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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친구로 산 사람 (창 18: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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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나님의 친구로 산 사람 (창 18:16-21) 


하나님의 친구로 산 사람(창18:16-21)
‘친구’라는 말은 참 정감이 있는 말입니다.
사전적인 뜻? 오랫동안 가깝게 사귀어 온 사람. 가깝게 지냄, 허물이 없음, 비밀이 없음의 의미를 가집니다.
옛말에 ‘죽마고우’(竹馬故友)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대나무로 된 말을 타고 함께 논 동네 친구를 가리킵니다.
또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이 있는데 조금은 생소할 수 있습니다.
중국 고사성어인데요. 관중과 포숙은 어렸을 때부터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죽마고우였습니다. 두 사람이 절친한 친구였는데 특히 포숙이 관중을 더 깊이 사랑했습니다.
관중은 욕심이 많고 잔머리도 잘 돌아가는 친구입니다.
포숙은 마음이 넓고 포용적인 친구입니다.
젊었을 때 관중은 포숙과 같이 생선 장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익금을 두 사람이 공평하게 나누어 가져야 했지만 언제나 관중이 더 많이 집어 갔습니다. 이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관중을 욕했지만 포숙은 관중을 변호해 주었습니다. “관중이 이익금을 더 많이 가져가는 것은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나보다 집안이 더 가난하고 딸린 식구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또한 두 사람이 함께 전쟁터에 나갔을 때 포숙은 맨 앞에 서서 열심히 싸웠지만 관중은 언제나 뒷전에서 얼쩡거리다가 싸움이 끝나면 가장 먼저 걸어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관중을 비겁자로 몰아붙일 때에도 포숙이 감싸주었습니다. “관중이 비겁해서가 아니라 그에게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야. 몸을 아껴 살아남아서 어머니께 길이 효도들 다하려는 효심에서 그랬던 게야”

이렇게 포숙은 관중이 여러 가지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한결같이 우정을 지켜주었습니다. 한번도 배신하지 않고. . .
관중이 나중에 포로로 잡혀 목숨을 잃게 되었을 때에도 포숙은 그를 구해서 높은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관중보다 낮은 자리에 머무르면서 친구가 잘 되기를 빌었습니다. 결국 관중은 제나라의 유명한 재상이 되어서 나라에 큰 공헌을 할 수 있었습니다.
관중은 나중에 포숙의 눈물겨운 우정에 감동이 되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 준 것은 포숙이었다.”
관중이 큰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포숙이라는 좋은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밀어내고 흠집을 내려고 하는데. . . 친구도 없습니다. 그러나 포숙은 평생 관중을 믿고 감싸주고 자기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게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우정에서 나온 말이 '관포지교'라는 말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낮은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와 더불어 살기를 원하시니 이렇게 감사. 감격할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함이라”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고.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요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 . .”
우리를 위해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친구가 어디에 있으리요. 우리가 예수님과 친구하고 싶다고 친구가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친구 하자고 제의를 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그분은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최고의 친구이십니다.
우리의 허물을 끝없는 사랑으로 덮어주시고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방황할 때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옆에서 지켜 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다 외면하고 버려도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여러분들이 제 아무리 좋은 친구를 많이 가졌다고 해도 그 친구들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연약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때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섭섭하게 만들고 배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친구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찬양) 예수보가 더좋은 친구없네(두번) 괴로울 때 다가와서 마음에 평화주는 신실하신 나의 참 친구. 외로울 때 찾아와서 친구가 되어주는 사랑 많은 나의 참 친구.
주 예수 사랑하리라. 나의 생명다할 때까지(두번)

여러분 여러분의 참 친구는 누구입니까?
누구를 친구로 삼으시렵니까.
사람은 가까이 하는 사람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변덕장이를 친구로 삼으면 자연 변덕스러운 사람이 되는 법입니다.
돈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수전노가 되기 쉽고 오락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육체적인 정욕으로 가정 파국을 맞는 일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좋은 친구 때문에 출세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 나쁜 친구 가까이 하다가 망하는 사람들도 허다합니다.

맹모는 자식 교육을 위하여 세 번의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시장에서 공동묘지에서 서당가로 세 번의 이사를 하였다고 하였다. 좋은 교육의 환경에서 교육시킬려고. . .
그 당시부터 좋은 학군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무엇을 가까이 하시고 계십니까?
신앙인은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당장의 이익을 위하여 부정한 권력, 유명한 사람과가까이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게 될 경우 세상적으로 가깝게 하고자 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가까이 따라 오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살았습니다. 친구와 이야기 함과 같이 하나님과 대화하며 살았습니다.
약2:21-23에 보면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친구의 관계로 가깝게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 친구처럼 지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가 되어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아내 사라는 경수가 그치고 자신은 노령의 나이 75가 되어 자식을 낳을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자녀가 있을 예언하십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습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은 옳게 여기신 것입니다. ‘의로 여기셨다고’ 그때 하나님은 너무기뻐하시면서 ‘우리 친구하자’하시고 친구 제의의 손을 내미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친구의 증거를 보여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징표를 요구할 때 하나님은 제물을 지정해 주시면서 번제로 드리라고 합니다. 횃불이 쪼개진 고기 사이로 지나갑니다. "내가 이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친구 제의 요청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신용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의로 여기셔야 합니다.

1. 참 친구는 외로울 때 함께 있습니다.

