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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멘은 시작이다 (대상 16:2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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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멘은 시작이다
본문  역대상 16:28~36

우리들은 ‘아멘’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아마 성도들이 제일 많이 쓰는 말이 바로 ‘아멘’이라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이 예배에서 지금까지 ‘아멘’이라는 말을 내 입으로 몇 번했고, 또 몇 번들었는지 한 번 세어 보시기 바랍니다. 무척 많을 것입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많이 사용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아멘’이라는 말의 뜻과 의미를 알고 사용하면 더 좋은 것입니다.

‘아멘’은 ‘진실로’ ‘참으로’ 이런 뜻이 있는 말입니다.
‘동의합니다’ ‘나도 그렇게 되어지기 원합니다’ 이런 뜻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무슨 구호처럼 ‘아멘’ 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분별력을 가지고 사용해야합니다.
‘아멘’에 나의 확신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아멘’이 나의 압축된 신앙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에는 소망과 회개와 믿음과 결단이 들어 있어야합니다.

똑같은 ‘아멘’이라고 하더라고 확신, 신앙고백, 소망, 회개, 믿음, 결단, 이런 것이 들어 있는 ‘아멘’과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아멘’은 차이가 있습니다.
때때로 국회에서 많은 법안들이 기계적으로 처리되는 것을 봅니다. 이 때 의원들은 그 법안의 내용도 잘 살피지 않고 무조건 손을 듭니다. 이럴 경우 ‘거수기’ ’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손드는 기계라는 뜻입니다.
무조건 ‘아멘’하는 것은 ‘거수기형 아멘’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어떤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평소에 가족들이 여러 번 전도했는데 이 할아버지는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은 급하게 목사님을 모셔왔고 목사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할아버지, 예수님이 할아버지를 위해 돌아가셨어요. 그 예수님을 믿으세요.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천국갑니다.’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눈을 뜨더니 ‘아멘’ 한마디하고 숨을 거뒀습니다. 그 동안 가족들이 하는 것을 듣고 보아서 교회에서 어떻게 한다는 것은 알고는 있었거든요.
이 ‘아멘,’ 그 할아버지가 평생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꼭 한 번 한 ‘아멘’은 그 할아버지를 구원하게 하는 ‘아멘’이 되었습니다.
이 아멘은 아주 귀중한 ‘아멘’이요 큰 힘을 가진 ‘아멘’입니다.

‘아멘’은 서류에 도장 찍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중요한 서류라고 하더라도 도장을 찍지 않으면 효력이 없습니다.

작년 11월에 김운초라는 분이 76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분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화곡동에 있는 그리스도교신학대학도 이 분이 재산을 기증해서 세워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분은 몇 해 전에 자기의 유언장을 작성해서 우리 은행 대여금고에 보관해 놓았습니다. 이 분이 세상을 떠난 다음에 은행에서 금고를 열어보니 유언장에 자기의 예금 120억 원과 300억 원대의 부동산을 연세대학교에 기증한다는 내용이 자필로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참 좋은 일이지요. 이런 분들이 더 많아져야합니다.
그런데 그만 도장이 찍혀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분의 동생이 도장이 찍히지 않은 유언장은 무효니까 그 돈과 땅을 연세대에 줄 수 없다고 소송을 제기해서 지금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요한 서류를 작성해 놓은 것이 있으면 오늘 집에 가셔서 거기에 도장을 찍었는지  한 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들 가운데 연세 많은 분들이 ‘내가 살고 있는 이 집, 내가 살아 있을 때까지는 우리가 사용하고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교회에 바치겠습니다’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감리교본부에서는 그런 경우에 얼른 서류를 작성하고 도장을 받아서 보관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돌아가시면 자녀들이 ‘우리 부모님 그런 말 한 일 없다’ ‘설사 그렇게 말하셨다 하더라도 증거가 없다’ 하면서 일을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아멘’은 이 도장과 같은 것입니다.

