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새 해를 여는 기도! / 엡 3:14-21

  • 잡초 잡초
  • 346
  • 0

첨부 1



새 해를 여는 기도! 
에베소 3:14-21


요한 일서 2장 15절을 보면,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 단순명료합니다. 다른 해석의 여지나 이론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일단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남아 있을 수 없으며, 그러므로 그 누구라서 세상도 사랑하고 아버지도 사랑할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랑과 아버지 사랑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설을 앞둔 오늘, 가장 먼저 이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마음을 점검하고 싶습니다. 혹시 나도 세상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내 속에 아버지의 사랑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것은 아닌가? 철저하게 점검하면서, 바라기는, 2004년 한 해, 세상 보다 아버지를 더 사랑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우리 이 사실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품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세상도 담아내고 아버지도 담아낼 만큼 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세상을 사랑하면서 아버지도 사랑한다고 우길 만큼 뻔뻔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말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세속적인 마음과 아버지를 사랑하는 거룩한 마음은 결코 한 마음일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 늘 기억하면서 내 안에, 우리 안에, 오직 하늘 아버지의 사랑으로만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으로만 충만하시기를,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여러 말로 전해 줍니다. 그만큼 귀하고 복된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놓치지 말라 하시는 안타까운 권면인데요, 선지자 예레미야는 아버지의 사랑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노라!”(렘 31:3). 요한은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요 13:1)고 전해 줍니다. 끝없는 사랑, 영어로 endless love인데요, 그러므로 무궁한 사랑,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영원토록 사랑해 주시는 분, 바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사랑 이야기를 하자 하면 절대로 빠질 수 없는 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전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갈 2:20). ! 아버지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 나를 위하여 자기 몸까지 버리시는 사랑입니다. 곧 '죽기까지 사랑'으로 나를 사랑해 주시는 아버지, 해서 바울은 나도 아버지만을 사랑할 것이며, 그러므로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이 사랑에서 나를 끊을 자가 없다고 당당하게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랑을 받아 누리는 오늘날 우리들의 반응입니다. 참으로 못난 아들과 딸들이,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아버지 대신 세상을 사랑하니 말입니다. 정말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사랑 받기는 좋아하면서, 그 사랑 배신하고, 아버지 대신 세상을 선택하니 말입니다. 해서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하신 것인데요, 이런 현대인들의 어리석음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이제, 오늘 주신 말씀의 세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에베소서 3장 14절과 15절을 눈으로 읽으면서 그 장면을 마음에 그려볼까요? 지금 바울이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있는 곳은 로마의 감옥, 그러므로 지금 바울은 로마 감옥의 차디찬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중입니다. 그만큼 절절한 기도입니다.

그런데요, 14절의 주어를 한번 찾아보실까요? 내가! 무슨 뜻입니까? 기도는 내가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의 주체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물론 무릎도 내가 꿇어야 합니다. 난 지금 바쁘니 내 대신 당신이 기도하라, 난 요즘 피곤하니 내 대신 당신이 새벽제단에 나가 무릎을 꿇어라,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선 이 한 가지를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내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피곤해도, 아무리 잘 나가도, 금년 한 해, 가장 먼저 기도하는 시간부터 정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약속 시간인 그 시간을 철저하게 지켜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여 금년 한 해, 정해진 시간에, 아버지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빌고 또 비시기 바랍니다. 하늘 아버지, 변함없이 크신 사랑으로 응답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무릎 꿇고 기도하여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요, 오늘 우리가 받은 말씀의 내용, 곧 바울의 기도 내용이 참으로 은혜가 됩니다. 설을 맞이하는 우리 동광 가족들을 위한 중보 기도로 받고 싶은 내용인데요, 해서 오늘은 새 해를 여는 기도라는 제목의 말씀을 받으려고 합니다. 자, 그러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로마 감옥의 차가운 바닥에 무릎 꿇고 아버지께 간구했던 바울의 기도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새 해를 여는 우리의 기도 제목으로 받도록 하십시다.


1. 새 해를 여는 기도의 제목 하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옵소서!

3:16 / (읽기) /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 그 첫 번째 제목은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옵소서. 왜 그랬을까? 답은 간단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속사람 보다 겉 사람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속사람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저 겉 사람 치장하는 일에만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현대는 겉 사람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시대입니다. 몸의 겉모양 꾸미는 일에만 집착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현대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겉 사람, 곧 몸의 외적 아름다움입니다. 몸을 치장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건강산업, 화장품산업, 등 몸을 치장하는 일과 관련된 3차 서비스 산업은 기형적으로 커진 반면, 의식주 생활을 책임지는 1차 2차 산업은 점점 오그라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의학 분야에서도 꼭 필요한 외과 의사는 부족한 반면 성형외과 의사는 넘쳐나는 실정입니다.

