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칼럼 도스토예프스키의 그리스도론

첨부 1


- 배성산 목사(서울교회)

  ‘도스토예프스키’하면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대문호로서 그의 문학작품만 이해하려 든다. 그러나 그의 심오한 의도와 뜻은 숭고한 신앙심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의 생각 밑바닥에는 생각의 차원을 넘어서는 어떤 심정이 깔려 있다. 그것을 그리스도 심정이라고나 할까. 이 심정 때문에 그는 러시아를 넘고 인류를 넘어서 우주적인 작가로 다시 살아나고 신앙을 갖게 한 점에 유의하여 여기 그의 작품 속에 깃들어져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보려 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새로운 종교를 기독교 밖에서 찾지 않았고 기독교의 복음 속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그가 무엇보다도 사랑한 것은 그리스도였다.

  그리하여 그가 크게 싸운 것은 허무주의요 그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평생을 추구한 것이 새로운 종교였다. 그의 최후의 소설이며 그의 창작의 총결산이요 그의 정신적 탐구의 궁극적 표현인 “카라마조프의 형제”의 작품은 그 스케일의 웅대함과 구성의 기발함 그리고 심리분석의 심각함과 기독교적 신앙심에 있다. 그리하여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에 대비하고 있음을 안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예술가로서의 묘사력은 셰익스피어에 필적된다고 한다. 그러면 본 작품은 한 부분이 ‘무신론자’(1869) 또 한 부분이 ‘위대한 죄인의 생애’(1870) 등 제목이 붙은 몇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대하소설로서 끊임없이 작가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던 문제 곧 인생의 부조리 때문에 신을 거부하고 반역한다고 하는 러시아의 무신론적 지식인들과 대결하여 그것을 초월하고 극복하는 인물을 창조하는 것이 목적이었음을 알게 한다.

  그는 인간 심리 깊숙한 곳에 스며있는 범죄성을 해부하여 심각한 예술적 경지를 전개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세계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이것은 작품의 문화적 의의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20세기의 불안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고 기독교 문학에 굵직한 문제점들을 제시하였다. 이야기는 1860년대 러시아의 지방 도시를 무대로 벼락부자인 카라마조프 일가 사람들을 중심하여 벌어진다. 지면관계상 외면적인 줄거리는 피하고 작품의 내면적인 줄거리는 알료샤를 중심하여 조시마 장로와 이반 사이에 전개되는 사상투쟁, 기독교와 무신론의 대결에 유의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혼은 이반의 극시 ‘대심문관’ 에 있다.

  가톨릭의 이단 심문이 가장 전성기를 배경으로 이루었던 15세기 스페인의 세빌리아 마을이 그 무대이다. 내용인즉 이단자들을 화형에 처하는 광장에 그리스도가 강림한다. 사람들은 곧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안다. 대심문관의 명령으로 그리스도는 체포되고 투옥된다. 그 날 밤 감옥에서 대심문관은 그리스도를 공박한다. 이것은 마태와 누가의 양 복음서 4장에 기록 되어 있는 예수가 악마에게 세 가지 시험을 받는 문제이다. 대심문관은 이러한 내용으로 말을 한다. “당신이 양심의 자유를 위해 빵을 거절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인간은 빵을 곁눈질하며 시비와 선악의 판단에 괴로워해야만 했다.

