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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 이후, ‘하나님의 집’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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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이후, ‘하나님의 집’

12:3-13


맨 처음 기독교가 탄생했을 때, 이 새로운 종교는(그때까지는 유대교였으므로)아무런 법적 보호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유사시에는 사회적 불안이나 위기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려 걸핏하면 사회적 속죄양으로 박해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오늘날에야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아무런 위협과 부담을 주지 않지만, 당시 기독교인들은 사회적인 손해를 감수하고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렇게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소종파로, 요즘으로 치면 사이비 종파로 천시를 받았습니다. 더욱이 기독교는 로마 재국이 반란범으로 지목해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를 따르는 무리의 종교였습니다.


이런 종교가 로마 제국의 국가적 종교가 되었다는 사실은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죠. 그러면 물어야 하죠. ‘무엇이 기독교를 로마의 국가 종교로 만들었나?’라고 말입니다. 아니, 질문을 바꿔서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크나큰 박해를 무릅쓰고 초대 기독교로 끊임없이 밀려들어왔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언어입니다. 신약성서의 언어가 쉽고 대중적인 그리스어였는데, 당시 로마의 언어가 그리스어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전역에 기독교가 널리 전해질 수 있었다는 겁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당시 기독교의 구성원들이 군인이나 상인들이었는데 , 이들이 직업적으로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전파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들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초대 기독교의 가르침이 목자 잃은 양같이 사정이 딱하고 몹시 지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초대 기독교가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실제 삶에서 구호(구제)와 협동의 조직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

예수의 운동과 바울의 초기 기독교 운동은 제국의 지배와 통치 방식을 미화하는 온갖 구호에 휘말리지 않고 현실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그로 인한 고통을 마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수의 노력과 바울의 투쟁은 교회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어졌을까요? 이것을 한마디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교회가 각양각색이듯이 그때도 예수와 바울에 대한 해석과 실천이 다양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 1세기 말 초대 교회가 바울이 애서 지키고자 했던 평등의 가치를 어떻게 지켜 냈으며, 또 어떻게 잃어버렸는지를 살펴  봄으로 이 시대의 교회가 어느 자리에 놓여 있는지, 그 자리에 깃들고 사는 교인들의 신앙이란 과연 정당한 것이지를 묻고자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교회는 자신을 세상의 나그네들을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집’으로 이해했다는 것과, 바로 그 하나님의 집이 로마 제국의 가치관과 위계질서의 영향을 받아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아마 오늘은 그 교회의 정체성의 변질, ‘하나님의 집’이 ‘로마의 평화’로 변질되는 과정까지 만 말씀드리게 될 듯싶습니다.


초대기독교 공동체는 계급.인종.성을 차별하는 철저한 위계 사회였던 로마 제국 안에서, 남녀가 함께 교회 생활을 하고 노예들까지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로마 당국의 눈에 이들은 매우 무절시한 집단으로 비쳤습니다. 게다가 그 무렵에는 동방의 미신적인 종교나 마술이 로마 사회로 급격하게 흘러들었는데, 그런 종교들에서는 유난히 여성 예언자들이나 마술사들의 활동이 활발했습니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들로서는 기독교도 그런 미신이 아닌가 하는 사회의 시선을 불식시켜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초대 기독교는 예수의 복음에서 유래하는 평등한 삶과 로마 제국의 위계질서 속에서 오는 긴장과 갈등을 감당하고 돌파해 나가야 했습니다. 동시에 새로운 기독교적 삶의 행태를 이루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도전과 위협에 기독교가 얼마나 긴장 상태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느냐가 관건이었습니다. 즉 한편으로는 로마라는 제도권 내에서 하나의 확고한 조직으로 존속해야 한다는 요구와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운동의 계승자로서 기독교의 본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요구 사이에서 어떻게 중심을 잡느냐가 문제였단 말이죠. 시쳇말로 세상을 따라 갈 거냐 아니면 내 길을 갈 거냐의 문제였던 것이죠.


초대교회는 세상의 나그네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누구나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집]역할을 했습니다. 이게 초대교회였습니다. 그러는 한편 로마 사회의 위계질서와 가부장 질서를 교회 안에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대체로 바울에게서는 아직 복음과 현실 상황의 갈등이 낳는 긴장이 살아 있었고, 적대적인 세계에서 예수 운동의 계승자로서 살아야 한다는 자의식이 그를 지배했습니다. 이런 면면들은 바울이 직접 기록했다는 그의 편지들 7권속에 들어 있습니다. 고린도 전. 후서, 로마서, 갈라디아, 빌립보서, 빌레몬서, 데살로니가 전서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1세기 말 이후의 교회, 이를테면 디모데 전. 후서. 디도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베드로 전. 후서 등에 나타나는 교회의 모습에서는 이 긴장감이 점점 사라져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성이나 노예와 관련한 이 편지들의 발언은 복음이 로마 제국의 지배적인 사회 이념과 가부장제 질서에 삼켜져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울의 친서와 위서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고, 해석을 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점입니다. 이러한 보수화 경향은 313년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결정적으로 고착되는 과정을 겪습니다. 따라서 로마사회에서 그 행동 양식이 다른 기독교가 공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기독교의 정체성이 그만큼 로마사회화 되었다는 방증이기도 하지요.


