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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교회의 시대적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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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성산 목사(서울교회)

  오늘의 시대에 현존한 수많은 교회 중에서 크게 두 가지의 교회형태를 본다. 하나는 사회의 실정이야 어찌 되었든지 간에 인간의 마음에 평안만을 주도록 고려한 교회 즉 현상유지에만 만족할 뿐만 아니라 그 현상의 보수(保守)를 고수(固守)하는 영합주의의 교회가 있다. 그러나 또 다른 교회는 아무리 사회의 기존 세력이 우리의 양심을 압박하고 위협할지라도 그 중심으로부터 불의를 미워하고 정의를 사랑하며 인간의 마음 깊은 배려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회생활의 조직체 중에서도 정의를 사랑하고 그 실현을 위해 예언자적인 역할을 하는 교회가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가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 후자에 속한 교회임을 아는 것이다. 여기에 요한 웨슬리는 ‘나는 이 사회에 부정과 불의가 있는 동안 교회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생각 한다’고 한 말에 유의한다. 1982년 세계교회협의회가 사회선교 세미나에서 ‘오늘의 사회선교 이해를 위하여’라는 연구 결과를 위한 발표문 가운데 ‘다양한 문화와 종교 그리고 이데올로기들로 이루어진 복수주의 사회의 현실상황에서 인간적인 사회를 향한 교회적인 봉사의 실현은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성찰에 의해서 동반 되어져야 한다고 했으며 교회는 하나님나라 가치를 구체화 하기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했다.

  그 하나님나라 가치는 예수가 선포했던 진리, 자유, 정의, 그리고 평화등과 같은 가치를 의미 한다’ 고 부연한 점에 유의하게 된다. 한국 사회는 지난 반세기 동안에 급속한 사회변동을 경험해 왔으며 다양하고 다문화 속에서 다원화의 현상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광범하고도 근본적인 구조 변동은 지금도 빠른 속도로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변동은 사회학적 분석과 진단의 대상이 되어야 할 문제를 야기 시키고 그 문제의 치유를 요청받고 있음에 시대적 인식을 갖는 것이다. 산업화, 도시화, 시민사회화 등의 근본적인 구조적 변동의 경험은 세계에서 유례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됨으로 경제성장과 대중의 기대상승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의 확산과 점차로 심화되어 가고 있는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 그리고 무비판적인 외래문화 수용의 결과로 발생한 문화정체성의 위기가 가치관의 혼란으로 사회현실의 문제로 대두되고 있음을 우리는 보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 처한 교회는 시대적 인식을 같이하고 치유(治癒)적 대책마련에 기도해야 한다. 먼저 사회를 보는 교회의 시대적 인식은 사회의 깨어진 공동체를 구축하는 길에 그 사명을 가져야 한다. 신학자 부버(Martin Buber)의 말과 같이 ‘이 시대는 집단(Collectivity)은 있으나 공동사회(Community)는 없다’고 했다. 공동사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대화가 있는 곳에서만 그 성립이 가능하다. 집단이란 무수한 개인들을 어떤 공통된 목적을 위하여 무장을 시키고 장비를 갖추어 한 곳에 묶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공동사회란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옆에서 바라만 보는 그런 사회가 아니고 한 가지 목적을 위하야 움직여 나아갈 때 피차에 서로 어울려서 ‘나’를 '너‘에게 흘러들어 가도록 동적으로 서로 상대방의 인격과 대면하는 그런 사회이다.

  교회의 신앙은 인간의 정체성 상실과 공동체의 붕괴를 하나님을 반역한 죄의 결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든지 먼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할 때에만 가장 확실한 자아를 발견하고 자기정체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이런 인격과 인격이 만나서 긴밀한 상호관계에서 대화를 하고 ‘나’를 ‘너’에게 주는 그런 공동체를 말하여 천국이라 부른다. 다음으로 교회가 사회의 시대적 인식으로 보는 점에 대하여 전 세계를 감싸고 있는 긴장과 냉전을 해소시키고 만백성이 추구하는 세계평화를 실현시킨데 교회가 그 인식을 같이해야 한다. 세상에는 여러 평화가 있다.

  오늘 우리가 이 냉전의 세계에서 보는 것과 같은 무장(武裝)한 평화가 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그 공격의 대상을 삼았던 것들은 거짓 평화에 대해서였음을 알아야 한다. 오늘도 그 현실을 본다.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압제자의 멍에를 메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불의를 보고도 침묵해 버리고 마침내 노예의지를 포회(抱懷)하려는 패전자의 평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평화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평화이다. 그것은 어떤 한 사람의 의지가 다른 의지들을 완전히 지배하는데서 결과 되는 것으로 무조건 사람들을 복종케 하는 그런 종류의 평화이다.

