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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각하는 신앙 (고후 10:1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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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생각하는 신앙 
본 문 : 고린도후서 10:1 - 6

  우리가 잘 아는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심으면 성품을 거두고 성품을 심으면 운명을 거둔다.” 더 쉽게 표현한다면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면 습관이 변하고 습관이 변하게 되면 성품까지 생겨나고 성품이 바뀌면 그의 인생이 전혀 새롭게 전개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삶의 변화에 가장 첫 번째 시작에 바로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 됨됨이가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실 때에 말씀을 통해서 창조하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선언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은 하늘과 땅에 이 모든 세계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생각 속에 창조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계획이 창조에 역사 속에 들어가 있고 그 안에 하나님의 디자인이 들어가 있고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향한 하나님의 청사진이 그 안에 들어가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다시 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고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있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 명백한 계획, 그리고 생각, 뜻을 갖고 이 먼 우주를 만드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말씀으로 선포되었을 때, 이 세상은 카오스라고 하는 무질서에서 질서로 바뀌고 혼돈의 세계 속에서 조화의 세계로 변모되는 것입니다. 천문학에 빅뱅 이론이 마지막에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연세계의 놀라운 조화, 그리고 이 질서에 법칙이 어떻게 생겨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연 만물에 창조가 우연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나님의 디자인,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생각이 그리고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생각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면서 우리에게 생각하는 힘을 부어주셨습니다. 인간만이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이 생각을 바르게 쓰면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할 수 있고 이 생각을 잘못 쓰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가게 됩니다. 첫 인간이 타락한 결정적인 그 이유를 스코트 팩이라고 하는 사람은 ‘교만이나 불순종은 원죄가 아니다. 그것은 원죄의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원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생각의 게으름이다.’라고 이야기한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을 생각하지 않았을 때, 인간이 타락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탄의 이야기를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어둠에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바로 생각의 게으름 때문에 온 인류가 저주와 심판, 정죄 아래 놓이게 됩니다. 생각의 게으름 때문에 하나님 형상으로 된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당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해줍니다.

  오늘도 우리의 살림이 규모가 없고 무질서한 상태로 우리가 놓여져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습관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습관 이전에 생각하지 않는 우리의 삶. 어떤 것이 보다 아름다운 것인가, 내 자신에 대해서 사과하지 않을 때, 사람이 혼돈 속에 빠지게 되고 규모가 없는 모습으로 흔들리게 되는 것을 우리가 확인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라” 생각을 잡으라고 얘기합니다. 생각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쳐줍니다. 이 생각을 조절하지 않으면 우리의 생각이 어디로 튈 수 있을는지 우리는 상상할 수가 없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의 운명은 나 자신의 생각에 의해서 결정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삶의 방향에 우리의 생각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대부분의 결정은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에 산물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나 자신의 생각을 붙잡지 아니하면 내 자신이 변화될 수가 없습니다. 여기 붙잡는다고 하는 말은 군대 용어입니다. 포로를 자유하게도하고 자유한 자를 붙잡는 우리 인간의 능력을 뜻합니다. 자기 생각을 조절할 줄 알아야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우리의 언어와 행동 바로 밑에 뿌리 깊게 놓여져 있습니다. 십계명에 언급된 인간관계에 대한 말씀 중에 제6계명이 “살인하지 말라”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살인이라고 하는 것이 칼자루를 들었을 때 살인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총을 겨누었을 때 그때 살인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향한 분노의 생각이 나를 붙잡게 될 때에 그 생각이 내 통제를 벗어나게 될 그 순간부터 우리는 살인의 자리를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주 놀랍게 그의 산상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형제에게 분노하는 사람마다 심판을 받을 것이다. 형제를 향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아주 엄청난 말씀을 합니다. 생각이 그 사람의 언어를 규정하고 생각이 그 사람의 행동을 규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생각에 다른 이웃에 대한 분노와 욕을 품게 되면 그 자체가 엄청난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제7계명에 보면 “간음하지 말라.” 라고 하는 싸구려 러브호텔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혼한 배우자에 대한 신실한 약속, 그리고 내 배우자로만 만족하기로 작정한 그것을 포기한 그 순간부터 그리고 다른 이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는 데서부터 간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혼이라는 것이 가정법원 판사 앞에서 도장을 찍을 때,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나의 배우자 없이도 내가 혼자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이미 이혼에 과정이 우리 속에 전개되어지는 것입니다.