물론 겉 사람의 꾸밈새도 중요합니다.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외모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며 무례함으로 다가갈 것입니다. 또한 건강한 몸 역시 중요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는 기본적인 사랑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몸에 대한 집착이 그 도를 넘는다는 데 있습니다. 어인 일인지 요즘 사람들, 오로지 겉 사람 치장하는 일에만 골몰합니다. 자기 몸 만드는 일에 너무 집착합니다. 해서 하루에 서너 시간, 헬스클럽에서 운동은 해도, 하루에 삼십분, 교회에서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도무지 속사람의 강건함을 위해서는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아니오,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몸이 중요한 만큼 마음도 중요하니, 그 무엇보다 마음을 잘 지키라는 겁니다. 겉 사람이 소중한 만큼 속사람도 중요하니 무엇보다 속사람의 강건함을 위해 기도하며 투자 좀 하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금년 한 해, 가장 먼저 기도해야 할 제목은 속사람을 강건하게 해 주십사는 기도이어야 합니다. 왜? 우리의 겉 사람은 날이 갈수록 후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날이 갈수록 늙어가기 때문입니다. 정말입니다. 죄송합니다만, 나이 많아 늙어지면 찍어 바르나 안 바르나 거기서 거깁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날이 갈수록 강건해 지는 법, 진짜로 멋진 분은 속사람이 강건한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 인생 말년에 그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꼭 우리 동광의 어르신들처럼 말입니다.

해서 사도 바울은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니, 썩어져 가는 겉 사람을 위해서만 애쓰지 말 것이요, 오히려 속사람을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라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몸이란 것이 항상 청년의 때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섭리입니다. 하여 점점 후패하고 늙어가는 것, 우리의 몸이요 겉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항상 청년의 때에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정녕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람의 겉모습 보다는 속사람이 더 중요함을 알게 됩니다.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속사람이 강건해지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이 세 가지를 마음에 품으면 속사람이 강건해집니다. 16절을 다시 보실까요? 거기 세 단어에 표시하십니다. 영광, 성령, 능력! 그리고 풍성이란 단어에는 별표를 하십니다. 자, 이제 저를 보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짚고 넘어갑니다. 세 가지 중 가운데에 무엇이 있습니까? 성령! 그 좌우편엔? 영광과 능력!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하늘의 영광이 풍성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일단 성령으로 충만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부디, 성령 충만으로 풍성한 영광과 풍성한 능력을 누리며, 날마다 속사람이 강건하여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속사람이 강건하시기 바랍니다.>

2. 새 해를 여는 기도의 제목 둘,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옵소서!

3:17a / (읽기) /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중보 기도한 두 번째 제목은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게 하옵소서!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옵소서!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살게 해 달라는 기도이지요.

여기서 그리스도를 마음에 계시게 한다는 헬라어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나의 주인으로 거하시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주님을 영접할 뿐만 아니라, 오직 그 분 그리스도만을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기도입니다.

문제는 우리 성도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손님처럼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분들,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라 주장하면서,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해 자기 뜻에 따를 것을 요구합니다. 주님께 자기 뜻을 따라 일해 달라고 불경하고 주장합니다. 한 마디로 내가 주인이고 그리스도는 손님입니다.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계시게 하소서, 이 기도는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오직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저를 보십니다. 주로 상담학에서 하는 말인데요, 우리 인간의 마음속엔 운전대가 하나씩 있다고 합니다. 내 몸과 마음과 영혼, 내 인생을 몰고 가는 운전대인데요, 때로 그 운전대를 미움과 복수심이 잡기도 하고, 출세욕과 탐욕이 잡기도 한다지요. 심하게는 사탄과 마귀에게 그 운전대 맡기고 사는 인생들도 있다지요. 그런데 지금 바울이 하는 말, 그 운전대를 주님께 온전히 맡기며 살아가라는 겁니다. 아니, 주님께서 그 운전대를 맡아 달라고 간구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조차도 내 마음의 핸들을 주님께 맡기려 들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대부분, 자기가 운전하려고 합니다. 자기가 가장 확실한 운전수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지치면 이번엔 세상의 대리 운전자들을 데려다 놓습니다. 어인일인지 주님께는 맡기려 들질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예 그 운전대를 사탄과 마귀에게 빼앗기기도 합니다. 참 한심한 인생인데요, 문제는 그런 인생, 이리 저리 접촉사고에, 크고 작은 교통사고로 만신창이 인생이 된다는 데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께 온전히 맡기지 못한 결과입니다. 내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시게 해 드리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께 맡기지 못합니까? 17절 말씀을 보니,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믿지 못해서입니다. 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계시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공연한 헛수고 하지 마시고, 오직 그리스도께 온전히 맡길 때 모든 일이 형통한다는 이 말씀,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나는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지금까지 내 인생의 주인은 누구였습니까? 지금까지 내 마음의 운전대를 누가 잡고 있었습니까? 내 인생 자동차가 달려온 길을 돌아보니 어떠합니까? 어떤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까? 존경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새 해를 여는 기도의 두 번째 제목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계시게 하옵소서!”우리 이렇게 기도하십시다. 주님! 오셔서 좌정하여 주시고 내 인생의 주인 되어 주소서!