  진정한 평화는 무슨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평화만 달성하면 그만이라는 그런 위태로운 평화는 평화가 될 수 없다. 교회는 처음부터 사랑의 종교라고 하여 개인 간의 싸움에서 크게는 국가 간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전쟁을 반대하는 그런 입장만이 교회의 전체의 입장만은 아니었다. 공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가 그 잔혹한 악형과 무력을 가지고 이 세계에 널려 있는 약소국가들을 하나씩 차례로 삼켜 버리는데 우리는 눈뜨고서 이런 노예화에 대한 아무런 저항 없이 그 희생물이 되기를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지난 제2차 세계대전 때에 많은 평화주의자들이 그들이 재래에 가졌던 평화주의를 버리고 히틀러와 대항하는 지하 저항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음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계정세의 현실을 보면서 전체적인 해결의 열쇠는 못 가졌다고 할지라도 무슨 모양으로든지 정치적인 관계를 개선한데에 선봉에 서야 한다. 따라서 전체주의자들의 침략과 인류의 문명을 결국은 파멸에로 몰아넣는 전체 전을 미연 해 방지할 균형 잡힌 정책을 찾는데 함께해야 한다. 지금도 강대국들은 패권주의의 힘으로 위장된 평화를 위해 전쟁을 야기하고 있음을 본다. 여기에 교회는 국민생활의 질적이며 윤리적인 향상을 도모함으로서 세계와 국가와 국민의 양심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어떤 특수한 문화의 압력에 굴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런 문화를 하나님의 심판 아래 가져오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여러 진영 사이에 이념적인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인 인류 사이에 화목과 화해를 이루기 위하여 정의로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1945년 8월14일에 동경만의 미조리 함상에서 패전 일본군의 강복(降伏)을 받는 역사적인 순간에 맥아더 장군의 한 말은 새롭게 오늘에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의 우리의 종국적인 문제는 군사적인 문제가 아니고 신학적인 문제이다’라고 한 함축적인 의미를 신앙 안에서 세계평화 실현의 가능성을 보여준 평화고백임을 인식해야 한다. 일찍이 아인슈타인은 ‘온 세계의 감옥마다 비전론자(非戰論者)로 채워 질 때에만 완전한 평화의 시대가 도래 하리라’고 예언하였다.

  교회의 평화위치를 말함이라 생각해 본다. 또 한 가지로 교회가 사회의 시대적 인식에 대처하는 방안으로 사회가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회화(Conversation)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아야 한다는 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기독교 신앙과 불신앙과의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중세기의 교회가 한 때 모든 학문의 왕자를 점령하고 기독교의 신학을 과학의 여왕이라는 칭호까지 들었으나 그런 기독교의 황금시대는 이미 지나갔음을 보고 알아야 한다. 문예부흥과 계몽시대 이후로 학문은 분화되어 제각기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교회의 권위는 그 위상에서 해방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던 과거사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 세속적인 학문은 빠른 속도로 급격한 발전을 하는 동안에 기독교의 신학은 낡은 시대의 우주관과 자연관에 고착되어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이게 된 점을 생각해 본다. 이러한 폐쇄적인 교회는 사회와 개방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현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거사를 이루고 있는 교회는 지금의 자리에서 교회선교를 생각해 보면 해외선교에만 골몰하는 선교의 현실에 교회의 자리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밖에 없게 한다. 오늘의 교회가 선교 열에 해외선교의 관심도 중요하지만 더욱 현실적인 선교사의 선교지대는 과학, 예술, 기술, 정보, 정치, 교육, 문화, 실업, 통신, 등의 많은 분야로 선교의 사각지대를 찾아야 한다.

  사회의 전문화 시대에 교회의 다양한 선교 분야도 관심을 가져야 할 시대적인 요청도 응하여야 함도 알아야 한다. 각 분야에 대한 선교의 자리가 중요함을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또한 타종교의 관심과 종교인 연합회도 가져 세계평화의 화해의 목소리도 높여야 할 때임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의 복음의 본질은 변하지 않으나 그 표현방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그것은 내용의 문제보다 전달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가 현대적 사명을 다 하려면 현대인에게 호응할 수 있는 대화의 길을 마련해야 한다. 사회의 행동방향과 성격 및 거기에 따른 사회적 긴장과 갈등을 치유하고 정체성회복과 공동체 붕괴를 막기 위해 교회는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위해 사회와 회화하며 교회의 나아갈 선교의 진로를 찾아 가야 한다. 오늘의 교회가 사회적 시대인식을 갖고 사회선교의 내용을 실현할 구체적인 단계에 이르렀음을 주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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