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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작은 행복을 구하는 시대에서

  • 이익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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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아비브 욥바교회 2017년 12월 16일 설교 이익환 목사

예레미야 5 작은 행복을 구하는 시대에서

 

“예레미야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7]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8]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렘32:6-8)

 

우리 아빠들의 자존감이 흔들고 있다. 특히 내가 얼마나 쓸모있는 사람인지 느끼게 되는 자기 효능감이 흔들리고 있다. 보통 남자들은 사회에서 인정받는 직업을 갖거나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면 자기효능감이 올라간다. 그러나 직장의 환경은 자신이 쓸모있는 존재라고 느끼며 일하기 어려운 구조인 것 같다. 내가 일을 하면서 나의 자아실현을 이룬다기 보다는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기에 일이 많고 힘들어도 꾹 참고 일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대기업일수록 본인이 조직의 한 부속품에 불과하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좀처럼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 더군다나 장기 불황 속에서 노동강도는 매년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서 고민하는 청년들도 많다. 이래저래 우리 사회에서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의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더더욱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세대가 된 것 같다.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에서 최근 2018년 키워드를 선정했다. 가장 먼저 나오는 키워드가 소확행(小確幸)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트렌드가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소확행’이란 말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수필에서 처음 쓴 단어다.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감을 말한다. 예를 들어 그는  겨울밤 고양이가 부스럭 부스럭 이불속으로 들어오는 순간이 자신의 소확행 중의 하나라고 적었다.

 

성장기 시대에 사람들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지금 힘든 것을 참으며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러나 성장 속도가 완만해진 요즘 사회에서 사람들은 먼 미래보다는 지금 당장 내가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먼 미래에 내가 뭔가를 이루기 위해 애쓰며 현실의 고통을 참기 보다 지금 당장 내 곁에서 누릴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더 누리기 원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떨 때 행복을 느끼는가? 지금 어떤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가? 행복을 추구하고 싶어도 지금 직장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고 하소연하고 싶은 분들도 많을 것이다. 트럼프의 예루살렘 수도 발언 이후 이스라엘은 그 어느 때보다 긴장감이 높아졌다. 이런 위기 속에서 내가 이스라엘 온 게 잘한 일일까 후회하며 지금 이스라엘에 있는게 행복하지 않은 분도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시대를 뛰어넘어 남유다 백성들을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때는 시드기야 왕 재위 10년 째 해였다. 기원전 587년이다. 이 때 예루살렘은 바벨론 제국에 포위된지 1년이 지난 상황이었다. 성 안에는 먹을 것이 떨어져 사람들은 굶주렸다. 유다 백성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상황속에서 눈물 흘리며 하나님 앞에 탄식했다. 애 2:20-21,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21]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내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나이다 주께서 주의 진노의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륙하셨나이다” 성 안에 먹을 것이 없어 자녀를 잡아 먹는 끔찍한 일까지 발생했다. 사회불안은 극에 달했다. 행복은 제로에 가까왔다. 손에 잡을 수 있는 행복과 조그마한 안전이라도 확보하려고 사람들은 혈안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의 숙부 하나멜이 아나돗에 있는 자신의 밭을 예레미야에게 파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나라가 망하게 되는  상황에서 땅을 팔아 현금을 확보하며 그것으로 작은 행복이라도 건지려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당시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던 예레미야를 찾아 간다.

 

예레미야는 그 때 왜 감금되어 있었을까? 그 이유가 3-5절에 나온다. 렘 32:3-5, “이는 그가 예언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차지할 것이며 [4]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진 바 되리니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며 [5]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 가리니 시드기야는 내가 돌볼 때까지 거기에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갈대아인과 싸울지라도 승리하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더니 유다 왕 시드기야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같이 예언하였느냐 하고 그를 가두었음이었더라”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까지 예언했다. 왕은 당연히 기분이 나빠서 예레미야를 가두게 된 것이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멸망은 실제 그 다음 해인 기원전586년에 이루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남유다의 땅을 산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통해 이러한 일이 있을 것에 대해서 미리 알았다. 8절을 보자. 렘 32:8,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예레미야가 어떻게 했을까? 그는 ‘전쟁통에 밭을 사라니요, 통촉하여주소서’라고 탄원하지 않았다. 그는 은 17세겔을 달아 주며 밭을 산다. 당시 은 17세겔은 노동자가 일년 반 일해서 모을 수 있는 금액이다.