매일 정오만 되면 교회에 들어가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은 들어간 지 2,3분만에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관리인이 교회 문을 나서는 노인을 불러 세웠습니다.
“무슨 일로 교회에 들어갔다 나오십니까?”
“그야 기도하고 나오는 길이지요.”
“기도라니요 ? 그 짧은 시간에 무슨 기도를 한다는 말입니까?”(조금 수상쩍다는 듯이)
“저는 길게 기도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예수님 ! 저 왔습니다. 짐(Jim) 말입니다’”
약 한 달 후, 노인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이 들어온 이후로 병실에서는 늘 웃음이 떠날 날이 없었습니다. 이상히 여긴 간호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 할아버지께서는 이 병실의 환자들에게 웃음을 주고 계신다면서요?”
“음, 내가 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지. 모두 다 나를 찾아오는 그 방문객 덕분이야. 그 사람이 내게 늘 기쁨을 주고 가거든”
간호사가 평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노인에게 방문객이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방문객이라뇨 ? 도대체 언제 찾아오나요?”
“날마다 나를 찾아오지. 정오만 되면 늘 내 침대 곁에 와 있는걸. 그분이 나를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하신다우. ‘여보게 짐 ! 잘 있었나 ? 나 예수야!’”하고 말이야.
그리고는 기쁨을 한 아름 내게 안겨 주고 가시지. . .”이 할아버지는 늘 하나님을 친구로 삼고 사는 할아버지였기에 외롭지 않았습니다. 기쁨이 넘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참 친구셨습니다.

창13:14절에 조카 롯이 아브람을 떠났습니다. 물좋고 기름진 소돔 땅을 택해서. . .
롯이 떠나고 아브라함은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롯이 떠나고 난 외로운 그 자리에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부터 함께 동행했기 때문에 서로가 얼마나 의지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떨어진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얼마나 허전했겠습니까? 두렵기도 하고. . .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을 올케 여기신 하나님은 그 자리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도 그와같이 오십니다. 외로운 자리에 오십니다.
허전하고 텅빈 것 같은 그 자리에 오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믿음을 인정 받는 것입니다. 옳다고. . . 신용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에, 삶 속에 늘 찾아오시는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2. 참 친구는 비밀이 없습니다. (16-21)

야고보서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참 친구 사이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부모에게는 못하는 말이라도 친구에게는 합니다.
하나님은 친구 된 아브라함에게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친구 된 아브라함에게 뜻을 알리고 당신의 일을 하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선택권을 줄 때 롯은 눈에 보이는 대로 물과 풀이 좋은 소돔을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여지없이 그것을 차지해 버립니다. 아브라함은 여러가지로 마음이 허전, 섭섭했습니다. 하나님은 허전하게 서 있는 당신의 친구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보라는 것입니다.

창13:13-14절에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네 자손에게주리니 영원이 이르리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보이는 대로 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서 바라봐야 합니다.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라고 하시는 것은 이유 없이 말씀하시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넘치는 대접을 받은 하나님과 두 천사는 소돔으로 향할 쯤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7)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친구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계획을 숨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 아브라함을 택한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 소돔과 고모라성에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창18:18-19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친구 아브라함을 택하신 이유는 놀랍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복을 받게 하고 후손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하나님의 친구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려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친구인 우리들을 통해서 주님의 지상명령인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 역할을 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친구로 부르신 이유는 함께 일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일을 함께 동역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참 친구는 급할 때 도움이 됩니다(22-33)

22절 두 천사는 소돔으로 가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있는 소돔성을 멸하시겠다고 하시니까 아브라함은 두려웠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구원해 달라고 중보하며 간청합니다.
보이는 대로 소돔을 선택한 롯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선택한 아브라함과는 엄청난 차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축복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 가운데 북쪽(북미)으로 이민간 사람과 남쪽으로 이민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메이플라호’를 타고 북쪽으로 간 사람들은 매사에 믿음으로, 예배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매스터호’를 타고 남쪽(남미)으로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청교도이고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한 사람들인데 동기의 차이는 큽니다.
남미로 간 사람들은 새로운 대륙에 가서 돈을 벌려는 관심이 더 컸습니다.
그러나 북미로 간 사람들은 순수한 신앙적인 동기뿐이 없었습니다.
남미로 돈벌러 간 사람들은 신앙도 못 찾고 돈도 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북쪽으로 간 사람들은 신앙을 성취할뿐 아니라 세계 강국으로 우뚝설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신다고 말씀하실 때 보통사람 같으면 지난번에 아버지 같은 삼촌을 손톱만큼도 생각지 않은 조카에 대해서 모른척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할 때도 소돔성은 멸망해야 했습니다.
얼마나 악한 도시였으면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죄악의 도시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까? 원래는 이 성읍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물이 넉넉하고 땅이 기름지고 아마 에덴동산같았나 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목자의 심정으로 소돔성을 사랑합니다. 특히 롯의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참 지도자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 성 사람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세상을 사랑하여 소돔 땅에 들어가 살게 된 롯을 생각할 때 견딜 수가 없어서 간절히,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린 것입니다.
50명에서 10명에 이르기까지 필사적으로 구원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창세기19:2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 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친구 아브라함의 간절한 요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친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죽어가는 이 민족과 나의 형제들의 수많은 영혼들을 구하는 하나님의 친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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