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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흰 소’를 기독교로 소화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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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옥 박사 (국제 PEN 회원)

[문학의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이다. 문학은 상상에 의해 생명과 호기심을 입증하는 예술이다. 인간의 상상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일부이다. 한 작가의 상상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향해 열려있을 때 그의 작품은 기독문학 작품이 될 수 있다.(송영옥의 기독문학론 중에서)]

소설 ‘흰 소가 끄는 수레’는 박범신의 연작 소설 작품집의 이름이다. 작가는 1946년에 태어나 73년 신춘문예에 <여름의 잔해>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그 후 20여 년 간 전업 작가로서 <토끼와 잠수함>, <덫>,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불꽃놀이>, <불의 나라>등을 발표하면서 전력투구하며 작가 생활을 해 오다가 1993년 절필을 선언한다. <흰소가 끄는 수레>는 작가 자신이 상상력의 샘이 말라버린 상태에서 절필을 선언하고 오랜 침묵 속에 있으면서 자신의 문학과 삶에 대해 행하는 반성과 반추로 97년에 출판한 작품집이다.
- 송영옥 박사 (

인간은 그 누구라도 이따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회의를 갖는다. 마치 고갱이 화폭에 담았던 인생의 물음처럼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삶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라고 반문하게 된다. 그 속에서 주체는 불안해하며 떤다. 따라서 현대문학이 직면한 하나의 과제는 이 흔들리는 주체의 설 자리 찾기이며 작가란 바로 이 부랑하는 주체에 대해 문학적 접근을 시도하는 자이다. 박범신의 ‘흰소가 끄는 수레’는 바로 이러한 존재론적 물음을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흰소의 상징성을 빌어 찾고자 시도한 작품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자아의 존재 의의를 향한 절규인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로 대변되는 인물은 오십 전 후의 나이에 20여 년 간 집필 생활을 중단한 작가이다. ‘나’라고 하는 인칭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징조와 지표로 보아 작가 자신을 연상시키는 주인공으로서 작가 자신의 존재론적 물음을 대변하면서 삶과 죽음과 의미라는 길 찾기를 문학적 상상으로 형상화한다. 그는 작가로서의 자신의 꿈을 현실에서 이룰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50의 나이에 자살을 꿈꾸며 주머니 속에 면도칼을 넣고 젊은 날의 고뇌를 앓았던 추억의 장소로 찾아간다.

문학은 젊은 시절의 그에게 삶의 보람으로 작용하여 풍요로운 상상에 의해 작품을 씀으로서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지금의 그에게는 상상력의 고갈로 절필을 선언하고 그 절망감이 죽음의 유혹을 부추기고 있다. 그 순간의 참담함을 저자는 “상상력의 불이 꺼졌다”라고 절규함으로써 상상의 고갈은 곧 작가의 죽음이 되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주인공은 이 부랑의 과정에서 3장의 중간 부분에서는 기독교의 부활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회복하고자하는 망설임을 보인다. 그러나 “나무는 부러지고 꺾이고 죽지만 태어나는 나무들은 또 있으니 숲은 영원하다” 라고 하는 법화경의 구절로 스스로를 타이르며 구도자의 길을 간다. 물론 저자는 원광대학을 졸업하였고 불교도 그의 관심의 대상이다. 그러나 작품의 주인공은 불멸의 빛을 찾아서 해인사로 들어가지만 글로써 쓴 작품들은 하나의 덧없는 사멸에 지나지 않는다고 독백한다.

그 깨달음으로 결국 모든 욕심을 포기하게 되고 부랑을 끝낸다.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은 꿈과 희망은 하나의 집착일 뿐이라고 고백하는 순간에 자유로움을 느끼고 새로운 빛을 발견한다. 그 빛은 하나의 섬광으로서 그가 문학 자체로 귀의함으로써 본질을 회복하는 순간에 본 것이었다.

그 때 저자는 한 사나이의 입을 통해 “수천 업 겁, 불멸의 별들을 오가는 수레가 있다면......그 곳엔 빛과 어둠이 하나인...‘흰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싶다”고 말한다. 다음에서 알 수 있듯이 바로 창세기의 사건을 염두에 둔 것이다.

한 작가가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은 작품을 쓴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품을 쓰지 못하는 작가는 작가로서의 생명이 유예된 상태이다. 그 유예상태는 작가에게 새로운 세계를 향한 발판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도약에 이르지 못하고 생명의 소진으로 끝나며 결국 절필할 수밖에 없도록 몰고 간다. 상상의 고갈로 인한 것이다. 그래서 낭만주의 시대에는 작가의 상상이 창조력을 지닐 수 있다고 보고 문학이 인간을 구원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이며 유한한 인간의 상상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저자는 작가의 상상이 무한한 창조주의 세계를 향해 열려있을 때 비로소 생명을 지닌다는 것을 <흰소가 끄는 수레>에서 보여준다. 그것은 불멸의 빛이 며 흰소가 끄는 수레를 탄다는 것은 작가의 상상이 영원을 향해 열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 순간을 저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다시 연필을 들고 원고지와 마주해 않으면서 천지창조의 마지막 날 아침처럼, 휘황한 광휘의 허공으로 형형색색 수천의 나비 떼가 날아오르는 것을 본다. (김치수의 해설에서)”. 작가의 상상은 창조세계에 닿아 억겁의 어둠을 뚫는 섬광이 된다.

절필했던 작가가 다시 모든 감각의 촉수를 열고 지표면을 차고 일어나는 어휘의 나비 떼들을 포충망에 담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상상이 생명력을 회복한 때문이다. 그래서 흰소는 화가 이중섭의 그림에서처럼 삶과 예술의 보이지 않는 일면까지 광범위하게 동반하면서 독자들의 삶 속에 문화적 파급효과를 나타내준다.

성경 사무엘상 6장에는 잃었던 여호와의 법궤를 찾아올 때에 ‘소가 끄는 수레’에 실리어 운반되고 있다. ‘소가 끄는 수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실어와 꺼져가는 생명을 소생시키는 도구였다. 비록 <흰소가 끄는 수레>에 불교적 소재가 많이 등장하는 작품이지만 작가의 흔들리며 방황하는 주체는 결국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그 구원을 꿈꾸고 있다.

- 송영옥 박사
‘한국수필’에서 수필로, ‘문단’에서 단편소설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국제 PEN 정회원이다. 수상집 《미운 남자》, 《하늘 숲》, 영한시집 《The Womb of Life(자궁의 그림자)》와 세계 문화 예술 기행집 《해지는 곳에서 해뜨는 곳까지》, 《이 지구를 떠돌고 싶다》, 문학에세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가 있다.

세종대, 미국 텍사스 주립대에서 영문학을 수학하고 경북대 대학원에서 헨리 제임스 전공으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75개국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는 Y’s Man International에서 국제여성부장을 두 차례 역임했고, 전 세계 60여 개국을 여행하며 문화 예술에 대한 견문을 넓혀 왔다.

임민용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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