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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신적 요새를 허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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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요새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컴퓨터처럼, 우리 두뇌는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을 하나하나 다 기록해 둔다. 이러한 인상들은 우리의 육체에 어떤 자극을 준다. 어린 시절의 쓰라린 기억에 재접속하며 물리적인 고통을 다시 빚어내는 어른들도 더러 있다. 이는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는 요새가 그들 안에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이 요새는 우리의 성격에 영향을 준다.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고,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온 거짓들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대체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이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우리가 갖고 있다는 사실이 곧 좋은 소식이다. 주께서 성령을 보내셨고, 그는 진리의 영이시며, 우리는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어떻게 견고한 요새가 우리 마음속에 건축되었는가? 어린 시절에 우리 마음이 프로그램되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다. 첫째로, 우리가 자라난 가정, 교회, 이웃, 속했던 공동체, 친구 그리고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친 다른 요소 등 우리 삶을 주관하는 보편적인 경험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일반적인 경험들 외에 우리의 정신적 요새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는 중요한 요소는 충격적인 경험이다. 이런 경험들은 우리 기억 속에서 어디엔가 저장되고, 우리 두뇌라는 유기체 컴퓨터에는 삭제 버튼이라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인간의 발달에 환경만이 유일한 요소는 아니다. 다른 요소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세로부터 알고 계시며, 우리 각자를 어머니 태중에서 독특하게 창조하셨다.

유독 성적 요새는 어려운 것이다. 이 요새는 일단 마음속에 형성되면 그 인상을 언제든지 쉽게 불러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길로 탈출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원래의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한다. 우리가 출력을 조정할 수는 없지만, 무엇을 입력시킬지는 조정할 수 있다.

요새란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또는 충격적인 경험으로 강하게 우리 마음속에 각인된, 생각이나 기억이 잔상 등의 습관적인 양식이다. 저술가요 강사인 에드 실보소는 요새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절망, 내가 아는 지식이 하나님의 뜻에 반대된다고 생각되는 현실로 가득찬 심적 경향"이라고 정의했다. 정신적인 요새를 어떤 사람들은 육신의 형식이라고 하고, 심리학자들은 방어기제라고 이야기한다. 요새를 형성할 수 있는 조합의 수는 거의 무한대이다.

우리 몸의 지체와 싸우고 있는 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몸을 불의의 도구로 사용할 것을 배격하고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야 하며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답을 찾은 것은 아니다. 우리의 성화를 방해하는 적은 이 세상과 육신과 마귀이다. 다음 장에서는 우리 마음속의 영적 전투를 다룰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정신적 요새를 파괴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장비를 갖추는 것이다.

요새를 허물라

마음의 죄로 이룬 소굴은 마귀가 거하는 마지막 장소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쓴다. 이런 방법으로 중독자들이 어느 정도는 절제에 성공할지 모르나, 그들이 진정 바라는 감정적, 정신적, 영적인 자유는 계속 잡힐 듯 잡힐 듯 멀어진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권에 완전히 순복할 때, 성령의 열매인 절제로서 우리 자신을 통제하게 되는데, 이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고 성화되었다.

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혼합된 메시지가 난무하고 있다. 그 결과로 혼합된 감정도 가지각색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받았다는 느낌이 없고,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 같지 않고, 자신이 아무 짝에도 쓸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메시지들이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라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 바울은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딤전 4:1)라고 기록했다.

사단이 우리를 꾀어 거짓을 믿게 할 수 있다면, 그는 우리를 감정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결박하여 결국 우리가 우리 삶을 통제하기를 완전히 포기하게 만들고자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신분에 대하여 사단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그가 우리를 속여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믿게 하기만 하면, 우리는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처럼 살아간다. 사람들은 스스로 말하는 대로 항상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믿는 대로 살아가는 일은 어김없다.

만약 우리 마음속에 영적인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면 왜 우리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까? 한 가지 이유는 내가 당신의 마음을 읽을 수 없고, 당신도 나의 마음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우리는 그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해답은 "동성애의 영을 쫓아내라" "음란의 영을 쫓아내라" "술의 영을 쫓아내라"가 아니다. 이런 단순한 생각이 교회의 신뢰도를 추락시키고 온전한 해답을 찾지 못한 많은 중독자들에게 교회를 떠나게 만들었다. 패배한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쓰레기로 가득 찬 집과 같다. 몇 달 동안 쓰레기를 치우지 않고, 여기저기 흘린 것들은 닦지 않은 채 널려 있다. 파리들이 웅웅거리는데, 우리는 그 파리들의 행동습성을 연구하고, 대장이 어떤 놈인지 밝혀내고, 모든 파리를 규명하고 순위를 매길 수 있지만, 그렇다 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파리를 쫓아버려도 그들은 금방 되돌아올 것이다. 우리는 그 쓰레기를 모두 치워야 한다. 회개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이 언제까지나 해답이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함으로(약4:7) 가능할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고 마귀를 대적하려 한다면, 우리는 한바탕 개싸움을 벌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복하지만 마귀를 대적하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죄의 멍에에 매여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재활 프로그램들이 이 두 가지를 모두 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다.

우리가 만약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발생할까? 우리가 그런 생각들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 요새를 구축하고 음란한 습관과 감정적인 쓰레기를 채워 넣기 시작할 것이다.

마음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이 과정은, 처음 시작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두 걸음 전진에 한 걸음 후퇴인 것만 같다. 그러나 끈질기게 노력하면 세 걸음 전진, 한 걸음 후퇴가 될 것이다. 그러고는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로 사로잡아오는 법을 배우면서, 네 걸음, 다섯 걸음 전진하는 식으로 발전한다. 우리는 한 걸음 후퇴할 때마다 낙심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기억하라, 우리 죄는 이미 용서되었다. 우리는 단지 믿음으로,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면서 살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곧, 우리가 진리 이외의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으므로 이 전쟁은 이길만한 전쟁이다. 그리스도는 이미 가장 위대한 전투를 승리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이 자유를 누리도록 우리를 부르셨는데, 이 자유는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복이다. 이 자유는 그것을 얻기 위해 싸울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구인지를 더 알아갈수록, 이 마음속의 전쟁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더 알아갈수록, 과정은 점점 쉬워진다. 결국 스무 걸음 전진에 한 걸음 후퇴가 될 것이며 마지막에는 계속 전진하다가 간혹 미끄러지기만 할 것이다.

- 열린편지/ 닐 앤더슨, 마이크 퀼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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