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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servant life<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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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김의 삶                 - J. H. 호오스 버어그 -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 : 45)

위의 한 구절에서는 인자에 관하여 한 가지 큰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분은 주님 자신이며 다른 모든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모범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사건의 배경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게 된 사건의 배경은 서글픈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영광 가운데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서 섬김을 받고 싶어했습니다. (막 10 : 35-37)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이 그 소리를 들었을 때 그들은 크게 분개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녀 여러 사람으로부터 섬김을 받으려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사건을 통해서 주님은 훌륭한 교훈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며, 제자의 특징은 겸손한 마음과 서로를 섬겨 주고자 하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본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여기에서 예수님의 부드러움과 그분이 느끼신 연민의 정을 찾아보십시오. 주님은 이전부터 자신에 관해 되어질 일들 - 무시한 배반, 잔인한 고통과 모욕,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치스러운 죽음 -을 말씀해 오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정말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 같았습니까?  아니! 제자들은 예수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서로간에 누가 가장 으뜸이 될 것인가에 대하여 싸움을 시작한 게 아닙니까? 제자들의 흥분된 얼굴들. 노한 음성. 난폭한 손짓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불러다가 이르셔서 그 험악한 분위기를 조용히 진정시키셨습니다.
주님께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세상의 집권자들은 다른 사람을 임의로 주관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 : 42-45)
한 마디로 말하자면 "너희는 나의 제자이며 제자는 주인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는 것이었습니다.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분명히 세심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와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인자는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한가지 큰 주제가 됩니다. 주님은 우연히 몇몇 사람이나 많은 사람을 섬기게 되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섬기러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확고 부동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구절 중에는 인자에 관한 다른 더 중요한 것을 말씀 해주고 있는데 곧 주님은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사실을 간과해 버리거나 잊어버리기 쉬우며 관심 없이 읽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섬기려 오신데 있어서도 인자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섬김을 받지 않는 일에 있어서도 인자에 못지 않아야 합니다.

     섬김을 받으려 하는 일
섬김을 받으려 하는 일은 세상에 어디나 찾아 볼 수 있는 마음입니다. 섬김을 받으려는 세상적 마음은 육아실에서 시작하여, 학교에서의 싸움, 개인간의 말다툼. 국가간의 전쟁의 밑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슬픈 일이여! 이런 마음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충분히 깨닫고 있지 못합니다. 아마 우리는 거의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불화와 불행이 우리의 생애에서 섬기려 하는 대신 섬김을 받으려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가를..........
우리들은 사실 너무나 흔히 성급하고 화내고 짜증내며 분개하지 않습니까? 가끔 우리는 어리석게 화를 냄으로서 표현합니다. 우리 속에는 심술궂은 감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섬김을 받으러 왔는데 섬김을 받지 못해서 실망한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항상 사람들이나 환경, 요행, 운, 날씨, 그 밖의 무엇에 의해서든지 섬김을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섬김을 받는 것은 아주 당연하고, 절대로 필요하며, 아주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섬겨 주는 일을 기대하도록 어려서부터 양육되어져 왔습니다. 만약 섬김을 받는데 방해를 받게 되면 우리는 흔히 성급해지고, 시무룩해지거나 우울해 지기도 하며, 신경질을 내기도 하며, 아마 윌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까지 비참하게 만들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자처럼 섬김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면 문제는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몇 가지 예화를 들어봅시다.

