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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주의 나라 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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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태화 (안양대교수)

세상은 어제도 오늘도 시끌벅적하다. 동네시장이나 시골장터처럼 소란스럽다. 사람 왕래하는 소리,흥정하는 소리,더 받겠다고 목청 높이는 소리,덜 주겠다고 힘쓰는 소리,세상은 욕망있는 자들의 힘겨루기로 그렇게 요란하다. 만물의 탄식과 신음이 그치지 않는다. 때론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고후4:3)를 가리우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진리가 있으니 세상 죄와 허물을 그치게 할 광대한 소망의 빛이 비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동북아 평화문제로 설왕설래하고 있다. 세계는 핵위협의 확산으로 전전긍긍한다. 평화는 어디 있는가. 과연 평화는 어디서 오는가. 또한 자유는 어떻게 얻어질 수 있는가. 칸트의 고뇌와 같이 영구평화는 가능할까. 우리가 착각하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평화와 자유를 인간이 창출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평화와 자유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마치 생명과 시간이 인간의 손 너머에 있는 것과 같다. 평화와 자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것이다.

정당들은 내년 대선을 겨냥해 계략을 짜고 있다. 모두가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권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권력 또한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내재된 권위의 다른 표현이다. 모든 권세는 만유의 주로부터 임하는 것이다.

평화와 자유,권위와 권력은 지극히 사회학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이들은 본질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해있다. 이들이 지금 여기에 구체화되고 가시화되는 것이 역사이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막연하게 펼치려 하지 않으신다. 주께서는 인간의 상황을 활용하시어 그의 나라를 드러내신다. 역사는 그런 면에서 하나의 신비다. 그 한 예가 종교개혁(10월 31일)이다. 이 날은 역사 속에 임하신 하나님 나라의 한 실체이다. 루터와 칼빈 등 신앙인들에게 말씀에 눈을 뜨게 하고,역사와 문화를 변혁할 수 있는 열정을 부어주신 것이다.

인생이 머리를 짜내고 지혜를 모으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우선되어야 할 일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나라가 임하옵시며.” 지금은 모든 나라의 왕되신 주 앞에 나아와 무릎 꿇을 때이다. 잠잠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바라볼 때이다.

- 출처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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