정말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몰고 갈 때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인생길 될 줄로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주님이 내 마음의 운전대 잡아주실 때 우리의 길이 평탄하고, 모든 일이 형통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말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노릇할 때엔 오히려 모든 것이 불안하고 모든 것이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시면, 염려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할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인생,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합니다. 이 믿음으로 금년 한 해, 주와 함께 만사형통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만사형통하시기 바랍니다. 믿음 안에서 잘 되고 잘 되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자식 농사 잘 되시기 바랍니다.>


3. 새 해를 여는 기도의 제목, 셋,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충만하게 하옵소서.

3:17b-19 / (읽기) /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하여 중보 기도하는 세 번째 제목은 크게 둘로 나누어지는군요. 하나는 18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둘은 19절에 아버지의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금년 한해 줄기차게 기도해야 할 제목,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그리고 충만하게 하소서입니다. 먼저 인사하며 마음에 새길까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는 기도는 왠지 좀 마음에 걸립니다. 왜요? 지금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잘 알지 못한다는 전제를 깔고 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죄송하지만, 현실이 그렇습니다. 에베소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다고 주장했지만, 바울이 보니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해서 지금 사랑하는 에베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대로 알게 해 달라고 감옥에서 무릎 꿇고 간구하는 중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잘못 알고 있었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먼저 18절에 보니,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리켜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라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사랑, 지식을 초월하는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말입니다. 뒤집으면 그동안 내가 지식으로 사랑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에베소, 고린도, 아테네, 그 곳을 당대 헬라 철학의 중심지라 뻐기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합니다. 철학적 연구나 학문적 방법론 가지고는 절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연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관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관조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오직 알고 깨달아 실천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어떻게 해야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18절에 보니,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사랑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랑은 나 홀로 알 수 없는 것, 연구실에서 오래 연구한다고 해서 풀어낼 수 없는 것,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간단합니다. 사랑하면 됩니다.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 사랑으로 세상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리라! 그렇습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연구 대신 사랑하면 됩니다. 관찰 대신 사랑하면 됩니다. 관조 대신 사랑하면 됩니다. 그저 모든 성도와 함께 사랑을 나누면 됩니다. 우리 인사하며 다짐합니다. 일단 질문...

<제가 당신을 사랑해도 되겠습니까? 네! 제가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또 하나의 처방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 17절의 후반부인데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공동번역 성경은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살아가야 한다고 풀어줍니다. 무슨 뜻입니까? 오직 그 분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라는 겁니다. 내 인생을 설계하면서 오직 사랑으로만 주춧돌을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그 때 우린 사랑을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기도는 이것만으로 완성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넘어 아버지의 충만하심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음 19절에 그 답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넘어 아버지의 충만하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 그것은 그 사랑을 온전히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19절에 보니,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4차원적 사랑이라 하시는군요. 일단 읽어보실까요? / 3:19 / (읽기) / 그렇군요. 그 사랑엔 넓이가 있고, 길이가 있고, 높이가 있고, 깊이가 있다 하십니다. 해서 어떤 이는 그 사랑을 넓은 사랑이라 합니다. 어떤 이는 그 사랑을 굉장히 긴 사랑이라 합니다. 어떤 이는 높은 사랑이라 합니다. 어떤 이는 깊은 사랑이라 합니다. 모두가 맞는 말이면서 모두가 틀린 말입니다. 왜? 이들은 그리스도의 사랑 중 4분의 1만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아 알게 하여 주옵소서.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입체적으로 알게 하여 주옵소서. 하여 그 사랑에 힘입어, 마침내 아버지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아멘!

하나님의 사랑은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1차원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여 잔 머리나 꼼수로는 계산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랑, 상식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 사랑을 알면 알수록 우린 고차원의 세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기적을 빚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오늘 우리도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어 기도하지 않고서는 지식을 초월하는 그 사랑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 예배의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리입니다. 여기 기도의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 사모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금년 한 해 무릎 꿇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이 감옥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하나님 사랑의 충만한 경지까지 나아가기를 빌고 또 빌었던 것처럼, 우리도 사모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옵소서. 그 사랑 깨달아 아버지의 충만하심에 이르게 하옵소서.

이제 설입니다. 다시 한번 금년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한 해를 살다보면 크고 작은 역경들이 앞길을 가로막는 일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만,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어려움 이겨 승리하시고, 마침내 영광과 감사로 한 해를 마감하게 되시기를 축원해 드립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