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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매를 맺읍시다 (마 21: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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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를 맺읍시다 (마 21:18-22)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유명한 부흥사요, 신유의 종이었던 김익두 목사님께서 어느 마을에 전도하기 위해서 가셨습니다. 그 마을에는 예수믿는 사람이라고는 전혀 없는 마을이었는데,  때가 6월 초순 모내기철이라 사람들이 모내기를 하다가 점심을 먹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그들에게 가셔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했더니, 한 젊은이가 아주 당돌하게 나서서 이 마을에는 전도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며칠 전에 벼락이 떨어졌는데, 바위와 성황당 나무에 떨어져서 바위가 깨지고 나무가 부러지고 다 타버렸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위와 나무를 그렇게 때리고 치시는지 알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이 안 계시든지, 만약에 계시면 장님이아니냐, 왜 나무를 꺾고 바위를 깨느냐, 그러니까 이 마을에서는 전도할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때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젊은이는 학교에 다녀 보았는가?” “예. 다녀 보았습니다.” “학교에 가니까 선생님 손에 무엇이 들려 있던가?” “예, 막대기가 있습디다.” “그 막대기는 무엇에 쓰던가?” “예, 아이들이 졸고 떠들면 아이들 조용히 하라고 칠판도 탁탁 치고, 또 교탁도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아, 칠판이 무슨 죄가 있겠나? 그 교탁이 무슨 죄가 있겠나? 왜 그것을 때리겠나? 아이들 졸지 말라고, 떠들지 말라고 칠판이나 교탁을 치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안 되면 애들의 머리를 때리는 것일세.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죄 없는 바위와 나무를 치신 것은 자네 깨달으라고, 자네 깨우치라고 죄 없는 바위를 때리고 나무를 친 걸세. 만약에 자네가 계속해서 예수님을 안 믿으면 다음에는 나무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바위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네 머리 위에 벼락이 떨어질 걸세.”

그 말에 이 젊은이가 깨달았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내가 예수 믿겠습니다.” 하고 복음을 받아들여서 당장 그 마을에 교회가 생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열매없는 무화과를 저주하십니다. 죄는 무화과나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열매없는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있었는데, 맞기는 열매없는 무화과나무가 맞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하여서, 또한 종교 지도자들을 대신해서 이 무화과나무가 맞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열매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받는 모습을 보고 ‘열매없는 것은 저렇게 망하는구나’ 깨닫고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메시지였고, 또한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나 때문에, 나를 깨우치기 위해서 매 맞는 무화과가 많이 있음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서, 나를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나를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 내 주변에 있는 것이 깨질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때로는 내 대신 자녀가 맞기도 하고. 때로는 내 대신 부모가 맞기도 하고, 때로는 형제가,  이웃이 맞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나를 깨우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사업과 직장이 맞기도 하고, 때로는 나라가 맞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깨우치기 위하여서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이로 때려오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부득불 나를 심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열매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받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열매없는 인생의 종말이 저렇구나’ 깨닫고, 열매맺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라마다 나라꽃이 있습니다. 국화(國花)가 있습니다. 미국은 감람나무가 국화입니다. 영국은 장미, 프랑스는 백합, 일본은 벚꽃, 우리나라는 무궁화가 나라꽃 아닙니까? 이스라엘의 국화는 무화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무화과는 단순히 하나의 나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나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1. 길 가에 심겨진 무화과나무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가 어디에 있습니까? 길가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길가에 심겨졌다는 말은 잘 보이게 드러나게 심겨졌다는 말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다 알 수 있는 나무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지형적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삼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아무도 다니지 않고 보지도 않는 산중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일찍부터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가에 있는 나라였습니다. 중요한 위치에 심겨진 나무와 같은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였습니다.