  또한 당신은 자유로운 신앙 때문에 기적을 거부했는데 그것 때문에 인간은 기적과 더불어 신도 거부하고 말았다. 그리고 당신은 지상의 권력을 거절했는데 지상의 인류가 추구하는 것은 하나의 권력 아래 세계적으로 결합하여 평화와 행복의 왕국을 지상에 건설하는 일이다.” 라고 하면서 대심문관의 탄핵은 계속된다. “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자유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시켜 빵을 주었다. 이제 사람들은 자기의 자유를 내버림으로써 자유를 누리게 되었고 기적과 신비와 권위라고 하는 세 가지 힘 위에 지상의 왕국을 건설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약하고 천하게 만들어진 대다수 사람에게 자유로운 양심의 선택을 강요하여 고뇌에 빠지게 하였다. 당신 같은 사람은 화형에 처해 죽이고 말겠다.” 이 대심문의 규탄에 대해 그리스도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시종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역시 아무 말도 없이 대심문관에게 입 맞춘다. 이러한 이반의 인간의 이름에 의한 그리스도 고발에 대하여 알료사는 “당신의 극시(劇詩)는 그리스도의 찬미이지 결코 비방이 아니요”라고 말한다. 이 대심문관은 빵과 자유의 문제, 신앙과 이성의 문제, 정치권력의 문제 등 “지상에서의 인간성의 역사적 모순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신에 대한 반역의 근거가 있다. 그러나 알료사의 말처럼 작가는 자유로운 양심의 선택과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인간의 존엄을 어디까지나 옹호하려 한 점에 유의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정말로 아름답고 위대한 사람이 한 사람이 있다. 그 분은 그리스도다. 누구나 ‘카라마조프의 형제’ 중에 대심판관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의 그리스도 관에 압도되고 말 것이다. 일체를 초월하여 시종 침묵을 지키는 그리스도, 그는 한없이 연민의 미소를 고요히 지으면서 아무 말 없이 군중의 속을 걸어가신다. 사랑의 태양이 그의 가슴속에 불타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격으로 떨게 한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축복 하신다.

  그는 몸이나 그의 옷자락에 터치(touch)만 해도 모든 것을 고칠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시베리아감옥에서 나온 직후에 이렇게 고백한다. “그리스도 이상으로 아름답고 심오하고 자비롭고 이성적이고 웅장하고 완벽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주 없을 뿐만 아니라 있을 수가 없다. 나는 나에게 뜨거운 사랑으로 이렇게 잘라 말할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만일 누군가가 나를 향하여 ‘그리스도는 진리 밖에 있다. 참다운 진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다”고 증명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나는 차라리 진리보다는 그리스도와 같이 있기를 바랄 것이다” 고 말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그리스도론은 이성을 통해 얻은 그리스도가 아니다. 심정을 통해 얻은 그리스도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생각해서 얻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의 일체를 용서받고 눈물을 통하여 얻은 그리스도다. 성서를 통해 본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 본 그리스도요 이성을 통해 본 그리스도가 아니라 옥고를 통해서 본 그리스도임을 고백한다. 눈바람 몰아치는 차가운 감옥에서 한없는 고독과 괴로움 속에서 만나 본 심정(心情)의 그리스도이시다. 이러한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그의 허무주의는 이겨 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허무주의란 결국 이성주의요 일체를 논리적으로 해결해 보려는 인간주의의 결정이라고 할 수 가있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그리스도론은 신이 인간이 되었다든가 십자의 속죄라든가 부활의 증거라든가 그러한 교리적인 것이 아니고 일체를 용서해 주시고 선한 자와 악한 자에게 골고루 베풀어 주시는 사랑의 태양이었다. 그는 하나의 사랑의 기적이었다. 그는 사랑의 화신이었다. 사랑의 뜨거운 태양 밑에 차가운 옥중의 얼음이 녹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라도 좋다. 그는 진리를 초월한 사람이다. 그는 3차원을 넘어서 4차원을 나는 우주선처럼 진리의 세계를 넘어서 사랑의 세계를 날아갈 때에 그는 비로소 자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밤낮 찾은 것은 자유이며 자유는 3차원의 세계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이성의 세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 하나의 신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었다. 그는 기독교의 정신은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존중한다. 그리고 자유를 위한 신앙 그것이 기독교정신의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는 진리의 종교요 자유의 종교이다. 그리스도의 모습은 자유의 모습이다. 인간을 강요하지도 않고 인간을 복종시키지도 않고 반대로 인간에게 자유를 최대 선물로 주는 그리스도, 그것은 신적인 그리스도이며 인간의 능력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신비의 그리스도이다.