     당신은 무시당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얕잡아 보이거나 무시당하고 업신여김을 받아 본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직장에서 고용주나 피고용인이 당신에게 적당한 동정이나 고려를 베풀지 않습니까? 혹은 당신의 지위가 낮다고 해서 능력, 성격 등의 이유로 당신의 이웃 사람들이 당신을 존경하는 태도로 봐 주지 않는 다고 생각해 봅시다. 당신이 그러한 느낌을 갖는다면 당신은 거기에 대해 아주 속이 상하거나 화를 낼 것입니다. 왜? 그 이유는?-------- 당신이 섬기려 하는데 섬기려는 특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 이유는 바로 당신의 기분이나 권리, 재능, 직위의 고하-존엄성들이 상대방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섬김을 받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섬김을 받으려 왔기에 그래서 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당신은 시기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가장 미워해야 할 것은 시기심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본 일이 있으십니까? "시기심"이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이 당신보다 더 잘하고 있을 경우, 당신보다 그 사람이 더 일이 잘 될 때, 명예, 성공, 돈, 명성, 상급이 나 보다 그에게 돌아갔을 경우에... 당신이 그러한 것을 바랬을 테지요.... 곧 당신은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닌 그가 섬김을 받았으므로 당신이 시기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나를 무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가 나를 무시하고 업신여길 권리도 없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그것은 아주 공평하지 못한 일이다. 그것은 아주 공평하지 못한 처사이며, 만약 다른 사람일 경우는 나에게 그렇게 대해 주지 않을 것이다." 고 얘기할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잘못과 불의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나는 여기서 거기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은 - 당신이 당신의 주인 되신 예수님처럼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섬기려 한다면 당신은 그렇게 마음이 아프고, 화를 내며 시기하시겠습니까? 문제는 당신이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칭찬을 받지 못합니까?
당신은 어떤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어 왔으며 또 봉사를 해 왔다고 합시다. 또 당신은 그렇게 하는데 많은 것을 드리고, 바쳐 왔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때 당연히 당신은 자신이 베푼 선행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칭찬 받기를 기대할 테지요, 그런데 기대한 만큼의 칭찬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상대방에게 아낌없는 감사와 환대를 기대했는데 당신의 친구는 그것을 냉담하게 받아 들였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혐오감을 갖게 되고 차라리 그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하고 속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시는 누구에게도 친절을 베풀지 않겠노라고 성급히 말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왜? 그 이유는? 당신은 한 사람을 섬겨왔고 어려울 때 도와주었지만, 그러나 당신은 섬김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타인으로부터 아주 선하고도 친절하며 관대한 사람이라고 칭찬해 주길 바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 자신이 감사 또는 칭찬하는 말, 혹은 약간의 아첨까지 해서 당신을 섬겨 주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섬김을 받으려고 할 때 간혹 심한 상처를 받게 됩니다.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멋진 취미와 올바른 판단력과 훌륭한 식견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충고가 무시되었을 경우, 권위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일에까지도 그 조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당신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 약이 오르고 화가 나겠죠. 당신 속의 마음이 성나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마음의 평안이 완전하게 깨어졌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당신의 친구를 섬기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까? 혹은 친구가 당신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슬프게도 궁지에 빠져 들어갔기 때문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공교롭게도, 그 친구는 당신의 도움 없이 정말 아주 멋지게 일을 잘 처리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당신이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기호와 판단력에 있어서 "권위"있다고 하는 당신의 명성이 섬김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섬기러 온 것이 아니라 섬김을 받으러 온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실망하게 된 것입니다.

     대중 앞에서 얘기해 본적이 있습니까?
당신이 전에 어떤 특별한 경우에 발표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모두 모여든 청중은 훌륭한 사람들인데 그 중에는 모씨라는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기독교 인사가 참석했다는 것을 알고 특별하게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훌륭한 주제를 가지고 유창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끝에 가서 당신은 아주 스스로 자신에 대해 흐뭇하게 느끼면서 모씨가 당연히 곧장 당신 앞에 나아와 악수를 청하며 "그렇게 재미있고 감동적이며 훌륭한 연설을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해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단 한마디 인사도 없이 홀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그때 당신은 얼마나 김이 빠져 풀이 죽었는지! 당신이 연설 중에 가졌던 기쁨은 불꺼진 양초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되어서 그렇지요? 당신이 수많은 사람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이것은 당신이 마음속으로 원했던 바가 아니라 당신의 연설이  당신을 섬겨 주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입니다.