무화과는 ‘가난한 자의 양식’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길가의 무화과는 나그네들이 지나가다가 따먹고 허기를 면하게 하는 아주 유용한 나무였습니다. 하나님은 일찌기 이스라엘로 하여금 복의 근원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누어주고 유익을 주라고 했습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온 세상을 다 품에 안고, 그들을 위하여서 기도하며 또한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무화과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열매를 주어서 유익하게 하도록 계획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열매없는 무화과나무처럼 하나님 앞에서도, 세상에서도, 유익을 주지 못하는 열매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열매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는데, 사실은 이 나무를 저주했지만 그 내면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화과를 저주하신 것은 주후 30년경이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맞는 모습을 보고도 이스라엘이 깨닫지 못하자 40년 후인 주후 70년에는 직접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때리셨습니다.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점령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학살을 당했는지, 3백 3십 5만 명이 디도 장군의 말발굽 아래서 칼날에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들, 상상해 보세요. 3백 3십 5만 명이라고 하면 부산시민이 거의 다 죽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엄청난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십만 명 정도가 포로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처참한 일까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돌 하나, 돌 위에 층 놓이지 아니하고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40년 전에 열매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받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하나님 앞에 열매없으면 저렇게 되겠구나’ 깨닫고 회개했으면 이스라엘은 40년 후에 이렇게 비참하게 맞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2천 년 동안 나라없는 아픔을 경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끝까지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다가 말라진 무화과나무와 같은 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열매없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 종말을 가져오는 줄을 깨닫고 열매맺는 성도들 되어서 오늘 이 아침에도 주님께서 우리 신앙의 나뭇가지를 들쳐보실 때에 주렁주렁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있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우리교회 또한 길가에 심겨진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부산에서 교회다니는 사람치고 부산영락교회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지리적으로 길 옆에 세워진 것이 뿐만 아니라 부산의 성도들이 바라볼 때에 부산영락교회는 길가에 심겨진, 다 볼 수 있는, 다 아는 나무입니다. 부산의 택시기사치고 부산영락교회 모르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안 믿는 사람들도 부산영락교회 하면, “아, 구 법원 앞에 있는 쌍종탑의 교회”하고 대부분이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부산에, 길가에, 잘 보이게,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심어놓은 것은 많은 열매 맺어서 이 지역사회를 복음화시키고 유익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잘 보이는 요지에다가 심어놓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중직자들이 있습니다. 중직자들도 길가에 심겨진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우리 부산영락교회의 목사, 장로, 집사, 권사들, 우리 교인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잘 몰라도 우리 장로님들, 우리 교역자, 우리 집사님들, 우리 권사님들은 다 압니다.

잘 보이게 심어놓았어요. 왜 잘 보이게 심어놓은 줄 아십니까?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라고, 열매 주라고, 열매 따먹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귀한 중직자들을 길가에 심어 놓았습니다. 잘 열매 맺어서 성도들에게 유익을 끼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열매를 제공할 수 있는 중직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예수믿는 순간부터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길가에 심겨진 무화과입니다. 믿기 전에는 숨겨진 무화과와 같았는데, 믿고 나면 직장에서도 압니다. 이웃에서도, 친구에게도 길가에 심긴 나무처럼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기 전에는 숨겨진 나무였는데,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일단 예수믿고 나면 표가 나요. “아, 저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이다. 진실하게 사는지 한 번 보자.” 이렇게 본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보면 제일 장애요인이 그리스도인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여서 비난받는 것입니다. “누구때문에 못 믿겠다.” “예수믿는 사람들이 더 하더라.” 목사와 교회를 싸잡아서 비난하는 소리들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듣고 있습니까?

왜 비난합니까? 비난받을 만한 일을 할 경우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교인과 교회에 대한 기대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못된 짓을 해도 교회만은 깨끗하기를 바랍니다. 자기들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믿는 사람만은 진실하게 살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기대를 저버릴 때 실망하고 비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길가에 심겨졌기 때문에, 잘 보이기 때문에, 드러났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하면 비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인과 교회가 길가에 심겨졌기 때문에, 잘 보이는 곳에 있기 때문에 그만큼 기대도 크다는 것입니다. 교인과 교회를 비난한다는 것은 아직도 마지막 소원을 우리에게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간음하고 잘못한 일 하면 당연한 일로 그냥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런 일 하면 비난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안 될 사람이 그렇게 하니까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위해서 비난해 주는 것도 기대심리가 있기 때문인 줄 알고 오히려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의 기대에 미칠 만큼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주님께서 오셔서 내 신앙의 나무를 들추어 보실 때 “아, 열매가 많이 있구나.” 하고 축복하실지 아니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잎은 무성한데 열매 하나 없어서 주님을 실망시지는 않는지 자신을 한번 살펴보아야 되겠습니다.

2. 무성한 잎은 열매를 위해 존재합니다.