도장은 몸체에 반듯하게 파진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가 앞입니다’ 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입니다.
중요한 일에 사용하는 도장, 좋은 재료로 만든 도장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어디가 앞인가?’ 찾으면서 ‘이 도장, 정말 찍어야할 것인가?’ 다시 생각하라는 뜻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내용을 잘 생각하고 ‘아멘’하는 것은 인감도장을 찍는 것과 같습니다.
내용도 생각하지 않고 ‘아멘’하는 것은 일회용 막도장을 찍는 것과 같습니다.

‘아멘’은 대개 어떤 말을 듣고, 또 어떤 일을 하고 제일 끝에 합니다. ‘아멘’이 ‘동의합니다’ 하는 뜻이니까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감사 찬양인데 감사 찬양이 끝났을 때 모든 백성이 ‘아멘’하였습니다.
성경은 제일 끝이 아예 ‘아멘’으로 끝납니다. 성경의 제일 끝은 요한계시록 22장 21절인데,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이렇습니다.
찬송가도 ‘아멘’으로 끝나는 찬송가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지금 기도 끝났을 때 ‘아멘’ 하고, 성시교독 끝났을 때 ‘아멘’하고, 성경봉독 끝났을 때 ‘아멘’하고 설교 끝났을 때 ‘아멘’하고, 찬양 끝났을 때 ‘아멘’ 합니다.
예배가 다 끝났을 때도 ‘아멘’합니다.

어떤 분이 자기는 다른 때 하는 ‘아멘’은 반갑고 찬양대의 찬양이 끝났을 때 하는 ‘아멘’은 아쉽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했더니 기도나 설교는 지루한데 끝나니까 아멘 소리가 반갑고, 찬양은 더 듣고 싶은데 끝나니까 아쉬워진다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 전후해서는 항상 열등감과 비애를 느낍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설교 전 찬양대의 특별찬양에는 ‘아멘’ 소리가 큽니다.
설교 끝에는 ‘아멘’이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설교 뒤 순서가 봉헌특송인데 봉헌특송이 끝나면 ‘아멘’이 크게 나오고 박수까지 나오는 일이 많습니다. 오늘도 그럴 것입니다.
“아멘의 성격이 다르다. 하나는 ‘정서적 아멘’이고 하나는 ‘의지적 아멘’이다.” 뭐, 이렇게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일단은 열등감, 비애, 이런 것들을 갖습니다.
‘아멘’ 많이 받는다는 점에서는 찬양대원 여러분은 목사보다 행복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찬양대원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주시고, 찬양대원들은 그 행복감을 안고 더 열심히 찬양하기 바랍니다.

이렇게 끝났을 때 ‘아멘’을 쓰기 때문에 ‘아멘’은 그 본래의 뜻보다 ‘끝났습니다’ 하는 의미가 더 강해진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기자가 뉴스 보도하면서 ‘지금까지 어떤 방송 아무개였습니다.’ 하는 것이나 무선통신 할 때 자기 할 말 다 하고 ‘오버’ 하는 것이나 교회에서 ‘아멘’하는 것이 같은 것으로 여겨질 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교회 사전에 “아멘: 원래는 ‘진실로’ ‘참으로’라는 뜻이나 지금은 예배의 한 순서나 예배 전체가 끝났음을 알리는 말로 인식되어 있음’라고 뜻풀이가 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기도문이나 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까 ‘아멘’은 성도들이 제일 많이 쓰는 말이라고 했지요.  이런 퀴즈가 있습니다. ‘영화에 제일 많이 등장하는 동물은 무엇입니까?’ 정답이 무엇인지 아세요? 정답은 사자랍니다.
어느 영화사인가 사자가 머리를 뒤틀면서 ‘으엉!’우는 것을 상호로 사용하는 영화사가 있지 않습니까?
그 영화사가 제작한 영화들은 모두 그 사자가 ‘으엉!’ 울어야지 시작됩니다. 
교회에서는 ‘아멘!’해야지 기도도 끝나고,  찬양도 끝나고, 설교도 끝나고, 그리고 예배도 모두 끝나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아멘은 끝이 아닙니다.
아멘은 시작입니다.
새로운 출발입니다.
형식적으로는 끝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시작입니다.

