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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문화와 소통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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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너드 스위트 교수

얼마 전 로스앤젤레스 모자이크교회의 한 스태프와 대화를 나누던 중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이야기인즉, 만일 당신이 중국에 가서 중국 사람들에게 "당신들 옷차림이 우스꽝스럽습니다. 당신들은 참 이상한 음식을 먹는군요. 나는 당신들의 음악이 싫습니다. 당신들의 말은 정말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서 제가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말입니다"라고 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지겠는가라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사실 다른 문화에서 온 대부분의 이방인이 현지인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문화적 갈등은 한 사회 속에서도 일어난다. "당신 몸에 새겨 놓은 이 문신이 도대체 뭡니까? 귀와 코와 심지어 혀까지 뚫어 박아 놓은 고리는 또 뭡니까? 정말로 혐오스럽군요. 괴상한 색으로 물들인 머리는 흉측합니다. 당신이 연주하고 부르는 음악은 내게는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말해 주고 싶습니다." 과연 이러한 상황에서 생각과 생각, 마음과 마음 사이의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어려울 것이다. 아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위대한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기 원한다면 당신은 나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는 마치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하는 말과 흡사하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언어를 배워 세상과 소통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세상과 소통을 할 것인가? 새롭게 출현하는 문화의 언어는 '영성의 언어'이다. 우리는 지금 눈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것들에 의해 움직여지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 사실은 고린도후서 4장18절에 잘 묘사되어 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다른 문화 속에서 복음을 소통할 때 그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은 '오만한' 태도이다. 그렇다고 그 문화를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수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이다. 문화적으로 표현된 것들의 표면뿐만 아니라 내면을 함께 보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성육신적 소통을 시도하는 것은 진정 '진실한' 태도일 것이다. 즉 영적인 힘과 능력을 기초로 하여 문화적 양식을 사용할 때 생명을 잃지 않은 복음이 소통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성육신적 전도'라고 부른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오셨지만 그는 하나님이셨고, 인간의 말과 풍습을 따랐지만 영적인 권위와 사랑을 보여주셨다. 교회는 문화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문화에 굴복하거나 타협해서도 안 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모습'을 본받아 문화와 소통하는 복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번역=스피릿벤처미니스트리스 코리아 대표 김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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