무화과나무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 나무입니까? 무화과나무는 꽃을 보는 나무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무화과(無花果)입니다. 꽃이 안 보이는, 꽃이 열매 안에 있는 나무입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목질이 얼마나 약한지 몰라요. 곧게 자라지도 않습니다. 또 얼마나 잘  썩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 나무는 목재용으로도 사용할 수도 없고, 사방용으로 사용할 수도 없고, 땔감으로도 사용할 수 없는 오직 한 가지 열매만을 기대하고 심는 나무입니다.

이 열매를 기대하고 하나님은 우리들을 길가에 심어놓았습니다. 열매로 농부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열매를 주어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만족하게 해줄 사명을 가지고 심겨졌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모두 생산적이고 건설적입니다. 사람을 살립니다. 병자를 고칩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온전케 해서 회복시킵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풍랑 가운데 건져주시고, 또한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모두가 살리고 건설하는 기적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유일하게 파괴적인 기적이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파괴적인 기적을 행하셨느냐? 열매 맺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창조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불순종을 하실 때에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산야의 이름없는 풀포기까지 나름대로 열매를 맺는 것은 창조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요, 하나님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울리는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은 창조질서에 역행하는 것이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인 것입니다.
열매 맺지 않는 것이 하나님에게 이렇게 큰 죄요, 예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고 아프게 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이제 열매 맺으면서 살아가리라. 나의 남은 삶은 풍성한 열매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리라’ 고 다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나무에 있어서 잎사귀의 역할이 뭡니까? 잎사귀는 뿌리로부터 오는 수분과 햇빛을 받아서 광합성 작용과 탄소동화작용을 해서 나무를 자라게 하고, 또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나무의 잎은 나뭇잎 자체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잎사귀로 주신 것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 생명이 있어서 이곳에 나왔는데, 우리에게 주신 생명도 이것이 우리 인생의 열매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느냐? 이 생명가지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주신 하나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잎사귀지, 생명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풍성한 생명을 가지고 열매 맺으라고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을 고쳐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열매 맺으라고 하나님께서 생명이라는 잎사귀를 주셨다’ 그렇게 깨닫고 열매 맺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의 건강도 이것이 열매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제일의 소원을 건강에다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게 있는 건강도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니에요. 열매가 아닙니다. 이 건강도 하나의 수단입니다. 이것도 잎사귀에 불과한 것입니다. 건강이라는 무성한 잎사귀를 주신 것은 열매 맺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건강이 있으니까 우리가 하나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 맺으라고, 일 하라고 건강의 무성한 열매를 주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있는 물질도 열매가 아닙니다. 이게 목적이 아닙니다. 삶의 수단입니다. 물질도 잎사귀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질이라는 풍성한 잎사귀를 주신 것은 열매 맺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열매 맺는 목적을 이루라고 주신 수단이 바로 우리의 물질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물질 있으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 하라고, 열매 맺으라고 주신 잎사귀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에게 있는 재능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능이 열매가 아닙니다. 목적이 아닙니다. 이것도  잎사귀입니다. 나에게 재능이라는 무성한 잎사귀를 주신 것은 열매 맺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재능이 있으니까 일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으라고 재능의 잎사귀를 주셨으므로 그것 가지고 열매 맺는데 사용해야 됩니다.

목사, 장로, 집사, 권사의 직분도 열매가 아닙니다. 이것도 신앙의 잎사귀입니다. 나에게 직분 주신 것은 열매 맺으라고 주신 잎사귀입니다. 직분 있으니까 일하는 것이 아니고, 일하라고, 열매 맺으라고 직분이라는 아름다운 잎사귀들을 우리에게 주었음을 생각하고, 이것 가지고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잎이 무성한 것은 열매를 위한 것입니다. 내게 무성한 잎사귀가 있습니까? 열매 맺기 위해서 주신 축복들입니다. 내게 있는 건강, 물질, 지식과 지위와 직분은 다 잎사귀입니다. 잎사귀는 언젠가 낙엽으로서 다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잎사귀들 영원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 낙엽되어서 떨어질 것인데, 없어지게 될 것인데, 떨어지기 전에 잘 활용하여서 아름다운 열매 맺으라고 주었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열매 맺으라고 주신 잎사귀 가지고 열매는 맺지 아니하고 나무 자신의 모양만 내고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섭섭해 하시고 결국에는 그 나무를 저주한 것 아닙니까?