     당신의 직업에 대하여
당신은 직업인 또는 사업가입니다. 당신은 제법 일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당신의 필요한 모든 것을 충분히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어떤 큰 일에다 마음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대에 만족할 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이 당신의 마음에 짐이 되고 있습니다. 당신 마음에 가시가 된 것입니다. 당신은 항상 풀이 죽은 느낌입니다. 이런 감정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사실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당신이 섬기고자 하는데 당신이 바라는 만큼 충분히 섬길 수 없는 데서 실망한 탓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을 자신을 좀 더 만족시키려고 욕심을 부리고 더 커지게 되는 것을 남들에게 과시하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해 주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부하기를 탐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 당신의 욕망이 충족되지 못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당신은 섬김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게임에 대하여
오락에 있어서까지 우리는 섬김을 받으려 하는 마음 때문에 방해를 받습니다. 당신은 경주나 어떤 시합, 게임 등에 참가했다고 합시다. 거기서 당신은 패했습니다. 진 것입니다. 얼마나 "언짢고 밉살스럽게"  감정을 가졌는가? 이날 하루종일 그 감정이 단신에게 떠나지 않습니다. 캠브리지 대학의 한 운동선수는 3년간 연속적으로 경주에 우승했습니다. 그가 4년째 이긴다면 기록을 세우게 될 것입니다. 그는 승리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결과는 졌습니다. 나는 그가 4주 동안 웃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그 선수는 경기가 자신의 명성을 섬겨 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는 여러 사람들이 자기 자기를 가리켜 "그 선수는 아무도 못 세운 기록을 세웠다"고 말할 것을 바란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섬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좌절하게 된 것입니다. "경기자의 슬픈 얘기들" 이란 책을 진실 되게 엮어 본다면 그 책엔 얼마나 비극적 얘기가 실려질 것인가?
당신은 골프를 치고 있습니까? 어린 아기가 아닌 고등교육을 받은 어른이 작은 골프공이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자기의 독단적 생각을 섬겨 주지 않음으로 해서 골프 공을 마구 짓밟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아주 저명한 인사가 자기 마음대로 말을 듣지 않는 골프 공에 의해 섬김을 받지 못해서 아주 기분이 나쁜 나머지 경기를 포기해야 된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당신은 여기에 대해 답변하기를 "그러나 스포츠와 시합에서는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하고 이겨야 한다. 우리의 목적은 섬김을 받는 것이다." 고 할 것입니다. 예,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게임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된 자라면 게임을 진지하게 해야 합니다. 경기장 안에서까지 저자는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섬기려는 정신은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가 졌다면 진데서 승자를 섬기는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만족해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봉사
스포츠 보다 더 중요한 어떤 문제에 들어가 봅시다. 당신이 주일학교 교사 혹은 구역 담당 방문자, 교회 사무원 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머니회에서 도울 수 있고 소망회나 전도회 등 어떤 모임에서 일을 돕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당신이 그 일을 그만둘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건강이 나빠서입니까? 가정에서 할 일이 너무 무거워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것은 모두 이유가 안됩니다. 그리고 당신이 거기에 필요하지 않거나 더 이상 봉사할 필요성이 없어서 입니까? 혹은 당신이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없어졌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봉사할 필요성은 전에 못지 않게 큽니다. 그 기회의 문은 활짝 열려져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봉사를 포기하려고 합니까? 아마 당신이 그 일에 지쳐 있어서 그 일을 그만두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 일에 당신에게 흥미 있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게끔 해주고, 교회에서 당신에게 어떤 지위를 부여해 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사실은 그 일을 좋아하리라 생각했지요 그리고 얼마 동안은 좋아했으나 이젠 그 일에 싫증이 났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봉사하는 일이 당신을 섬겨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당신을 더 이상 섬겨주지 않으므로 당신은 그 일을 포기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 주려..." 당신은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까? 지금 든 것은 몇 가지 예(Example)에 불가한 것뿐입니다. 이 예들이 당신에게 적용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든지 혹은 당신의 동료들에 대한 관계가 어떠하든지 간에 섬기려 하지 않고 섬김을 받으려 하기 때문에 이런 이유에서 얼마나 많은 불만과 얼마만한 불씨가 야기되는지 깜짝 놀랄 것입니다.

