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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평강의 하나님이 지키시리라 (시 42:1-5, 빌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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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평강의 하나님이 지키시리라 성경본문 
본문 : 시 42:1-5, 빌 4:4-9


정신과적인 용어에 불안장애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안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걱정이 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 정신적 고통과 싸워나가면서 삽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이 현상이 뒤집히면서 불안에 압도되고 맙니다. 그러면 불안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다 소실되어 버리고 이렇게 되면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불안의 노예가 되고 불안에 완전히 사로잡힌 그런 존재가 됩니다. 이것이 불안장애입니다.

다음에 공포장애가 있습니다. 아무런 위험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되고 괜찮은 것을 알면서도 공포를 억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아무 이유 없이 불안하고 공포에 휩싸이게 되고 공포에 떨게 됩니다. 이것이 공포 장애입니다. 그리고 공황장애가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죽으면 어떻게 할까하는 걱정입니다. 모든 상황을 불리한 쪽으로만 생각합니다. 누구도 다 죽습니다. 그러므로 죽는 것 때문에 걱정할 것 없습니다. 시간문제입니다. 조금 일찍 가고 늦게 가는 것 뿐입니다.

어느 어부가 바다에 나갔다가 심한 풍랑을 만나 죽었습니다. 그 아버지를 장례하고 그 아들이 그 배를 타고 또 바다로 나갑니다. 그것을 보고 동네사람들이 이 사람아 자네 아버지가 그 배를 타고 나갔다가 죽었는데 그 배를 타고 나가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들이 제가 묻겠습니다. 당신 아버지는 어디서 죽었습니까? 침대에서 죽었지 그러면 당신은 저녁에 침대에서 잡니까? 안잡니까? 침대에서 자지. 아버지가 침대에서 죽었는데 왜 침대에서 잡니까? 내가 바다에 나가는 것이 그것과 같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을까하는 걱정을 날려버려야 합니다. 불안과 공포는 끝도 없습니다. 공황장애 뚝 떼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강박장애가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 자신을 못 믿습니다. 그래서 집에 가스 불 잠갔나? 안 잠갔나? 예배당에 앉아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물쇠를 잠갔나? 안 잠갔나?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서 확인합니다. 또 내려와서는 가만 있자 잠갔던걸 내가 열어놓고 내려오지 않았나 하고 또 올라가고 합니다. 내가 나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습니다. 의심하지 말고 확신을 가지고 그리고 모든 것 다 맡겨 버려야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에 너희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겨 버리라고 했습니다. 불안장애, 공포장애, 공황장애, 강박장애의 뿌리는 불안입니다. 불안이 원인입니다.

한국안전시스템의 텔레비전 광고에서 최불암씨의 잠궈도 잠궈도 불안까지 잠글 수는 없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며 맞는 말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방문이나 금고 같으면 자물쇠를 잠그면 되지만 마음의 불안은 잠글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42편 5절에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오히려 찬송하리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불안은 하나님을 바라볼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아마 해결됩니다. 하나님은 불안한 사람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불안한 마음을 제거하고 평안한마음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바라볼때 불안이 없어집니다.

오늘 읽은 빌립보서 4장 7절에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예수안에서 너희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마음을 우리마음대로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다스려 주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실 때 내가 평안할 수 있는 것이지 나 스스로 평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는 평강이라는 단어가 여러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사람들에게 평강이라는 말은 샬롬입니다. 구약 성경에 350회 이상 나오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의미도 깊고 다양하게 쓰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의 서신에도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이 여러번 기록되어있습니다. 은혜는 헬라식 표현이고 평강은 히브리식 표현인데 이것을 합해서 은혜와 평강이라고 썼습니다.

빌립보서 4장 7절에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장 9절에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6장 26절에 하나님은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신다고 했고 이사야 48장 18절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말을 들으면 평강이 강같이 임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평강의 뿌리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평강이 옵니다. 사람은 스스로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편안한 것이 가장 좋은 복입니다. 항상 마음이 불안하면 복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특히 명절때 마음이 평안해야 즐거운 명절이 될 수 있습니다.
성어거스틴이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을 발견하기까지는 그 어디서도 참 편안을 얻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까지는 평안은 없습니다. 불안이 환경과 물질과 관계없는 것처럼 평안도 무조건적입니다. 환경이 나쁘다고 불안한 것 아니고 환경이 좋다고 반드시 평안한 것은 아닙니다. 돈이 없으면 불안하고 돈이 있다고 반드시 평안한 것은 아닙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시다가 풍랑을 만났을때 제자들이 어부 출신이었지만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소란을 떨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풍랑중에서도 배의 고물에 누우신채 평안하게 주무셨습니다. 모두들 죽겠다고 떠드는데 예수님께서는 편안하십니다. 이 평안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놓고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몇 시간 전에도 평안함이 있었습니다. 이 절대적 평안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언제 어떻게 죽을는지 모릅니다. 순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가지고 빌립보서를 기록했습니다.

4절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항상 기뻐할 때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주안에서 절대적 기쁨을 가지고 기뻐해야합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항상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하고 지켜줍니다.

