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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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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집회. (19. 2. 5. 오전)

 

11-8: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1-5: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 왜 물질세계를 만드셨을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다. 이게 물질계를 만든 목적인데, 이 성경을 보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이것만 알면 다 된 거냐? 구원은 그 폭이 매우 넓어서 하나님께서 물질계를 만든 것에서도 우리가 구원적으로 생각할 게 많다.

 

일반적으로 누구를 사랑하면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좋은 것을 준다. 그러면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걸 받을 때 어떤 마음이 드느냐? 고마운 마음이 든다. 감사한 마음이 든다. 사랑을 하면서도 뭔가를 주지 않는다면 자기가 사랑을 하는지, 안 하는지를 상대가 모른다. 줌으로써 받은 사람이 준 사람의 마음을 알고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나오는 거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목적으로 세상을 만들었는데, 믿는 우리가 이것을 안다면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들고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살고 싶어지는 거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천국은 물질세계보다 더 좋은 곳인데, 믿는 우리에게 물질세계를 주어서 우리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생기게 했는데, 이는 당신이 인간들로부터 영광을 받으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 감사를 하게 되면 이 감사한 마음이 숙달이 되고 성장이 되는 것이니, 우리로 이렇게 되도록 해서 최고의 더 좋은 것으로 주시기 위해서다. 즉 천국을 주되 그 세계를 마음 것 다스리고 통치하며 극치의 쾌락 가운데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해서다.

 

인간 자기는 인격을 가졌는데, 인격자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그리고 인격자의 세계에 살고 있는 자기는 어떤 존재인지? 자기가 인격자로 존재한다면 인격적인 면에서 지혜지식성, 도덕성, 즉 선, 사랑, 거룩, 진실, 그리고 능력성, 즉 의와 주권 면에서 하나님의 단일성으로 온전하게 자라야 하겠는데 우리가 이 면에 결여성이 많다. 지식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랑이 없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사랑을 하면 줄 줄을 안다.

 

그리고 줄 줄은 모르고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이 있고, 줄 줄도 모르고 받기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이건 겸손성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베풀지 않겠다는 말이 되는 거다. 이러면 외톨이가 된다. 그런가 하면 자기는 받지는 않고 자꾸 주겠다고만 하는 사람도 간혹 있는데, 이런 사람은 성격에 어떤 결함이 있는 거냐? 고집이 세고 자기 주관이 강한 거다. 인격자의 세계는, 사람의 세계는 인긴 간에 주고 받는 수수관계다. 서로 주어서 기쁘고 받아서 기쁜 이게 사랑의 사람이다. 거지들은 줄 줄은 모르고 받을 줄만 안다. 그러니까 이 거지는 죽을 때까지 거지다.

 

우리는 도덕성적인 면에서 이런 걸 잘 생각해야 한다. 지혜롭게 생각하지 못한다거나 폭넓게 생각하지 못하게 되면 쭈그러진 사람이 돼버린다. 사랑에는 부담성이 없는 거고 자유롭고 기쁜 거다. 그리고 사람이 자기의 속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말을 안 해 주면 남이 나의 속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의사소통이 안 되니 오해를 사는 일이 많게 된다. 인간은 이렇게 사는 게 아니다.

 

믿는 우리는, 사랑의 사람은, 축복의 사람은 남을 저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왜 그러냐? 성경에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게 있는데, 핍박을 하는 속에는 저주도 들어있고 악담도 들어있는 거다. 그렇더라도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하라고 한다. 이 기도는 축복의 기도를 말하는 거고, 참 사람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말하는 거다. 상대가 이 기도에 응답이 안 이뤄지면 그 축복은 자기에게로 돌아오는 거다. 이룰구원의, 진리신앙의 노선은 생명의 노선이기 때문에 이 길을 가는 사람은 입에 저주를 담으면 안 된다. 저주를 담고 있으면 네가 저주의 사람이다. 사랑이 결여다.

