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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내가 대신 죽을 수만 있다면!<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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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한번 들러 보고 싶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었습니다.
오늘은 어느분의 권유로 들어와 보았군요.
참 좋은 곳이네요. 시간 있을 때 다시 들어와 볼 것을 약속드립니다.
해달 쪽지 읽으며 늘 은혜 받는 사람입니다.
부산의 어느 소아과 의사입니다. 다들 가명을 쓰시기에 저도 써 봅니다.
베비닥(baby doctor!) 멋있죠? 꼭 한분은 제가 누군지 아시지요.
최간사님, 최전도사님, 수정씨, 그외 많은 언니들, 머슴들 기도중 기억날 땐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화이팅!

답답한 심정으로 쓴 글이 하나 있어서 올립니다. 삶을 잠시나마 이해받고 싶어서...


   내가 대신 죽을 수만 있다면

전화를 받고 뛰어 갔을 때에는 이미 심장은 멎어 있었고 동공은 열려 있었다. 간호사가 혈관주사를 달고 반창고를 붙인 그 순간에 아이의 숨은 갑자기 멎어 버렸다. 동시에 심장도 정지해 버렸다. 혈관주사는 어제도 그제도 같은 주사였다. 결코 죽을병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달려간 시간이 늦었던 것도 아니었다. 마침 회진 중이었던지라 금방 달려갈 수도 있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단 하나의 흔적이 있다면 기관지 삽관을 했을 때 기도로부터 우유가 나왔다는 것, 간호사가 보기에 잠시 경련을 일으켰다는 것뿐이었다. 이미 심장까지 멎은 아이에게 갖은 방법으로 소생시키려 애써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죽어 가는 생명 앞에 의사라는 존재는 이미 무의미했다.

"왜 죽었어요!" 뒤늦게 달려온 아빠의 고함이었다. 현장에 없었으니 그 물음은 당연했다. 할말을 잊고 멍하게 서 있는 내게 다시 한번, 눈을 부릅뜨며 다그친 말, "왜 죽었냔 말이요!" 그것은 차라리 "왜 죽였느냐!" 라는 취조였다. 어느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사건 앞에 누군가를 원망해야 한다면 담당의사가 그 대상이 된다는 것을 나 너무도 잘 알기에...

"난 아무 죄도 없단 말예요!" 죽은 아기를 껴안고 절규하는 엄마의 부르짖음이었다. 죄도 없는데 왜 내 자식을 데려가느냐는 하나님께 대한 호소이리라. 자식 잃은 그 마음을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난 아무 죄도 없단 말예요!" 그 말은 계속 메아리가 되어 나의 귀를 울렸다. 6개월 된 어린 생명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천진난만한 웃음을 대하며 사랑으로 키워온 엄마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죄가 있다면 의사로서 손 한번 써 보지 못하고 죽음으로 내보낸 담당의사인 나의 죄였다.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서라도 혜원이가 살아날 수 있다면! 아니, 내가 대신 죽어 혜원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아기를 졸지에 잃은 엄마의 마음이 되어 대성통곡을 하며 울었다. 엄마가 누워있는 병실을 찾았다. "과장님, 감사합니다. 그 동안 우리 혜원이 잘 봐 주셨는데..." 말끝을 흐리며 통곡하는 엄마와 껴안고 울었다.  

신생아 때부터 맡아 치료해온 주치의로서 허탈한 죽음 앞에 쓸어 내릴 수 없는 허전함으로 주체할 수 없어 식음을 전폐하며 그렇게 나는 다녔다. "왜 하필이면 이 고통을 제가 짊어져야 합니까! 이렇게 살지 않고는 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없었나요? 하나님! 왜 하필이면 나였나요!" 나란 인간은 의사의 직책을 감당하기에 과연 적합한 것인가를 두고 여러 날을 교회의 지하 기도실에서 울부짖었다. 아예 하나님 주신 길이 이 분야가 아니라면 이제라도 훌훌 털고 떠나고 싶었던 것이다.

나의 25년의 의사생활 중 발뻗고 자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밤늦게 전화벨이 울릴 때는 '혹시 나의 환자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향해 달려간다. 세상에 수많은 직업 중 왜 하필이면 죽음을 직면하는 직업을 선택해야 했을까? 왜 하필이면 가냘픈 여자의 몸으로 가장 사망률이 높은 신생아와 위험요소가 많은 경련 크리닉을 맡아야만 했을까? 환자 하나가 죽어나갈 때마다 나는 "살인자!" 라는 무시무시한 누명을 쓴 채 공포에 질리며 밤잠을 설쳐왔다. 피를 말려가며 애태우며 살리려다 죽은 생명 앞에 남은 것은 항상 원망과 미움, 양심의 가책과 불면의 날들뿐이었다.

어떤 분의 위로가 있었다. "과장님! 생명은 하나님께 있어요." 이제껏 많은 부모들이 "우리 아이의 생명의 은인입니다."의 찬사에, 말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했지만 분명 마음속에서는 내가 했다는 교만이 없진 않았으리라. 감사하다며, 선생님 덕분에 우리 아이 살았다고 인사하는 보호자 앞에 말로는 나는 해 드린 것 없다고 했으나, 그것은 말뿐 내심으로는 내가 살려낸 마냥 뿌듯한 마음으로 살아오진 않았던가? 찬사를 들을 때 내가 했다면 손가락질을 받을 때도 내가 했어야 했다. 죽은 아이 앞에 '생명은 하나님께 있다'는 말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도 나의 책임 회피 같아 죄스러웠다. 혹 나 자신이 불리할 때 생명은 하나님께 있다는 말로 나를 합리화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발뺌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그렇게 며칠간의 울부짖음 후 답이 있었다. "나의 일을 대신 하게 하기 위해서!".
잘못 들었어도 좋다. 그것은 분명 사람의 손길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고, 또한 나를 의사 되게 하신 그분의 뜻을 다시 확신하게 된 음성이었다. 그랬다. 분명 나는 생명을 움직일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아 대신하여 생명을 조금 더 연장시키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다. 살리는 일도 죽는 일도 모두 하나님께서 하셔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이번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은 이제껏 작으나마 나의 생각 속에 내재하고 있었던 '생명의 은인'이라는 찬사에서 과감히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귀한 동기였다. 누군가 가야 할 거친 길이라면 내가 갈 수 있어야 한다는 새로운 다짐을 한 기회였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의 고통에 동참하여 기도해 주시고 위로해 주신 나의 가족들과 주위 분들께 감사 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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