     가정에서의 알력
당신과 당신의 친구가 함께 생활하고 있을 경우 당신은 사소한 알력(충돌)에 의하여 상호간의 행복이 중단됩니다. 당신은 성미가 급하고 당신의 친구는 사치를 부립니다. 당신은 아주 시간을 잘 지키지만 친구는 시간을 어깁니다. 당신은 아주 단정한 사람이지만 당신의 친구는 너저분합니다. 당신은 모든 일을 당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해치우기를 원하지만 당신의 친구는 아무렇게나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항상 마찰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까닭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당신의 친구를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당신의 다정한 면이나 혹은 당신이 원하는 데로 일을 처리하고 싶은 것이 섬김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혹은 당신이 아주 자유분방하고 태평무시한 사람일 경우 당신의 될대로 되리라는 식의 낙천적인 방법이 섬김을 받지 못했기에 화를 내지 않습니까? 위의 모두다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섬기려 하고 동시에 상대방에서 주려고 할 경우를 상상해 보지 않겠어요?

     사소한 일들
수많은 작은 일 때문에 우리들이 방해받는 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오후의 계획이 완전히 뒤집혀졌습니다. 당신은 비가 왔으면 하는데 날씨가 개일려고 합니다. 막 외출을 하려는데 방문하는 사람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 노래를 부르도록 청을 받았지만 목소리가 쉬어서 당신에게 자신을 주지 않습니다. 편지를 써 보냈는데 회답이 오지 않습니다. 당신의 요구가 받아 들여지지 못했습니다. 흥미 있는 책을 읽는데 방해를 받습니다. 글을 쓰려는데 펜이 나가지 않습니다. 의복이 몸에 맞지 않습니다. 불이 타지 않습니다. 식사 때 뭔가 잘못된 게 있습니다. 애들이 집에서 너무 시끄럽게 합니다. 등등...... 어떤 경우에는 만사가 잘못되어 있는 것 같아 보여집니다.
별로 손가락질하여 지적할 큰 것은 없습니다만 우리는 항상 우리 마음에 좋아하는 경우와, 싫어하는 경우, 일시적인 변덕과 공상 , 소원과 취미, 도락(취미로 즐기는 오락, 좋지 못한 유흥에 빠짐)과 자만심을 가지고서 세상을 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이러한 적은 일들 가운데서 섬김을 받지 못하게 되면 괴로워하기 쉽고 우리 자신이나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짜증을 내기 쉽습니다.

     행복한 길
나는 우리 삶이 행복하게 되는 길은 매일 이 세상을 새롭게 대할 수 있는 정신에 크게 달려 있다고 확신합니다. 섬김을 받으려 한다면 우리는 곧 짜증을 내게 되고 마음속에서 성을 내며 약이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도리어 섬기려 한다면 문제는 아주 판이하게 달라질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도다." (행20:35)고 했습니다.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겨 주는 것이 보다 행복합니다. 뿐만 아니라 훨씬 아니라 훨씬 더 고상한 일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20:27)

      한마디 경고
여기서 한마디 주위를 환기 해 두고 싶습니다. 이는 우리가 스토아 철학파, 즉 금욕주의자와 같이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말씀 드려온 것들 - 성가심, 빈정댐, 실망 등을 우리도 물론 느낍니다. (우리가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별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이 계속해서 우리를 사로잡게 해서는 안됩니다. 누군가 얘기하기를 "당신은 까마귀가 당신의 머리위로 지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으나 머리털 속에 둥지를 트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고 했습니다.
우리가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불평을 품게되고 과장을 부리거나 낙심해서 까마귀가 둥지를 틀게끔 하여 마침내 해로운 알을 까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섬김을 받지 않고 도리어 섬기려 한다면 우리는 불평을 품지 않으며 별로 그런 일을 과장도 않고 별로 신경도 쓰지 않으며 너무 집착해서 거기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그분을 닮아 갑니다. 예수님은 항상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시고 그들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에 대해서 분주 하셨기에 자신이 섬김을 받는지 안 받는지에 대해서 자기자신을 생각해 보실 틈이 없었습니다. 당신의 이웃에게 감동을 주게되는 최고의 방도는 이웃을 관심있게 돌봐주는 일에 분주하는 것입니다.