 

그러면 저주는 누가 하는 거냐? 내 입으로 저주를 내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 당신이 아시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사람이 저주를 하니까 그 저주가 그대로 임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누구의 저주냐?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저주다. 그럼에도 아닌 말로 자기가 남을 저주한다면 자기는 저주받을 것이 없어야 한다. 자기가 저주받을 것이 많은데도 다른 사람을 저주한다면 그 저주가 자기에게로 돌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저주에는 이런 경우가 있는가 하면, 또 한 면으로는 자기가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 좋은 것을 남에게 안 주면 받아야 할 그 사람에게는 저주가 되는 거다. 하나님의 본질의 것은 누가 가지고 있던 가지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하는데 주지를 않는다면 그걸 받을 사람은 저주가 돼버리는 거다. 사람이 죄악 세상에 빠져있는데 생명줄을 던져서 이 사람을 건져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그대로 죽는 거다. 그러니 이 사람에게는 말하자면 저주가 되는 거다.

 

하나님께서 물질세계를 창조를 하셨는데, 물질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단수가 아닌 복수로 표현을 했다. 복수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을 의미한다.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그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 들어있는 거다. 즉 글자적으로는 우리 인간이 듣기에 하나님 한 분으로 되어있는데 그 안을 보면 성부 성자 성령님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한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많은 기독자들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이것을 보면서 그냥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산천초목 천체 모든 만물을 만드셨다이렇게만 생각을 하고 만다. 물론 이방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조차 못하지만.

 

이방 우상치고 세상만물을 지은 신은 없다. 그러니 이런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미련한 거냐? 자기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만물 속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모르는 것도 문제지만 이방 우상까지 섬기고 있으니 얼마나 미련한 거냐? 우상은 하나님이 아니다. 귀신도 하나님이 아니다. 귀신이 천지창조를 했느냐? 그런데 왜 귀신 우상을 섬기느냐? 이런 사람은 자기도 귀신처럼 사는 거다.

 

우리는 사람의 말로 귀신이 따라 붙을 그 어떤 근거를 자기 마음 속에 남겨두면 안 된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런 우상성적 정신을 가지고서 점쟁이 집에 가 봐라. 뭐라고 하겠느냐? 분명히 등에 누구를 업고 다니느냐? 네 등 뒤에 누가 따라온다그럴 거다. 믿는 우리가 왜 그런 자들의 미끼가 되고, 그런 자들의 말에 코가 꿰여서 살 거냐? 그런 자들을 저주를 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 수 있는 이 좋은 신앙을 가지고 왜 그런 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싹싹 손을 비비며, 왜 코가 꿰이고 정신이 꿰이느냐? 이건 못 쓴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께서 자연만물을 만드실 때 삼위의 하나님의 의지세계 속에 우리의 구원을 위한 마음을 깔아놓고 만물을 만드신 거다. 말이나 글로 표현은 안 됐지만 하나님께서 만물을 만들기 전, 사람을 만들기 전 당신의 의지세계 속에는 우리의 구원을 바탕으로 하고, 근거로 하고 만물을 만든 것이니, 이 근거란 말하자면 수면 위에 하나님의 신이, 즉 성령님이 활동을 하신 걸 말하는 거다.

 

창세 이후로 마지막 그날까지 성령님이 역사를 안 하는 곳이 없다. 언제 어떻게 역사를 하시던 하나님의 신이 역사가 되는 곳에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설계를 놓고 움직이는 거다. 그래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고 한 거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말해주는 거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 믿기 전의 인간의 마음을 가르치는 거다. 지금도 이방인들의 마음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하는 상태로 있는 거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의 깊이를 말하는 건데, 사람의 마음의 깊이는 끝이 없다. 이런 상태의 마음의 깊이에서 나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공급은 전혀 없다. 하나님의 생명의 공급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지 이방인들의 마음속은 아무리 들여다봐도 하나님의 생명조달이 되는 것은 없다.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는 여기에는 이런 무한한 비밀들이 숨겨져 있는 건데 오늘날 기독자들이 왜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만 아느냐? 왜 껍데기밖에 모르느냐? 기독자들아, 너를 위해서 세상을 만드신 그 분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느냐? ‘천지창조 때부터, 네가 세상에 나기 전부터 내가 너를 생각하고 너를 위해서 세상을 만들었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느냐?