기도가 끝나 ‘아멘’ 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으로 믿고 소망의 삶을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병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실제로는 장례식 준비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를 듣고 ‘아멘’하였습니까?
선포된 말씀대로 살기 위해 힘쓰기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찬양을 듣고 감동을 받아 ‘아멘’했습니까?
그 받은 감동을 안고 살기 시작해야 합니다.

축도
뒤에 ‘아멘’하고 예배의 모든 순서를 끝냈습니까?
예배에서 얻은 힘을 가지고 한 주간 믿음으로 이기는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아까 아멘은 도장 찍는 것이라고 했는데 도장을 찍었으면 그 서류에 적힌 내용이 실천되어야합니다.
도장을 찍는 것은 ‘이제부터 이 내용대로 일이 진행되기 시작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장이 중요한 것입니다.

도장을 찍는 것, 중요합니다.
도장을 찍은 내용대로 이행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집 매매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면 중도금을 지불하고, 잔금을 지불하고, 등기를 이전하고 이사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매매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잔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손해를 봅니다.
계약하지 않은 것보다 못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봅니다.
다윗은 왕이 된 다음에 서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깁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까지 예루살렘은 여부스 족속이 차지하고 있었고 이스라엘의 중심지는 헤브론이었습니다.
다윗은 여부스 족속을 무찌르고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통치의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다윗 성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대하11:7)

예루살렘을 중심지로 삼은 다음에 서둘러 한 일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것이었습니다. 그 때까지 법궤는  기럇여아림이란 곳에 있었습니다.
다윗이 법궤 옮기는 일을 서둔 것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물으며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윗의 이런 마음은 역대상 13장 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라 하매

지난 번 신년축복성회에서 강사 목사님이 ‘우리’라는 말을 많이 쓸 수록 좋다고 했는데 역대상 13장 3절에는 ‘우리’라는 말이 네 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이 사울과 다윗의 차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울은 제멋대로, 또는 제 마음대로의 삶과 통치를 하였으나 다윗은 법궤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살았고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궤 앞에서 묻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법궤는 바로 이 성경입니다.

다윗은 정성을 다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길 준비를 합니다.
하나님의 궤를 둘 곳을 마련하고 장막을 치고, 법궤를 옮길 사람들을 선발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몸을 성결하게 합니다.
그들이 법궤를 채에 꿰어 어깨에 매고서 찬양을 하면서 예루살렘으로 옮겼습니다.
드디어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옮겨졌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기뻐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백성들을 축복하고, 백성들에게 좋은 음식, 떡 한 덩이, 야자 열매로 만든 과자, 건포도로 만든 과자를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립니다. 역대상 16장 7절부터 36절까지가 다윗의 감사 찬양인데 대단히 중요하고 또 많은 내용을 압축한 찬양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신 것을 감사하며 찬양하고 온 땅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노래합니다.
이 감사찬양은 나중에 풀어서 시편 여러 편, 96편, 105편, 106편을 이루게 됩니다.
중요한 것들을 골라 압축해 놓은 것을 에센스라고 하는데 역대상 16장에 있는 찬양은 다윗 이 지은 수많은 찬양의 에센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찬양이 끝났을 때 백성은 ‘아멘’합니다.(36절)
다윗은 이 찬양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 백성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뜻으로 ‘아멘’하였습니다.
다윗은 이 찬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라고 하였는데 백성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뜻으로 ‘아멘’하였습니다.
다윗은 이 찬양에서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는데 백성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뜻으로 ‘아멘’하였습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 그런 통치를 하려는 이 중요한 일, 예루살렘을 예루살렘으로 만드는 이 의미 있는 일이 ‘아멘’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전에는 군사적 요새였습니다. 험한 곳에 있어서 정복하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이제 법궤가 옮겨지고 그 법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묻는 삶을 살겠다고 약속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겠다고 선포하고, 그리고  백성들이 ‘아멘’으로 화답함으로 예루살렘은 거룩한 도시로서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기도한 대로, 말씀 들은 대로, 읽은 성경대로, 찬양의 내용대로, 예배에서 받은 은혜대로 다시 한 번 새롭게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작은 새로운 시작들이 모여서 크고 위대한 새 출발이 이뤄집니다.