  생각이 뭡니까?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습관을 잉태하는 모체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고 그래서 이것을 통제하는 능력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먼저 나 자신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 자신을 변화되려고 하면 내 생각부터 변화되어야 합니다. 생각이 바뀌지 않은데 내 자신이 변화되겠다고 수없이 작정을 해봐도 소용이 없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주시고 우리에게 생각하는 힘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파스칼은 그의 팡세에서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도 가장 연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다.” 여기에 인간에 탁월성이 있다고 그는 얘기합니다. 여기에 도덕적인 원리가 있고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 그 모든 능력이 생각하는 갈대인 그 생각 속에 하나님이 주신 복이 있다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바울은 ‘사랑의 장’인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진짜 사랑을 하려고 하면 성숙한 생각을 해야 가능하다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말을 합니다. 유치한 것들, 아기 같은 것들, 그런 사고를 버릴 때에 성숙한 장성한 사람의 사고를 같게 될 때에 그때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때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할 수 있다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렇다고 하면 성숙한 자와 성숙하지 않은 자와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5장 14절에 보면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어린아이들은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지만 어른들은 단단한 음식을 먹습니다. 그 이유를 영적으로 그렇게 얘기합니다. 지각을 통해서 판별한다는 것입니다. 이성을 통해서, 지성을 통해서, 어떤 것이 선하고 어떤 것이 악한지를 구별할 줄 아는 그 생각이 있을 때에 성숙에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고 우리들에게 가르쳐줍니다. 생각을 포기한 사람들, 아예 분별하기를 싫어하고 그냥 되는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성숙이 없고 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삶의 변화가 나타날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들은 올바른 생각들은 받아야 되고 잘못된 생각은 내버려야 합니다.

  ‘창의성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쓴 칙센트미하이라고 하는 사람은 창의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살펴본 결과 이런 공통점을 깨닫게 됩니다. 많은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을 깊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쓸데없는 생각, 나쁜 생각, 못된 생각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들은 잘못된 쓸모없는 생각을 과감히 버리는 그것을 내 던져버리는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마틴 루터에 유명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공중 나는 새를 향해서 “네가 멈춰라!” 이렇게 말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새가 우리 머리 위에 앉아서 둥지를 틀게 되면 여기는 둥지를 틀 자리가 아니라고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쁜 생각은 마치 우리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새와 같습니다. 여러분, 새가 여러분의 머리 위에 둥지를 틀려고 하면 그대로 놔두시겠습니까? “여기는 네 자리가 아니다.” 하고 쳐버릴 것입니다. 나쁜 생각, 쓸모없는 생각, 거짓된 생각, 잘못된 생각에 대한 이런 강력한 반대와 거절이 있어야 진정한 올바른 성숙에 길에 들어설 수 있다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생각에서는 모든 것이 나옵니다. 온갖 잡된 것도 생각에서 나옵니다. 거짓, 음란, 열등감, 좌절감, 불안, 두려움…… 그러나 그 반면에 거룩한 것도 생각에서 나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하는 성령에 이 놀라운 법도 우리의 생각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생각을 훈련해야할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켜 나가야 합니다.

  알렉산더 코프라고하는 사람이 쓴 수필에서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일곱 명의 바보의 모습을 이야기 해줍니다. 첫째, 어제의 실수를 오늘 또 저지르는 사람. 둘째, 성공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배경이 있다고 하는 사람. 셋째, 생각을 바꿀 용기가 없는 사람. 넷째, 변화를 가져올 행운만을 기다리는 사람. 다섯째, “저건 결코 될 리가 없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 여섯째, 쓸모없는 물건에 돈을 낭비하는 사람. 일곱째, 하나님 없이도 잘 지낼 수 없다고 믿는 사람. 여러분, 생각을 바꿀 용기가 없어서 어제의 실수를 오늘도 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내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미련함에 모습으로 우리가 멈춰 설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생각을 복종시켜야 됩니다.

