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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반론에 대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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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압니다.
신앙에 단계가 있다는 말에는 동의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적용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자체로 유익한 것임엔 반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지키려고 할 때 그것이 지킬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 못한가에 있습니다.
과연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있을까요?
만약에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거룩해질수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중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정죄의 기능이며, 둘째는 사죄의 기능이 있습니다.
정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생활속에서 찾아본다면 운전중 안전벨트를 매지 않으면 도로교통법위반으로 스티커를 발부받게 되고 벌금을 내게 됩니다.
도로교통법에서 안전띠착용의무를 조항으로 두지 않았으면 범죄가 성립이 안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이후 세상의 만사만물에는 저주가 덮이게 되었고, 죄인인 아담의 후예들은 자연스럽게 죄 가운데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사람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죄인인 상태로 태어나게 되고, 죄인이 하는일은 모두가 범죄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있기전에도 인간은 죄인인 것이며, 죄는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내면적 실체인 것입니다.
이런 죄가 율법의 조명을 받으면 범죄로 정죄되는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표출이 되면 범죄(자범죄)가 되는 것이고 표출이 안되어도 죄는 죄인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면 이미 그 자체가 죄인 것이고, 그 미움이 행위로 표출되어 폭력이나 살인등의 행위로 나타나면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해석하실때에
형제를 미워하면 이미 살인한 것이고,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죄의 발달과정을 말씀하신것이 아니라 죄가 무엇인지를 율법에 대한 바른 해석을 해 주신 것입니다.
겉으로는 율법을 잘 준행하는 듯했던 바리새인들이 책망을 받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탐심을 품기만 해도 이미 도둑질한 것이라는 것이 바른 율법해석입니다.
누가 그 법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며, 누가 있어 그것을 지킬 수 있단 말입니까? 덧붙여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라도 어기면 정죄받는다고 하셨습니다.즉 만가지의 율법중에서 구천구백구십구개를 지키고 하나를 범한자나 한가지를 지키고 구천구백구십구개를 어긴자나 똑같은 범죄자요 그 댓가는 똑같이 사망인 것입니다.

사소한 몇 가지를 지키고 마치 율법을 다 지킨 것처럼 착각했던 바리새인과 같은 생각을 오늘날 해서야 되겠습니까?
주님이 이땅에 계시던 시절 주님을 찾아온 부자청년이야기는 모두가 아는 이야기입니다.
부자청년은 자기가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면서 무엇을 더하여야 천국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주님께 질문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에 부자청년을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여기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는 가진 재산을 다 나누어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도처에 병든자와 가난한자가 널려 있는데 어찌 내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율법을 지켰다는 자가 재산이 그리 많단 말이냐, 이 도둑놈아 그러고도 네 녀석이 율법을 지켰다고 할 수 있느냐 하는 뜻인 것입니다.
굶주림에 지친 동족들을 보면서도 자기의 창고에 가득한 온갖 금.은. 보화들을 풀어놓지 못한 것이 어찌 율법을 준행한 결과냐 하는  말씀입니다.

주일날 예배에 참석하고, 소득중 일부를 십일조랍시고 내고, 새벽기도를 꼭 참석하는 것이 주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입니까?
꼭 이렇게 말하면 그럼 그런 것들을 하지말라는 것이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제발 그런 어리석은 질문들은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약 일년정도의 시간동안 한번도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에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 빠지게 된 적이 있는데요. 그 때 기분이 참 찝집했었습니다.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피곤해도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 무언가 뿌듯함이 가슴을 채우기도 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큰 문제인 것입니다. 무언가 대단한걸 하고 있기라도 한것같은 착각. 바람에 날리는 한줌 먼지의 가치만도 못한 일을 하면서 새벽의 첫 시간을 주님께 드리고 있다는 착각. 인간의 공로주의에 다름아닌 것입니다.
새벽기도회에 나가는 것이 주님께 첫시간을 드리는 것입니까?
웃기는 간짜장같은 소리입니다.

그러나,
주일예배를 빠져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입니다.
온갖 정성을 다하여도 부족한데, 예배참석도 제대로 못한다면 말씀을 언제 배울수 있습니까?
언젠가도 제가 한번 글을 쓴 적이 있는데요.
진정한 예배는 우리의 삶이며, 그 삶의 예배의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 예배를 비롯한 말씀 배우는 시간인 것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서 그 뜻을 분별하는 법과 시간을 들여야 하지만 모두가 그럴수는 없기에 전문가(목회자)들이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배움의 시간과 모임을 우습게 안 다면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율법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율법을 무시하라고 하는 말로 들어서야 안되겠지요?
죽어야 마땅한(이미죽은)자들을 값없이 사해준 은혜를 받은 자가 그 은혜를 무시할 수 있습니까?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자가 하나도 없다고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율법을 무시하라는 말씀인가요?
율법의 종노릇을 계속할 것인지, 의로운 사랑의법의 종노릇을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율법에서 놓임 받은 우리는 사랑의 성령의 법 아래 있습니다.
그 사랑은 율법을 지키듯 의무감으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바 은혜만큼(깨달아지는분량만큼)그 사랑의 행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연약할때는 자기 자신의 짐도 제대로 못 지고 남에게 짐을 지우게도 됩니다만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러서 연약한 자의 짐을 대신 지어주는 아름다운 신앙의 삶이 우리 모두에게서 나올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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