 

세상을 창조한 이 사실을 아담으로 성령에 감동 감화를 시켜서 기록케 한 것이 아니라 몇 천 년이 지난 후에 모세에게 기록을 하게 한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그 때 당시에 아담에게는 공책이 없어서 그랬느냐? 연필공장이 없어서 그랬느냐?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권으로 이렇게 하게 한 것이지만 또 한 편으로 생각을 해 보면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종살이를 하면서 얼마나 극심한 환난과 핍박을 받았느냐? 빛이 없이 살던 그 때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생각해 봐라. 이는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요, 구원의 손길도 없고 막막하고 캄캄한 상태였다.

 

이럴 때 하나님의 손길이, 성령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신의 역사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대로 모세로 통해서 한 가닥의 빛이 되어서 내려왔다. 구원의 빛의 역사가 내려왔다. 이렇게 해서 애굽의 고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끄집어 낸 거다. 이것도 일종의 창조다. 이런 이유로 해서 고난과 고통이 가장 극심했던 시대를 산 모세로 통해서 세상창조를 기록하게 한 거다. 그래서 이를 통해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로 절실히 깨닫게 하는 거다.

 

우리가 보는 성경은 아담으로부터 모세 때까지, 모세로부터 사도시대까지를 합치면 근 4천 년의 기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인데,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사건 환난 존재 활동을 4천 년 동안 자료를 모아서 성경에 기록케 해서 지금의 나에게 준 거다. 이 생각을 못하느냐? 어느 부모가, 어느 스승이, 어떤 훌륭한 사람이 나의 구원을 위해서 4천 년 동안 세상만물을 다 들어서 그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존재가 있느냐? 없다. 있을 수 없는 거고, 불가능이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거다. 우리가 늦게나마 진리신앙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 하신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자기의 마음 속에 영감성이 머무는 거다. 이게 하나님의 역사다. 마귀의 역사는 이런 법은 없다.

 

혼돈이 뭐냐? 혼돈은 무질서요, 제대로 놓인 게 없는 상태를 말한다. 있기는 있는데 뭐가 뭔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는 것도 혼돈이다. 뚜렷하게 아는 게 없는 것도 혼돈이다. 그러면 지금 땅의 세계를 쳐다보면 혼돈스럽느냐, 정립이 딱 되어 있느냐? 지상에서는 정립 정돈된 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우리가 세상기준을 가지고는 세상을 정관할 수가 없다. 정확하게 볼 수가 없다. 세상기준을 가지고는 절대로 정립이 되지를 않는다.

 

세상은 절대 정확한 것은 없다. 하나님만이 절대 정확하다. 목사님이 절대 정확하냐? 목사님이 하나님이냐? 공부를 제일 많이 한 사람이 하나님이냐? 유명한 사람이 하나님이냐? 절대 정확하고 절대 공의로운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 성경에 이것이 제시되어 있으니 성경을 보는 우리는 부정확하고 사이비스럽고 이단스럽고 거짓적인 것을 따르면 안 된다.

 

세상의 많은 지식은 정확도가 없다. 그래서 절대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를 주신 거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뜻은 절대 정확하고 공의롭다. 하나님의 것은 다 절대다. 이 절대성을 건드리면 네가 죽는다. 하나님의 절대성을 말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서 삼위일체를 놓고 자꾸 말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마치 물건처럼 돼버린다. 삼위일체를 말하기 위해서 세 잎 크로바니, 해의 본체가 있으면 이 해에서 빛이 나오고 열이 나오고 하는 식으로 설명을 하려다 보면 이상하게 하나님이 물질 식으로 돌아가 버린다. 하나님을 말하려면 그 인격을 말을 해야 되겠는데 물질 시로 돌아가 버린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배우다 보니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신령한 의사성을 물질로 돌려서 축복의 개념을 물질로 생각을 하고 있다.

