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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소니 가문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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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충영 박사(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대구도시가스 사장)

일본 전후(戰後) 대표기업인 소니 창업자인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1921-1999)의 일가의 몰락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전 소니 회장 모리타 아키오가 돌아간 지 6년 만에 그의 장남이 사업 실패로 부친이 남긴 소니 재산을 거의 날려버렸습니다. 그 결과 1946년 소니 창업으로 벌었던 많은 재산은 사라지고 이제는 사업 밑천을 제공하였던 가업(家業)인 양조장 사업만 남게 되었습니다.

모리타 아키오는 대형 양조업체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46년 도쿄통신공업을 세워 라디오 수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953년 미국에서 트랜지스터 면허 생산권을 사들여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연간 4만대로 시작한 라디오 수출은 500만대까지 늘었고 주문이 쏟아져 특별전세기가 수시로 수출품을 실어 날라야 할 정도였습니다. 미국이 군수용으로 쓰던 트랜지스터를 민수용으로 돌린 전략과 고유상표를 내세운 전략이 맞아 떨어진 것이었습니다. 회사명도 SONY로 바꾸었습니다.

1979년에 개발한 워크맨도 대성공이었습니다. ‘경단박소(經短薄小)’란 소니의 전략은 세계의 트렌드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는 회사 내에서 학력과 학벌을 파괴하는 등 창의력을 극대화하였습니다. 나이 50세를 넘기면서도 스키와 스쿠버다이빙을 시작할 만큼 그는 도전적이었지만 60대에 들어서는 극우보수로 돌아서서 ‘한국의 성장은 식민지배 덕’이라는 망언을 내뱉으며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공동집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1993년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6년 후에는 78 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리타 전 회장은 장남 히데오(英夫)에게 경영권을 세습하고 싶어 했으나 간부진의 반발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고, 히데오씨가 사장을 맡았던 레이케이 사의 탈세가 적발되어 64억 엔을 추징당하는 신세가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니가타(新潟)현에 500억 엔을 투입해 건설한 스키장에는 손님이 들지 않아 거액의 적자를 냈습니다. 그는 레이케이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야했고 회사도 해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리타가 관계자는 아사히 신문에 “본업인 양조업은 착실히 하고 있다”면서 “유감스럽지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재물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모리타 전 소니 회장의 일은 재물을 모우기는 쉽지 않지만 사라지는 것은 대단히 쉽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것입니다. 재물이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가를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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