시편 4편 7절에 시인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 더하다고 고백했습니다. 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했습니다. 관용의 덕은 일방적인 것입니다. 이해와 인내와 용서를 넘어서서 상대방이 어떻게 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예수 안에서 덮어주고 사랑하는 것이 관용입니다. 관용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잘 못하고 나를 미워하고 괴롭혀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용서하는 것 같이 관용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무한정하고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용서보다 더 좋은 약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쉽게 용서하십시요. 용서 할 줄 아는 사람은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러므로 용서해야 건강합니다.  용서하지 않고 건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으로 많은 고생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듯 우리도 모든 사람을 그냥 용서합시다. 용서하는 사람이 가슴에 평화를 날마다 유지할 수 있고 평화의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평화의 사람만이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9절에 말씀하시기를 평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6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세계를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하나님께서 기르시느니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지만 하나님이 입히느니라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6절 하반절에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기도하는 관계이어야 하고 그리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전체를 맡기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모름지기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불평과 불만을 품고 기도하지 맙시다. 끓어오르는 욕심과 미워하는 마음과 분한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응답이 없습니다.

어느 여자성도의 남편이 예수님을 믿지 아니해서 늘 술시중을 해야 했습니다. 더구나 술이 만취되어 들어오는 날이면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가끔 행패도 부리고 해서 얻어맞기도 하면서 그 시중을 들기가 견디기 어려운 고역이었습니다. 하루는 다른때처럼 남편이 술 마시고 와서 어지럽혀 놓은 것을 다 정리하고 나서 잠이든 남편 옆에 앉아서 기도를 하는데 신세타령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저는 언제까지나 이 모양으로 살아야합니까? 구슬피 울며 탄식하면서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감동하사 목사의 설교가 생각났습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신다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감사할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좌우지간 감사합니다. 순간 스스로 마음이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과부신세보다야 감사하지 지금은 저 꼴이지만 언젠가는 좋은 사람이 될는지도 모르지 고주망태가 되어서도 자기집 찾아오는 것이 감사하고 날마다 술을 마시는데도 건강해서 감사하고 나 예수 믿는 것 방해하지 않으니 감사하고 토요일에는 특히 술을 많이 마셔서 주일날은 꼼짝 못하고 누워서 집을 보면서 아내에게 교회 나가라고 하니 얼마나 다행하고 감사할일인가 이런저런 감사한일을 생각하면서 얼굴이 환하게 되어 웃고 있는데 남편이 목이 말라 눈을 떠보니 아내가 밤중에 혼자 앉아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남편이 놀라서 묻습니다. 왜 웃고 있어 당신하고 사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고 기쁘고 감사해서 웃고 있어요. 나하고 사는 것이 무엇이 행복하고 감사하단 말인가 그 부인은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을 하나 하나 이야기 했습니다. 남편이 다 듣더니 걱정하지마 나도 예수님 믿어 줄게 이렇게 말하드랍니다. 그 부인이 간증하기를 내가 10년 동안 기도해도 응답이 없으시던 하나님께서 한번의 감사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가정 생활하다보면 불만도 많고 억울한 일도 많이 있고 구구한 사정도 많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면 감사할일이 참 많습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모든 사정을 기도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얼굴표정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이야기할 때의 그 분위기 그런 표정 그런 마음가짐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려야합니다. 빌립보서 4장 8절에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9절에 보면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했습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라는 말은 지적인 이해를 말하고 “받고”란 말은 가슴으로 받는 것을 말합니다. 수락하는 것을 말합니다. 배우고 받는 것은 정적인 것입니다.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했습니다. 듣고 본 것은 경험을 말합니다.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여야 합니다. 내가 행한 만큼 평강을 얻게 됩니다. 행한 만큼 기쁨을 얻고 행한 만큼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알고 느끼고 경험한 바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이 무효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행하지 않음이 우리의 마음에 후회와 고민과 위선으로 남게 됩니다.

6.25때 최일선에서 참전하고 있는 군인들에게 장티푸스가 무섭게 돌아 수천명의 군인이 모두 예방주사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주사를 놓은 간호사들은 남에게는 주사를 놓아주면서 정작 자기들은 주사를 맞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후 공교롭게도 그 간호사들만 장티푸스에 걸려 머리가 홀랑 다 빠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병은 예방하면서도 정작 자기의 병은 예방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현대 사람들은 다 참으로 유식합니다. 도덕을 논하라면 철학자 수준이고 언변도 좋아 말들을 잘합니다. 말 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하고 주장하고 가르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안합니다. 행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이고 행함이 없으면 평강이 없습니다. 너는 나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했습니다. 행해야 평강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십니다.

복음서에 보면 하루는 젊은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묻기를 예수님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너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 율법사는 근심하며 돌아간 다음에 예수님께 오지 아니하였습니다. 차라리 예수님께 묻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인데 물어보았기 때문에 그 율법사는 헤어날 수 없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행하여야 합니다. 그 율법사가 자기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님을 따랐으면 그가 원하는 영생을 얻고 영원히 후회함이 없는 삶의 주인공이 되었을 것이 확실합니다. 누가복음 6장 46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47절에 내게 나아와 내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절에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49절 듣고 행치 아니하는 사람은 주초 없이 흙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사람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라야 들어가리라고 했습니다. 배우고 듣고 본 것을 행해야 최후에 가서 웃을 수 있습니다. 지금 좀 무리가 되고 억지가 된다고 하더라도 순종하십시다. 순종하면 끝에 가서 보람과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순종한 아브라함은 자유 하였고 영광을 얻었습니다.

이번 주간에는 민족의 명절인 설 연휴가 있습니다. 가족과 친척들에게 예수 믿는 사람은 뭔가 다르다는 그런 예수님의 향기를 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제사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0절에 보면 대저 이방인의 제사 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해도 영적인 부분은 양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8장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일을 하면 평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근심과 불안은 병이고 장애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불안에서 벗어 나야합니다. 평강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때 우리는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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