 

하면 세상에서 최고의 보화 보물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이 금은 세상 어느 나라에서도 다 통한다. 그러면 이 금이 천국에서도 최고냐? 천국에서 제일 좋은 게 뭐냐? 예수님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그 천국에 갈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취하겠느냐, 하나님 한 분을 취하겠느냐?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고, 또 없애버리기도 하는 것이고, 그리고 이 분이 우리를 당신처럼 만들었고, 또한 예수로 통해서 당신의 것을 우리에게 주고 싶어 하는 분이신데, 우리가 이 분을 취하게 되면 최고로 좋은 것, 하늘나라에서 최고로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거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이를 위해서 믿는 거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데, 이 두 분 중에 누가 나에게 오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이 편할까? 당신이 오시는 게 마음이 편할까, 아니면 아들을 보내서 당신 대신 죽게 하는 게 마음이 편할까? 아버지가 직접 오시는 게 아버지의 마음이 편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우리들에게 보냈다.

 

그러면 아들을 보냈다는 말의 의미가 뭐냐? 말하고자 하는 뜻이 뭐냐? 왜 당신의 아들을 당신 대신 보내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죽게 한 거냐? 우리가 여기에서 그 분의 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거다. ‘아들이라고 하면 천국을 상속받는 의미가 있는 것인데,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서 날 위해 죽게 했다고 할 때 보내신 그 분의 마음을 느껴봐라. 이걸 못 느낀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 무뎌서 틀렸다. 그러면 어떻게 진정한 참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느냐? 이기적인 사람이 돼버린다.

 

땅이 혼돈하고, 그 다음에 공허가 뭐냐? 텅 빈 것. 텅 빈 게 보기 좋으냐? 하늘에는 새가 날아다니고 구름이 떠 있고 한 게 보기가 좋다. 땅에 큰 집을 지어놓고 마당에 연못을 만들고, 이 연못을 그대로 놔두면 물이 썩고 모기가 생기지만 잉어도 키우고 분수도 만들어 놓고 하면 보기도 좋고, 모기가 연못물에 알을 까놓아도 붕어가 다 잡아먹으니까 모기가 새끼를 못 친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계획하신 대로 우리의 구원을 근거를 하고 하나님의 신이 활동을 하니까 둘째 날, 셋째 날로 죽 가면서 점점 보기 좋은 세상이 된다. 마찬가지로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몹쓸 우리의 마음에 성령님의 활동이 들어가니 사고발상이나 언행심사 등 모든 것이 영적 활동 면에서 창조가 돼 나가는구나. 쓸모가 있게 되어 나가는구나.

 

성경에 보면 우리 주님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주님을 모르는 사람을 지나가면서도 보면 고쳐놓고, 귀신들린 자도 고쳐놓는다. 하나님의 온전의 사람으로 고쳐놓는다. 이게 진리의 역사고 성령님의 역사다. 이 정신이 구원운동이라. 이게 천국복음 운동이라. 예수 믿는 사람이 이게 아닌 거짓 것을 받고 이단성적인 것을 받은 마귀가 보낸 종들의 소리를 듣게 되면 진리이치를 못 깨닫고, 교회를 보면서 이 교회는 예배순서가 다르구나. 주기도문도 안 하는구나. 그러니 이단이다라고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자가 예배를 드리다가 헌금시간이 되면 도망가 버린다면 이게 누구냐? 가룟유다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따랐고, 마가복음에는 주님의 제자요 사도라고 했다. 그러니까 가룟유다는 이방인들 속에서 찾는 게 아니라 교인 속에도 있고 사도 속에도 있는 것이니, 오늘날 가룟유다와 같은 정신을 가진 사람을 교회 안에서 볼 수 있는 거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어느 신학교 총장이 신학생들에게 몇 억을 빌린 후에 갚지를 않아서 갚으라고 하니까 내가 언제 너에게 돈을 빌렸느냐? 하나님께 헌금한 게 아니냐?’ 라고 했다고 한다. 이게 뭐냐? 이게 누구냐? 가룟유다다.