‘아멘을 신중하게 해야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이제부터는 좀 생각해 보고 아멘 해야 하겠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에는 아멘 하지 말아야겠다’
‘아멘 하면 그대로 살기 시작해야 한다는데 그대로 살기 어려운 내용에는, 또 그대로 살았다가는 손해보는 내용에는 아멘 하지 말아야하겠다’
해서 오늘부터 교회에서 ‘아멘’ 소리가 적어지거나, 아멘 소리가 나오는 것이 늦어지면 안됩니다.
운전을 배우고 나서 운전이 손에 익은 다음부터는 ‘아, 이것은 무엇이지’ ‘이것은 무엇이지’하면서 운전하지 않습니다. 거의 본능적으로 변속하고 브레이크 밟고 그렇게 합니다.
하나 하나 생각하며 하다가는 소대장이 됩니다. 소대장이 무언지 아시지요? 운전을 제대로 하지 못해 뒤에 차를 죽 달고 가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의 소대장이 되어서 다른 사람의 신앙을 가록 막아서는 안 됩니다.
‘아멘’의 뜻을 안 다음에 ‘아멘’하는 것은 본능적으로 운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처음에 “아멘이라는 말은 많이 사용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했지요.
‘아멘’이라는 말은 또 크게 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아멘’하면 힘이 납니다. 나도 힘이 나고 듣는 사람도 힘이 납니다.
아멘 소리 많이, 힘있게 나오는 교회가 힘이 있는 교회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끝났을 때 ‘아멘’ 크게 하세요.
하나님이 더 빨리, 더 풍성하게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시편 73편은 다윗의 기도시인데 끝에 ‘아멘’이 두 번 나옵니다. 끝의 두 절, 18절과 19절을 볼까요?

홀로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끝나니라

‘아멘’이 거듭해서 나오니까 이 기도시가 더욱 힘있게 느껴집니다.

성경 읽으면서 ‘아멘’ 자주 하세요.
우리는 성경에 나를 맞추려고 해야지, 나에게 성경을 맞춰서 ‘이 말씀은 마음에 든다 아멘’ ‘이 말씀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다음 말씀!’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첫 번째 이단은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성경들 가운데서 자기 마음에 맞는 성경들만 모아서 정경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이단으로 정죄되어 교회에서 추방당했습니다.

특별히 찬양 끝났을 때 ‘아멘’을 크게 하세요.
그 찬양이 더 아름다워집니다.
찬양대원들이 힘을 얻습니다.
그 찬양을 통해 더 큰 힘과 은혜를 받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멘’에 대해서 조사하다가 한 가지 특별한 경우를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을 ‘아멘’이라고 한 경우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4절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고 한 것은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라고 한 것은 요한복음 1장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으니 알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왜 아멘이라고 했을까, 무슨 뜻일까, 궁금해집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면서 사셨습니다.

‘너,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살면서 그들을 구원해라’
‘아멘’하면서 성육신하셨습니다.

‘너, 경제적인 부요나, 권력이나, 인기로 세상을 구원하려 하지 말고 말씀으로 세상을 구원해라’
‘아멘’하면서 광야의 세 가지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너, 십자가의 쓴 잔을 피하지 말아라’
‘아멘’하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은 예수님을 아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멘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시면서 순종하는 것이 아멘의 삶입니다.

오늘은 새해 셋째 주일입니다. 새해의 새로운 다짐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설이 들어있는 주간입니다. 설은 또 하나의 새해입니다. 설의 유익 가운데 하나가 ‘다시 한 번 이 해를 새롭게 살자!’ 하는 것입니다.
설을 맞으면서 ‘나는 아멘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겠습니다’ 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아멘은 끝이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아멘’한대로 살기 위해 늘 새롭게 출발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아멘이신, 아멘의 삶을 사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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