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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마 9:9~13 (사 44:21~2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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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본문: 마태복음 9:9~13 (이사야 44:21~23 참조)

 
  강추위에 노숙자 자취 감춰, 쉼터는 북적 - 엊그제 연합뉴스 기자가 인터넷에 올린 기사의 제목입니다. 그 기사를 한 번 그대로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복지기관이 운영하는 노숙자 쉼터와 드롭인센터(노숙자 하룻밤 숙소)는 추위를 피해 찾아온 노숙자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종로구 `보현의 집'은 62명의 노숙자를 수용, 정원 70명에 육박했고, 영등포구 `옹달샘 드롭인센터'(노숙자 하룻밤 숙소)에도 정원의 두 배를 넘긴 46명의 노숙자가 찾아들어 매서운 한파를 피했다. 옹달샘 드롭인센터 관계자는 "노숙자 중간 쉼터 역할을 하던 `자유의 집' 폐쇄로 길거리 노숙자가 늘어난 상황에서 한파가 몰아닥치자 노숙자 쉼터와 하룻밤 숙소 등지에 노숙자들이 몰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노숙자들의 동사가 우려되기 때문에 수용 인원을 넘기더라도 이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일단 재우고 있는 상황"이라며 "정원의 두 배 이상을 넘겨 수용하는 시설이 속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평소 수백명의 노숙자들로 붐비던 서울역 부근에는 노숙자 대부분이 자취를 감춘 가운데 남아있는 노숙자 20여명은 술을 마시거나 서로 함께 붙어앉아 추위를 견뎠고 일부는 신역사로 이동, 박스로 몸을 겹겹이 둘러싼 채 잠을 청했다. 경찰도 혹시 모를 노숙자의 동사 사고에 대비해서 8대의 순찰차를 운용, 서울역 광장과 서부역 부근 순찰 활동을 강화했다.

  그런데 그 기사에 대한 네티즌들의 댓글들이 있어서 대충 읽어 봤는데 한결같이 노숙자들을 비난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지하철 역 같은 곳에서 꾀죄죄한 몰골의 노숙자들과 마주칠 것 같으면 솔직히 말해서 저도 달갑지 않았습니다. 불쌍하다는 생각은 별로 해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그런 모습과 태도를 매우 불쾌하게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또 한 명이 엊그제 을지로입구 역에서 진입하는 열차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물론 새삼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또 한 명의 노숙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제 가슴 속에 뭔가 뜨거운 것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저 자신을 엄하게 꾸짖는 그 어떤 것이었습니다. “눈 뜬 장님 같은 이 위선자야! 어째서 너는 그들을 병자로 생각하지 못하느냐? 도움과 치료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환자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외면해 오지 않았습니까? 바리새인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입니다. 불쌍한 이웃을 돕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무능과 게으름을 비판하고 정죄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는 즉시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세리입니다. 동족으로부터 가혹하게 거둬들인 세금 중 일부를 로마 당국에 낸 후 나머지로 자기의 배를 채우는 세리입니다. 민족의 반역자요 죄인으로 취급되어 마땅한 인물입니다. 때문에 지금까지 한 번도 사람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마땅한 그를 향해서 예수님이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철저하게 소외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 머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잔치 자리에는 예수님의 일행뿐 아니라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초대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즐겁게 잡수셨습니다. 그 광경을 본 바리새인들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제자들에게 따졌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사실 당시에는 예수님 같이 경건한 분이 세리의 집에 머물면서 죄인들과 함께 잔치를 즐긴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식 밖의 행동이요 또 비합리적인 행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그런 비난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 놀랍게도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총체적인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생명을 구하는 일을 위해서 고정 관념 따위는 과감히 버리셨습니다. 관습이나 전통 따위도 완전히 엎어버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막상 생명을 잃어버릴 것 같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일찍이 선지자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이사야 43장 18절, 19절, 그리고 21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오늘 우리 앞에는 컴퓨터라는 문명이 이기가 놓여 있습니다. 잘만 사용하면 정말 편리한 도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보를 컴퓨터에 입력하고 그 정보를 일부러 지우지 않는 한 컴퓨터는 그것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죄를 모두 다 컴퓨터에 입력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언제 어디서나 그 컴퓨터를 작동시키기만 하면 컴퓨터가 우리에게 이렇게 호통을 칠지 모릅니다. “네 이놈! 여기 있는 네 죄의 목록이 보이지 않느냐?” 그런데 컴퓨터는 스스로 그 죄에 대한 정보들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기억조차 아니하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오랜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모든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때문에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바벨론의 신 말둑을 섬겼습니다. 결과적으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기억조차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들의 죄를 말끔히 없애 주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 봅시다. 이사야 44장 21절부터 23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의 손길을 뻗으시고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구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도 나타났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의 기록을 보면 그들이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났는데 그 여종이 여러 날 동안 그들을 따라다니며 괴롭혔습니다. 견디다 못한 바울이 그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들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그들은 실컷 두들겨 맞았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분한 일입니까?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구원의 주님과의 사귐을 확인했습니다. 비록 몸은 감옥에 갇혔을지라도 그들의 마음만은 한없이 평안하고 자유로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 받은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러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죄수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자다가 깬 간수가 죄수들이 다 도망친 줄로 알고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 때 바울이 그에게 외쳤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그 간수의 몸은 감옥 밖에 있었지만 사실상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간수가 무서워 떨며 그들 앞에 엎드려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그러자 바울은 그에게 확실하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는 즉시 하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고 크게 기뻐했다고 성경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결코 그 간수의 죄를 들춰내거나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하보다 귀하고 또 하나뿐인 생명을 스스로 끊으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끔찍한 짓을 하려는 것입니까? 그리고 어떤 일간지에는 연초부터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지냈던 소외된 이웃들의 비참한 형편과 처지가 특집으로 연재되고 있습니다. 눈물 없이 차마 읽을 수 없는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 더 늦기 전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랑의 눈으로 그들을 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그들의 삶의 현장에 함께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에 동참하는 충성스러운 일꾼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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