나는 내게 주신 잎사귀를 가지고 무성한 잎사귀를 가지고 얼마나 아름다운 열매를 지금까지 맺어왔는가? 그것 가지고 자랑하고, 그것 가지고 내가 뽐내고, 그것 가지고 으시대지는 않았는가? 길가에 심겨진 기대되는 나무로서 얼마나 열매를 맺고 있는가? 우리 자신들을 한번 살펴볼 수 있어야 됩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 오셔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의 나뭇가지를 들추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그 무성한 잎사귀를 들추고 “내가 잎사귀 주었으니까 열매 맺어야지” 하고 찾아보시는데, 주님께서 보실 때 어떤 열매가 발견될 것 같습니까?

3. 무화과나무의 소원

여기서 무화과나무는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데, 우리가 무화과나무라고 하면 어떤 소원이 있겠습니까? 이 무화과나무가 우리처럼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 소원이 뭐겠어요? 그 소원은 열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열매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무를 거기에 심은 농부의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열매입니다. 우리를 이 땅에 심어놓으신 하나님의 소원이 뭡니까? 길가는 사람의 소원이 뭡니까? 열매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 소원이 뭡니까? 건강하게 돈 많이 벌어서 자식 잘 되고 오래오래 사는 것. 세상을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소원들입니다. 예수믿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소원은 뭡니까? 우리들도 세상 사람들과 같은 소원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예수믿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없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이 통일입니까? 내가 평생 동안  살아가면서 주님 앞에 서는 그 시간까지 변할 수 없는 한 가지 소원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뭐겠습니까? 그것은 열매입니다. 어떤 열매여야 되겠습니까? 그 한 가지를 발견하고, 그 열매를 맺기 위하여서 줄기차게 달려가서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아름다운 열매를, 주렁주렁한 열매를 보여드릴 수 있는, 하나님의 알곡창고에 들어갈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갑내기로 결혼을 해서 아주 잘 사는 사람을 금슬(琴瑟)이 좋다고 합니다. 금슬은 비파, 수금, 큰 비파와 작은 비파 두 개가 잘 어울리는 것을 말합니다. 부부 사이가 좋은 것을 보통 금슬 좋다고 말하는데, 너무너무 행복하게 살아가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서 60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니까 너무너무 행복해 보여서 ‘이혼 많이 하고 어려운 세상 속에서 이렇게 잘 살고 있으니까 내가 소원을 하나 들어주어야겠다’ 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부부에게 소원을 물어 보셨답니다.

먼저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내가 소원을 들어주겠는데, 뭘 들어주면 좋겠는가?” 그러니까 할머니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행다운 여행을 한번 못해봤는데 세계일주를 한번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래”하시고 소원을 들어주셨는데 비행기 티켓, 일류호텔, 세계를 일주할 수 있는 티켓들이 쫙쫙 쏟아졌습니다. 그것을 본 할머니가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이번에는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뭐가 제일 소원인가?” 할아버지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지금까지 동갑내기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나는 나보다 나이가 30살 적은 여자하고 한번 살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래, 그것도 들어주마.”하시니까 할아버지가 일순간에 90살이 되었답니다. 할머니가 60살이고 할아버지가 90살이니까 30살 젊은 여자하고 사는 것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원이 편안하게 세계일주 여행하는 것입니까? 나보다 30살 젊은 여자하고 한번 살아보는 것입니까? 우리의 소원이 도대체 뭐겠습니까?

여기에 무화과나무의 소원이 열매 맺는 것입니다. 열매는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감사의 열매, 회개의 열매, 기도의 열매, 헌신의 열매, 봉사의 열매, 충성의 열매, 사랑의 열매, 믿음의 열매, 말씀의 열매, 이런 성경의 9가지 열매, 온갖 열매를 다 이야기할 수 있지만 무화과나무가 한 가지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면 그것은 무화과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 영락의 모든 성도들은 생명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어떤 열매를 맺어야 되겠습니까? 또 다른 <그리스도인>이라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내가 제자가 되었으면 또 다른 <제자>를 재생산해 내는 것이 열매인 것입니다.