초대 기독교가 수많은 사람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던 핵심은 평등하고 이상적인 세상(사회)를 지향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그 지향점을 잃어버린다면, 더는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교회가 있어야 할 이유가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처음 교회는 평등하고 이상적인 세상의 건설’이 교회의 지향점 즉 과녁이었다는 걸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교회가 과연 뭘 지향하고 있는 지를 살펴서 얼마나 초대 교회와 일치하는지 아니면 어긋나 있는지를 아는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회가 이 지향점, 평등하고 새로운 사회 건설을 잃어버리게 되면 교회는 그저 제도권 내의 수많은 사회 조직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게 됩니다. 교회는 항상 1세기 말의 초대 교회가 직면했던 문제와 직면해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성공과 실패의 명암을 지닌 초대교회의 고투에 비추어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라는 도전과 요구에 직면해 있습니다.


바울 이후 초대교회는 세상의 나그네들을 맞아들이는 ‘하나님의 집’으로 교회를 형성해 갔습니다. 신약 성서를 보면 초대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을 지칭할 대 자주 쓰는 단어가 [나그네-외국인, 떠돌이]입니다. 이것은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을 묘사할 때 사용되던 단어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도 한 때 이집트에서 나그네였습니다(신23:8). 이스라엘의 더돌아 삶을 나타내던 단어들이 신약성서에서 기독교인들의 삶의 모습과 기독교인 집단의 사회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것입니다(행7:6, 13:17, 엡2:1, 눅24:18, 히11:9, 벧전1:17).


어쩌면 이것은 초대기독교인들의 실제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소종파인 초대기독교인들이 외부인들의 눈에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볼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이 낯설고 적대적인 것이었기에 생겨난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세계 안에서 낯선 자로, 외국인으로 스스로를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세상살이는 마치 나그네가 산 설고 물 설은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초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처지에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나그네라는 상황을 수동적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적극적으로 강화해 나갔습니다. 그들의 처지를 그들만의 가치로 발전을 시킨 것입니다. 그들은 구약의 떠돌이 전통을 자신들이 물려받았다고 여겼습니다. 신26:5절은 떠돌이로 살았던 것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초대교회는 나그네로서 이스라엘 민족의 과거를 자신들의 역사로 받아들인 겁니다. 구약성서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을 잘 접대하라고 했듯이(레19:34, 25:35, 민35:15, 신10:18-19), 초대 교회도 외국인들이나 나그네들을 교회 안에 받아들이고 접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롬12:13, 16:2, 빌레몬1:22, 딤전3:2, 5:10, 디도1:8). 너희가 나그네였으니 나그네를 홀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계 안에서 낯선 존재라는 기독교인의 자기 인식은 나그네와 외국인에 대한 접대라는 기독교윤리로 연결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냉혹한 로마 제국의 질서 속에서 우정과 환대에 근거한 새로운 질서를 위한 윤리적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미 복음서들에서도 예수는 나그네와 외국인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이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이라고 하셨습니다. 눅10:25-37의 사마리아인 이야기, 마25장의 최후의 심판 때 생긴 일들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째서 나그네 접대가 심판의 기준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나그네이기 때문에 나그네를 잘 대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2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요약하면 이런 뜻입니다.


‘나 자신이 나그네이며 낯선자이다. 그러므로 나그네에게 하는 사랑을 통해 나에 대한 너희의 사랑을 보여라’ 요기서 예수님이 자신과 동일시하는 나그네는 바같 세상에서 온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의미에서 외국인을 가리킵니다. 낯선 자, 아니 낯선 자 중에서도 가장 낯선 자를 통해 예수 자신이 사랑받으며, 이를 기준으로 구원이냐 심판이냐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와 교우들이 이걸 심판과 구원의 기준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걸 지나서 제도가 정하고 교리가 요구하는 구원의 조건 말고 말입니다.


이러한 나그네, 외국인 접대는 초대교회에서 선교의 지원망으로도 무척 중요했습니다. 예수 사후의 초기 예수 운동에서는 방랑하는 카리스마적 예언자들이 중요한 활동을 했는데, 이에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이 그들을 지원하는 시골 마을의 후원자들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물질적으로 갈릴리와 시리아 주민들의 지원에 의존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형제들의 접대를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나그네 접대에 대한 초대교회의 교훈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마10:11, 눅10:5).


나그네 접대는 나중에 큰 교회들에서 나그네를 위한 상설 숙소(hospitalia)를 설립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거기서는 나그네는 물론이고 병자들도 돌보았습니다. 병자들을 돌보는 일이 점차 중요해지면서 숙소는 병원(hospital)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병원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파생된 것입니다. 이렇게 나그네 접대는 일차적으로는 공동체 내부의 형제들, 이차적으로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교회 밖의 모든 사람들로 확대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이러한 나그네 접대는 무엇보다도 형제에, 즉 서로에게 기울이는 관심과 우정의 구체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스스로를 나그네요 외국인이라 여겼던 구약 성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바깥세상과의 불화를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초대교회 역시 하나님의 가정에 받아들여졌다는 내적 확신으로 세상의 소외를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교회라는 조직을 통해 더욱 강화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나그네들의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가정이었습니다(딤전3:14, 벧전4:17, 엡2:19). 기독교적 형제 사랑의 의무에는 한계가 없고, 나그네 접대 또한 초대 교회의 윤리적 강령의 근본 요소였습니다. 교회는 세상 안에서 나그네로서 세상의 다른 나그네들을 자기 안에 받아들였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인식이 우정과 환대를 낳고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평등한 공동체로서 초대교회의 밑바탕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 교회가 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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