      또 한마디 경고
여기서는 우리가 반드시 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항상 멸시 당해야하고 존경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또 우리가 결코 성공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도 아니며 어떤 보상이나 상급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불의, 모욕, 부당한 대우를 하는 세상에 대해 참견을 않거나 무관심해야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종류의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섬김을 받는 그 자체엔 아무 해로운 게 없습니다. 인자께서도 자주 섬김을 받으셨으며 주님께선 그것을 아주 고마워하셨습니다. 아마 우리가 섬김 받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면 더욱더 섬김을 받을 것입니다. 문제가 되고 해가 되는 것은 섬기려 하지도 않고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는데 있습니다. 섬김을 받기를 속으로 바라는 게 문제입니다.
섬김 받기를 구하며 마음을 두었으나 섬김을 받지 못하게 되면 실망하고 분내며 화를 내고 성질을 부리게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실패 곧 섬김을 받으려 하는 생각이 너무나 지배하고 있고 그것의 결과는 너무 슬픈 일이기에, 또한 주로 습관적으로 죄를 짓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에 실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아가 죽어야 한다.
그럼 지금부터 자아가 죽는 방도에 관하여 간단히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모든 문제 또는 사소한 문제들의 밑바탕에는 자아(self)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두십시오. 이 오래된 적인 자아는 극복되어 장사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자아로 하여금 자리잡을 거처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이 자아를 두고 말하기를 "나의 생일에 최고의 소원은 네가 죽었으면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합니다.
그 사람의 말은 옳은 얘기입니다. 자아는 죽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는 태도를 통하여 역경, 멸시, 근심거리, 어떠한 상처도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이 모든 것을 놀라운 간증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실패가 하나의 축복이 되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방해받아 중간에 좌절되는 것은 우리에게 오히려 아주 좋은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소원이 방해받는 것이 큰 축복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짓밟혀 무시당하는 게 놀라운 일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매번 우리는 섬김을 받지 못했기에 자아가 죽어야할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를 반대하는 그 사람이 우리의 교활적인 자아를 다스리는 친구로 여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자아는 극복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복한 삶,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자아가 죽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셔야 함
그러나 자아가 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밖에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살아 계셔야 합니다. 자아는 죽고 - 그리스도는 살아 계셔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자아가 죽는데 비례하여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아의 죽음을 꺼리지 맙시다. 이 죽음은 자아 중심의 생활이 죽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섬기려 하면서 세상을 새롭게 대할 수 있는 길은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살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형제, 자매(이웃)들의 이익을 위해서 우리의 삶을 드릴 수 있고 자신을 희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대속물
우리는 이 책자에서 가장 마지막 귀중한 한 단어에 대해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 모든 사람을 위한 대속물 - 딤전 2:6 >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사람들도 이 단어를 보게 되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부분입니다. "인자가 오셨다"는 사실, 그는 영광스러운 자기 집에 머물러 계셔도 되었지만 실제로 땅에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기의 생명을 당신을 위해 버렸습니다. 죄 - 곧 당신의 죄 때문에 당신의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붙잡게 되었습니다. 어떤 선한 마음의 결단이나 개심도 지난 과거를 취소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저주받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선 당신의 모든 죄를 완전히 대신 하셨습니다. <벧전2:24, 요일2:2)
예수님께선 형벌과 죄의 세력에서 당신을 해방시키려고 돌아 가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 대한 죄인으로 나아와 회개하고 당신의 죄를 위해 흘린 구속의 피 곧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으십시오.(요일1:7) 그러면 즉시 당신의 모든 수치스러운 과거는 깨끗이 지워지고 이제는 사단의 불행스러운 노예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피로 사신 아들이 되어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떳떳이 설 수 있습니다. "구속된 것은 ......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벧전1:18,19)  이젠 당신은 주님과 교제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에 하늘 나라의 아버지의 하시는 일에 실질적인 동반자가 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막3:14),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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