  이때 우리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렇게 이해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신앙을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생각이라는 성가신 일을 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준 것이 신앙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지성과 인간의 생각을 무시하고 마치 기도하면 마음속에 그냥 스크린이 하나 딱 떠올라 가지고 ‘어떻게 할까요?’ ‘오늘은 오른쪽으로 가봐라! 이번에는 왼쪽으로 가봐라!’ 이렇게 문득 문득 떠오르는 것으로 신앙을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르쳐 주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결코 우리의 지성과 우리의 이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에 우리의 이성을 더 확대하고 더 넓히고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이성이 더욱 더 성숙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진정으로 생각하는 신앙을 갖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을 묵상하고 예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쓰여져 있는 성경책을 읽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새해가 들어서 성경책을 읽겠다고 작정 하셨습니까? 한 장씩이라고 읽어나가야 합니다. 작심삼일이라고, 1월도 3주 정도 지나니 결심이 흐트러지셨습니까? 또 새해가 다가옵니다. 이번 주가 설날이 오는데 다시 한번, 또 한번, 결정하셔도 괜찮습니다. 인생이란 매일 매일 결정하는 것입니다. 한번 결정하고 끝까지 가는 사람은 하나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묵상하는 것! 다시 말씀을 읽는 것!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우리의 이성이고 우리의 지성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처럼 인간을 어떻게 넉넉히 대할 수 있는가? 예수님처럼 어떻게 시간을 이해하고 예수님처럼 내게 주어진 삶을 적극적으로 살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생각과 기도가 과연 만날 수 있을까? 그것을 만날 수 있다고 모로스라는 사람이 ‘오늘은 우리의 것’이라고 하는 글 안에서 아주 재미있게 표현해 줍니다. 생각할 시간을 가져라, 그것은 힘의 근원. 뛰어 놀 시간을 가져라, 그것은 젊음의 비결. 독서할 시간을 가져라, 그것은 지혜의 샘. 친절한 시간을 가져라, 그것은 행복의 길. 웃을 시간을 가져라, 그것은 영혼의 음악. 명상할 시간을 가져라, 그것은 기운을 북돋아주는 청량제. 기도할 시간을 가져라, 그것은 하나님께 다가갈 생각에 하나 됨.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나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만납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읽고 무릎을 꿇었을 때,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 속에 들어와서 내가 나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사랑의 생각, 하나님의 소망의 생각, 하나님께서 이 땅을 위해서 행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생각을 새롭게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자기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생각은 자기 안에 숨겨진 내면에 얼굴입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인생에 포기이며 나 자신에 대한 포기입니다.

  생각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생각하는 신앙을 가지려고 하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생각의 게으름과 대비되는 것은 뭘까요? 생각하는 신앙에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스콧트 팩은 계속 이 용기라는 말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두려움이 없는 것은 결코 용기가 아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것은 일종에 뇌상이다. 뇌가 상하는 것이다. 용기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혹은 고통을 무릅쓰고 앞으로 전진하는 능력이다.’
  여러분, 다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어떻게 생각하는 우리의 삶의 훈련을 하는 것인지, 어떻게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이 내게 오셔서 나를 통해서 이 삶을 보도록 허락하신 은총이라는 그 놀라운 것을 깨닫는 것이 생각하는 신앙입니다. 어떤 순간에도 생각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인생의 포기입니다. 현재에 우리의 모습은 어제까지 내가 생각한 총체의 합이 오늘 나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내일에 모습은 뭘까요? 오늘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 어떤 생각을 품고 말을 하고 어떤 생각을 품고 내 인생을 진행하고 어떤 생각을 내 마음속에 품고 내 앞길을 달려가겠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에 따라서 내일의 나의 모습이 결정되게 될 것입니다. 말씀으로 여러분의 생각을 열어야 합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렇게 될 때 생각하는 신앙을 갖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동행하시는 놀라운 은총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기도

  생각하시는 하나님을 본받아 우리도 생각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이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해서 내 자신과 내가 처한 삶을 되돌아보는 생각하는 신앙임을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생각을 마음껏 펼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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