무화과보고 하나님은 포도열매 맺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하나님의 자녀를 재생산해 내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고, 찾으시는 열매인 것입니다.
내 평생소원은 영혼을 재생산해 내리라. 내 평생소원은 영혼을, 나와 같은 예수 믿는 사람을 다시 한번 재생산해 내리라. 그래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계 선교를 이루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나의 평생소원이 되리라. 변하지 아니하는 나의 소원이 되리라. 그렇게 여러분의 소원을 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혼을 재생산하는, 제자를 재생산해 내는 이것이 나의 평생소원입니다.” 주님께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생애 가운데 적어도 12명 정도, 예수님께서 12명을 제자로 삼았던 것처럼 12명 정도 이상은 전도하고, 이 땅에 살아갈 때에 평생 12명과 더불어서 교제하며, 신앙을 물려주고, 또한 격려하고, 아름다운 가족과 같은 공동체를 이루어나가는 바로 이것이 여러분의 마지막 소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게 되면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농부이신 주님께서,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열매맺는 가지는 더 맺도록 깨끗케 하고 열매없는 가지는 잘라버린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에 열매맺는 가지는 깨끗케 한다는 말은 거름 주고 약 뿌려주어서 잘 자라도록 해주고 담을 막아서 맹수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보호하여서 열매 맺을 수 있는 최상의 축복을 준다는 말씀입니다.

양산에 있는 복지타운 땅이 넓어서 개를 키우려고 몇 년 전에 좋은 진돗개를 우리 교회의 교인이 줘서 키웠습니다. 암컷을 두 마리 더 사서 네 마리를 키웠는데, 한 마리는 참 주인을 잘 따르는데, 한 마리는 잘 안 따라요. 마음대로 해요. 그리고 사람을 잘 물어요. 팔면 수십만 원 할 텐데, 잘 물고 안 따르는 개는 진돗개지만 잡아 먹어버렸어요.

그리고 한 마리를 잘 키워서 새끼를 낳았는데, 네 마리를 낳았어요. 잘 큽니다. 또 한 마리가 새끼를 낳았는데, 여섯 마리를 낳았어요. 그 강아지가 잘 자랍니다. 새끼를 여섯 마리 낳은 개는 보통 때처럼 주면 안 된다고 정육점에서 고기뼈다귀를 가져와서 삶아먹이고 하여튼 사람도 잘 먹지 못하는 좋은 것들을 골라서 개를 먹이니까 살이 토실토실하게 쪄서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는데 그 젖을 먹는 강아지가 얼마나 잘 크는지 제가 그것을 보고 ‘새끼 낳으면 대우가 달라지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짐승도 새끼 낳으면 이렇게 달라지는데, 우리가 열매를 맺으면 하나님께서 열매 맺도록 깨끗케 하시고 거름주고 약 쳐주고 바람막아주고 온갖 축복을 다 주신다고 신실하신 주님께서 약속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네가 무엇이든지 기도하면 내가 들어 응답해 주마. 그리고 네가 정말 나의 참제자가 되리라고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열매맺을 때에 예수님께서 얼마나 흥분하시는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나무에 가까이 오셔서 주님께서 주신 잎사귀들을 들추어보면서 “내가 건강 잎사귀를 주었지. 물질의 잎사귀를 주었지. 생명의 잎사귀를 주었지. 지위를 주었지. 재능 주었지. 한번 보자. 열매 얼마나 맺혔는가?” 하시며 한 사람 한 사람 신앙의 나무를 들추고 계시는 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건강과 지식과 물질과 재능과 지위, 이 무성한 가지를 들추고 계시는데 열매가 없다고 하면 주님께서 실망하셔서 돌아가시고, 열매가 맺혔으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거름 더 주어라. 바람 막아주어라. 약 쳐 주어라.” 주님께서 얼마나 흥분하시겠습니까?

이 시간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그리고 대우받는 신앙의 나무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여, 나에게 기회주시면 앞으로 남은 인생은 열매 맺는데 나의 일생을 쓰겠습니다. 내게 주신 모든 잎사귀들은 잎사귀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열매 맺으라고 주신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이제 열매 맺는데 나에게 있는 모든 잎사귀들을 다 총동원하겠습니다.” 하고 다짐하여서, 주님 앞에 섰을 때 아름다운 열매 맺어서 주님을 흥분케 하는, 주님의 축복을 끌어당길 수 있는, 아름다운 열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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