  인간은 타락한 후에는 자유를 미워한다. 자유는 신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본질은 자유이다. 활동이다. 일이다. 창조다. 인간은 창조를 싫어하고 일을 싫어하고 태만하고 게을러 빠져도 하는 것 없이 거저 세상을 보내려고 한다. 이것이 허무주의이다. 이런 인간들은 자유라든가 자각이라든가 자율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치보다도 타율을 더 환영한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죄인에게 있어서 자유처럼 무거운 짐은 없다. 그런데 움직임 없이 자유는 없다. 신이 일체를 지배하고 자기는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종교가 우상의 종교요 허무주의의 종교이다.

  자유는 활동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한없이 높은 것을 추구하는 고귀한 정신이다. 이런 정신이 산 정신이요 이러한 정신이 자유의 정신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자유를 존중한다. 양심의 자유, 정신의 자유, 생각의 자유, 행동의 자유, 개성의 존중 이것이 그리스도 사랑의 핵심이다. 그리스도는 생각의 자유를 위하여 40일을 금식했으며 인간의 자유를 억누르는 모든 시험을 이겨버린다. 이러한 자유의 구현을 본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제 그리스도 없이는 인간을 생각할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에 있어서 하나의 영원한 이상이요 완벽한 인간성이었다. 세계의 역사위에 오직 한번 있었던 기적, 비할 수 없이 아름다운 진실한 인간, 그는 이런 인간을 제외하고 역사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그리스도가 없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쓸쓸하고 비참해 보일 것이냐 그것은 광야에 피어난 한포기의 꽃이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친 광야에 핀 한 떨기의 아름다운 꽃, 그것이 이 세상에 나타났던 그리스도이다. 만일 사람이 그리스도를 제거 한다면 가장 진실한 선과 미를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이의 주장은 그리스도가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인간 정신의 본성이 단순히 공상이나 이상이 아니라 육체요 현실임을 보여주기 위해 나타난 것임을 말하려 함인 것에 유의하게 된다. 빛이 품어 나오는 숭고한 육체, 이 육체의 숭고함에 황홀하여 사람들은 얼빠진 사람처럼 그를 따라 다녔으며 지독한 고난을 참아 가면서 그리스도의 육체를 체험하고 그의 모습의 완전성을 모방하고 육속에 드러난 그 빛을 믿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육신이 된 말씀, 행동이 된 이상, 현실화한 진선미의 대화에 한없는 존경과 사랑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는 진리이상이다. 그는 이렇게 믿는다. 씨에서 싹이 돋아나듯 진리의 씨에서 돋아나온 생명을 믿는다. 그리스도는 생명이다. 생명 자체의 생명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생명에는 깊이가 있다. 생명에는 인정이 있다. 생명에는 용기가 있다. 생명에는 통일이 있다. 이것이 그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이전 이후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나로 족하다. 이 하나 때문에 유성도 빛나고 이 우주의 모든 별이 빛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빛의 근원이 되었다고 믿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그리스도론’을 접하면서 그가 오늘의 우리에게 준 ‘사랑의 메시지’가 있다면 “사랑은 밖에 핀 꽃을 안으로 옮겨 심게 하는 힘이요 지혜는 안에 핀 꽃을 밖으로 드러내는 빛이다. 사람이 산을 보고 산과 같이 살다가 산이 되듯이 사람은 꽃을 보고 꽃과 같이 살다가 꽃이 되어 버린다. 꽃을 보고 가는 것이 인생의 길이요 꽃과 같이 사는 것이 인생의 이치요 꽃이 피고 마는 것이 인생의 명(命)이다. 사람은 밖에서 피어 자연이 되고 안에 피어 정신이 되고 위에 피어 존재가 된다. 마음은 새 땅에 꽃을 피우고 정신의 새 하늘에 향내를 떨치고 존재의 새 보좌에 빛을 더한다. 이것이 인간의 꿈이요 인생의 깸이다. 자유는 꿈속에서 자라 정의의 꽃을 피우고 사랑은 깸 속에서 피어 평화의 향기를 넓게 펼친 다.” 11월 한 달 내내 가을과 함께 고전(古典)을 생각해 보았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