이 벌어서 소유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다 누리고 삽니다. 부자 아버지이면 같이 사는 아들도 부자입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 거룩한 아버지의 거룩한 아들입니다. 즉 하나님과 인연만 맺어 놓으면, 즉 성령을 받아 중생 하므로, 성도라 불러 주십니다. 이것이 칭함 받은 성별입니다.


3. 변화로 성별(2하반절)

고린도인들은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었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도 없었으나, 이제는 바울 사도의 전도를 받고 지금까지 섬기던 우상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를 주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즉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개종은 가치관의 변화, 생활을 변화, 인격의 변화까지 일으켰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올 때 천주교가 먼저 들어왔습니다. 이때 대원군이 천주교도들을 몹시 핍박했습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생겼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짹해도 죽이고 찍해도 죽였기 때문입니다. 즉 가차없이 죽였다는 말입니다. 많은 신자가 죽고 숨어서 살아 남은 자들이 신앙을 지켜서 한국천주교 200여 년의 역사를 이어 오면서 굴지의 교단을 이루었습니다. 그 신앙이 그들의 생활과 인격까지도 변화를 시켰습니다. 그러나 선교가 들어오면서 제사를 인정하는 천주교와는 달리 가정과 가문에서 제사문제로 엄청난 핍박을 당했습니다. 즉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귀신을 섬기던 미신 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곧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가치관과 삶의 목적과 인생 자체를 변화시켰습니다. 고린도인들의 변화와 똑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 없이 살아온 것은 전부 헛것이었다는 자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변화된 그들을 거룩하다 하셨습니다. 이런 변화의 성별이 그리스도인의 영광이 됩니다.


III. 축복의 영광(3절)

1. 하나님의 아버지 되시는 축복(3상반절)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복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복을 주실 때 반드시 하나님이 직접 주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저 수원지의 물이 부엌으로 들어올 때 수원지 물이 바로 여러분 집에 공급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관을 통해서 옵니다. 하나님이 바로 복의 수원지요, 그 복을 우리에게까지 연결해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곧 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영광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은 어마어마합니다.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만의 아버지 하나님이라 하면 우리의 하나님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시므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이시오, 다윗에게 어마어마한 성공을 주신 하나님, 엘리야에게 큰 능력을 주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축복도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데 우리의 영광이 있습니다. 마귀가 축복을 해 주겠다고 영광이 될 수 없고 석가모니가 축복을 주겠다고 영광이 될 수 없으며 복이 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입니다. 즉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이 최고의 영광이요 복입니다.


2. 은혜의 축복(3중반절)

신자의 축복의 내용 중에 은혜의 비중이 막중함을 성경은 자주 밝혀줍니다. 은혜라는 말은 기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선물에 우리가 값을 지불하는 법이 없습니다.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엄청난 선물을 받고 보면 기쁨이 충만 해 지는데 그 기쁨까지 포함하여 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은혜 받으면 기쁨이 넘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은혜 받으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변화되지 않는 은혜는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은 마귀가 주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마귀의 은혜는 불평이요 원망이요 미움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신자에게 축복이요 영광입니다. 받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는 매력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매력이란 마음을 사로잡아 끄는 힘을 가리킵니다. 즉 은혜 받으면 예수님께 매력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은혜 받기 전에는 예수님께 대하여 별로 신통한 느낌이 없었으나 은혜 받고 나면 예수님 없이는 못살겠다고 할 정도로 매력을 느낍니다. 예를 들면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나 베다니 마리아의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아야 믿음생활이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마리안 앤더슨은 위대한 가수입니다. 100명의 목사보다 낫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가 뉴욕 타운 홀에서 처음 독창회를 가진 후 그의 음악평은 형편없이 나빴습니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어머니의 충고가 전생애를 변화시켰습니다. 즉 은혜가 위대함보다 먼저 와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가 은혜 받고 부른 노래마다 만인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이처럼 은혜는 신자의 복이요 영광입니다.


3. 평강의 축복(3하반절)

은혜 뒤에 오는 것이 평간(혹은 평안)입니다. 즉 은혜의 결과입니다. 은혜의 원천이 하나님이시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임한다면 평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은 하나님의 평안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는 평안이 참 평안입니다.

역대하 14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은 아사왕과 그 백성에게 사방의 평안을 주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방의 평안이란 빈틈없는 평안 혹은 온전한 평안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평안이 정착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육신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생활의 평안의 있어야 합니다. 의식주 문제가 해결될 때 생활의 평안이 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육신의 평안입니다. 아무리 생활이 풍족하여도 질병에 걸리면 물질의 풍족함은 별의미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소유한 것을 다 주어도 건강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평안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가정의 평안입니다. 자신의 희생을 하면서도 가정의 평안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귀한 평안이 심령의 평안 즉 마음의 평안입니다. 심령의 평안을 잃으면 모든 좋은 조건을 다 갖고 있으면서도 자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평강은 은혜와 함께 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은혜와 함께 혹은 은혜 뒤에 오는 평간은 복이요 영광입니다.

이상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께서 부르심을 받은 소명과, 성별과, 축복은 모두 우리 믿는 자의 영광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