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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배탈 날 수 있는 신학 없는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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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은성 교수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대체적으로 목회자들이 하는 말이 목회 현장은 신학교에서 배운 것과 다르다고 한다. 훈련소에서의 훈련과 실전은 딴판이라고들 한다. 처녀 때 신앙은 냄비 신앙이요, 결혼 한 주부의 신앙은 뚝배기 신앙이라고들 한다. 실전의 중요성과 상황을 반영하는 말이다.

효도 역시 결혼하고 난 후 자녀를 키워봐야 부모님의 사랑과 헌신을 이해한다고 한다. 목회도 그러할까? 목회도 배움과 신학이 현장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헬라어와 히브리어, 심지어 라틴어까지 열심히 배웠는데 목회에 쫓기다 보니 연구하는 시간보다 제때 설교 준비하는 것까지 바쁘다. 아니 쫓긴다.

한국교회의 목회는 외적 성장에 노이로제가 걸린 상태다. 아니 정신병적인 현상이다. 성도 개개인의 성장보다는 목회자 자신이나 각 교회 지도자들의 만용으로 비만을 건강한 교회라고 여기고 있다. 이에 반하여 질적 성장을 위해 작은 교회를 부르짖는 건강한 교회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정말 귀한 일이다. 교회의 예산을 선교에 많이 투자한다고 외치면서 자랑하는 교회보다도 지역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귀한 교회들을 본다. 사회 속의 교회이지 은둔적인 교회를 지양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본다.

그러면서도 대형교회의 횡포는 아직도 자행되고 있다. 마치 한국인들이 알려진 brand 제품이 좋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 실제는 모두 하청을 받아 중소기업에서 만든 제품들인데 말이다. 교회도 그러하다. 성장 위주는 수평이동이다. 85%가 성도들의 수평이동이다.

개인 주택에서 아파트를 선호하는 것처럼 한국교회인들은 보다 나은 환경의 교회로 이주토록 만드는 것은 아파트 가격을 부추기는 떳따방들과 같이 대형교회의 횡포이다. 그들이 광고하며 알리는 상품들은 외면당하고 있는 작은 교회들이나 개척교회들에게는 한 편으로, 괴로움을 안겨다 주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달콤한 유혹이다: 나도 그처럼 성장할 수 있겠구나. 그래서 대형교회가 알리는 광고 속에 만병통치약이라는 과잉 광고의 허실을 깨달아야만 할텐데.

한국 약국에서는 의사의 약 처방 없이 지금까지 행해다가 2년 전부터 행해지다가 이제는 의사의 약 처방을 의무화 하고, 의사와 약사의 일을 분업시켰다. 이유가 어쨌든지 간에 현상적 결과에 관해 동의를 일단 한다. 왜냐하면 툭하면 진단도 제대로 하지 않고 내려주는 약사들의 처방은 매우 강하여서 잘 듣는다.

하지만 그것이 면역이 되고 나면 더 이상의 처방이 필요하고, 그리고 더 이상의 처방이 요구된다. 하지만 제대로 된 진단과 제대로 된 약 처방이 필요하다. 그래야 건강한 육체를 우리가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약이라는 것이 남용하면 사람을 죽이는 독이지 않는가?

건조한 신앙생활을 본다. 모두들 영성이라면 만병통치약인 줄 알고 ‘제 4의 물결’처럼 밀어닥친다. 영성이 마치 과거의 성령운동과 별 차이점이 없다. 외적 성장만을 꿈꾸는 교회는 수도원적 영성을 말하면서 아무런 신학적 점검도 없이 행해지고 있다.

또는 셀 목회라 하면서 대형교회들은 마치 그것으로 교회가 환상을 꿈꿀 수 있다고들 수백만 원을 투자하면서 목회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과거에 강해설교, 제자훈련 등으로 순수한 목회자들을 유혹했던 것처럼 말이다. 약사가 내려준 처방처럼 당장을 약의 효험을 보는 듯하다. 건강한 것처럼 보인다. 의사의 제대로 된 약 처방도 없이 말이다.

건강한 몸은 건강한 정신에서 말미암는다는 것은 누구든 알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신앙생활은 교회사적으로 이미 점검된 사실이다. 기도와 말씀이다. 이 기본적인 것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문제는 동일한 약인데 어떻게 배분하고 섞어서 제조하느냐이다. 그래서 목회자 스스로가 바쁜 목회적 생활보다도 실전의 삶 속에 뛰어 들어 성도들의 현장을 목격하고, 체험하여야만 한다. 그 속에서 만들어진 말씀이 아니면 건조하거나 소리만 나는 꽹과리에 불과한 설교가 될 뿐이다. 귀만 거슬리는 설교 말이다. 그러한 설교를 듣고 건조할 수밖에. 안타까울 따름이다.

달콤한 사탕 발린 설교들이지만 그들의 보자. 엘리트주의에 빠져서 자신의 말이 모든 것인 양 외친다. 자신의 모본적인 삶은 말씀과 거리가 멀다. 그것에 우리는 괴리현상을 목격한다.

건강한 생활을 위해 운동이 필요한 것처럼,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 무턱대도 먹는 것은 설사나 배탈이나 아니면 비만에 빠지기 일 수다. 우리는 목회적 현장에서 점검도 없는, 즉 신학적 점검도 없이 무턱대고 채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 않는지 면밀히 점검해 보아야 한다.

인스턴트(instant) 식품을 선호해서는 안된다. 당장은 해결되지만 후에 나타난 결과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배고프다고 무턱대고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목회는 모험이 아니다. 실전이다. 성도들의 영혼을 다루는 문제이다. 육체에 대해서 진단을 내리고 처방이 있는 것처럼, 올바른 신학적 점검 없이 목회에 적용하면 피해를 보는 성도 각자는 누구가 책임을 질 것인가?

나는 염려한다. 신학적, 역사적, 성경적, 그리고 경험적 점검 없는 목회 프로그램을 채택하는 것은 음식을 허겁지겁 먹고 배탈이 나서 급하게 행동을 취하는 것과 같다. 미국에서는 모든 음식에는 영양분(nutrition)을 표기토록 되어있다. 이것은 법이다. 음식물을 통해 내가 얼마큼의 영양분을 섭취하는지를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건강한 육체를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몸에 해로운 담배에도 몸이 해롭다는 표기를 하지 않았기에 담배회사가 상당한 피해를 받았다. 우리의 목회 현장에서 분명한 영양분을 표기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정통한 신학과정을 다시금 밟아야만 한다. 단기간에 있는 대형교회에서의 프로그램으로 만족하는 것은 신학 없는 것이다.

당장은 맛이 있지만 이빨을 썩게 할 것이다. 신학자들에 의한 점검이 있은 후, 목회를 조명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탈이 날 뿐이다. 목회자는 신학자들이 모두 될 수 없지만 신학에 대한 확신이 있으야만 한다는 것이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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