 

그는 두 개의 매매증서를 작성한다. 하나님은 그 중 하나는 토기에 보관하고, 다른 하나는 예레미야의 서기관인 바룩에게 주도록 한다. 그것을 토기에 보관하게 하신 이유가 15절에 나온다. 렘 32: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보관된 매매증거가 다시 쓰이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레미야가 밭을 산 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행위 예언이었다. 예레미야는 이 일을 여러 증인과 시위대 뜰 앞에 있는 유다사람들 앞에서 진행했다. 언제 망할 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 속에서 이 일은 예루살렘의 미래를 하나님께서 보장하신다는 하나의 강력한 상징적 행위였던 것이다. 이처럼 예레미야가 이 난리통에 밭을 구입했다는 소식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급속도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비록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밭을 사긴 했지만 찝찝했을 것이다. 더우기 그는 예루살렘이 70년 뒤에나 회복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레미야는 매매를 마치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렘 32:17,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큰 능력과 펴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 주에게는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시니이다” 예레미야는 슬픈 감정이 앞섰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며 찬양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이 왜 땅을 사라고 하셨는지 질문한다. 렘 32:25, “주 여호와여 주께서 내게 은으로 밭을 사며 증인을 세우라 하셨으나 이 성은 갈대아인의 손에 넘기신 바 되었나이다” 바벨론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성을 넘기셨으면서 왜 자신에게 밭을 사게 하셨나는 뒤끝이 있는 질문이다. 이에 하나님이 대답하신다. 렘 32:26-27,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7]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고백을 받아 답하셨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 예루살렘을 바벨론의 손에 넘기신 것이 아니었다.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는 질문은 단지 지금의 상황 때문에 좌절하지 말라는 의미다. 좀더 거시적인 안목을 갖고 역사와 미래를 바라보라는 주문이다. 하나님은 이어서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이런 일이 작정되었음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어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파멸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회복도 약속하셨다.

 

렘 32:37-41, “보라 내가 노여움과 분함과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들여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여 안전히 살게 할 것이라 [38]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3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40]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41]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다시 한 마음과 한 길 가는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70년이라는 바벨론 포로의 시간을 허락하신 것이다.  그 기간이 끝나면 다시 원래의 땅으로 돌아와 안전하게 살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밭을 사라고 하신 것은 결국 하나님이 준비하신 미래에 주목하라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결코 재산을 불리기 위해 땅을 사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준비하신 미래에 대한 약속 때뿐에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기꺼이 자신을 헌신한 것이다. 망해가는 나라에서 땅을 사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작은 행복, 작은 안전이라도 확보하려고 분주한 시대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정말로 열어주실 안전한 미래를 위해 자신을 헌신한 것이다. ‘소확행’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크고 확실한 행복, ‘대확행’을 추구했던 것이다.

 

모두가 흔들릴 때 흔들리지 않고 걸어가기가 쉽지 않다. 세상의 풍조와 현실의 상황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과 미래에 자신의 삶을 거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한국을 오랜만에 다녀오신 분들은 더욱 느끼겠지만 한국교회는 점점 노인들만 남고 젊은이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확보하기도 어렵기에  남을 돌보고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점점 사라지는 가치가 되고 있는 현실이다. 모두가 자기 삶에 분주해진 시대에 교회 일을 하고 헌신한다는 것은 마치 예레미야가 전쟁통에 밭을 사는 것처럼 어리석어 보이는 일이 된 것 같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 하나님이 예비하신 한 길을 가는 것, 그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궁극적인 행복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경외하기를 회복하는 백성들에게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신다. 세상이 약속하는 작은 행복을 확보하느라 하나님이 준비하신 큰 행복을 찾지 않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은 안전하지 않고 우리가 느끼는 불안은 더욱 커져갈 수 있다. 그러한 시대일수록, 모든 육체의 하나님, 할 수 없는 일이 없으신 하나님을 주목하며 그분께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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