 

교회도 잘못 걸리면 그 교회 목사가 너의 충성봉사를 다 빨아먹고, 너는 신앙사기 다 당하고, 이용만 당하는 거지 말씀을 깨닫고 만들어지는 게 있느냐? 하나님께서 창조 첫 날부터 믿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이미 뚜껑을 여셨는데 수 년 수십 년을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걸 몰랐느냐? 너에게는 성경이 없느냐? 너는 성경을 안 읽었느냐? 그러니 누구 탓을 할 거냐? 자기가 좋아서 자원적으로 충성봉사를 한 것인데 어느 법에 가서 걸 거냐? 가슴을 치고 통곡을 할 수밖에 없는 거다.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하는 이 창조 속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하는 것도 들어있는 거다. 그래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하는 이것을 먼저 생각을 하면 빛을 왜 만들었는지 그 답이 나오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생각을 못하고 빛을 만든 것부터 생각을 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빛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빛은 해와 달과 별빛이 아닌 무슨 빛이냐? 물질을 비취는 것처럼 표현이 되었지만 그게 아닌 하나님을 아는 빛이요, 말씀으로 된 빛이다. 다른 날에 만든 해와 달과 별빛은 따로 있는 거다.

 

하나님을 아는 빛이라고 한다면 이와 반대로 하나님을 모르는 건 뭐냐? 하나님을 모른다면 이 사람은 첫째 날에도 안 들었구나이렇게 되는 거다. 하나님을 모른다면 이 사람의 마음 속에 첫째 날의 역사도 안 돼 있구나이렇게 되는 거다. 안 돼 있으니 이 사람의 마음은 혼돈스럽고 공허하고 어둡고 생명적 조달도 없이 그대로 살다가 그대로 죽는 거다.

 

하나님을 모르는 가정,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하나님을 모르는 국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냐? 이들은 어둡다. 그럼에도 본인들은 이 사실은 모른다. 성경은 말을 하고 있는데,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데 자기는 이걸 모른다. 그러니 이런 딱할 노릇이 어디 있느냐? 그렇다면 지금 이 설교를 듣는 예수 믿는 자기는 알고 있었느냐?’ 하는 면에서 한 번 생각을 해 봐라. 아마 거의가 본 절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연물을 창조하신 것만 알았을 거다.

 

자연물은 지구가 없어지면 다 없어진다. 하나님께서 첫 날에 뭘 만들었던 없어지는 것을 가지고 그걸 만드는 순서나 과정을 비유로 비사로 해서 영원히 가는 것, 영원히 가는 이치를 우리로 깨닫게 하시려는 거다. 그래서 교회에서 말씀을 전할 때도 영원성이 아닌 임시성적인 것으로 전한다면 이건 하나님의과 의사 단일성이 아니다. 진리본질이 아닌 이질이다. 이걸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 이치를 모르면 목사님들이 어떤 말을 해도 목사님은 하나님의 종이니 좋은 말을 하겠지하게 된다. 아니다. 성경은 밝혀놓았다.

 

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시대에 교회라는 이름이 없어진다. 이게 무슨 말이냐? 교회란 주님의 기본구원을 얻은, 즉 사죄 칭의 새생명으로 중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백성들을 말하는 건데, 그런데 이런 이름들이 없어진다는 거다. 이름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믿는다고는 하는데 믿음의 실상이 없다 그 말이다. 간판은 달려있는데 교인들의 마음이 전부가 세상성이라 그 말이다.


 다음 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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